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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행시 Oct 30. 2022

70대 운전하는 남자

숙명처럼 여기고

 지역이 작을수록 가족이나 친지를 제외하고 아는 사람의 비중을 따져보면 같은 공무원 그룹이 80퍼센트 이상 차지한다. 근무 중에 만날 수 있는 사람 수는 대부분 정해져 있다. 특별히 무슨 공청회나 아카데미를 개최하지 않고는 대부분 부서 직원 이십여 명, 화장실 오가며 만나는 사람 다섯 사람 정도, 업무차 찾아오는 내방객들 십여 명 정도, 그리고 꾸준히 연락하며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동갑내기 또래나 같은 학교 출신자들이다. 그렇게 뭉텅뭉텅 모인 그룹들과 나의 삶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삶이 교차하는 지점 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나와 별다른 끈끈함이 없는데도 내가 인사발령이 났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에 비해 한 곳에 오래 있다 싶을 때도 연락을 해왔다. 비들 비들 말라가는 다육식물을 발견하고는 지레 놀라 부랴부랴 물을 끼얹는 다육이의 주인장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좀 생뚱맞다 싶지만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항상 진심이 담겨 있다. 


 인사 발표가 나고 3주나 지나서야 전화가 왔다. 승진도 아니고 그냥 부서만 옮긴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너무 늦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까지 했다. 그게 미안할 일은 아닌데도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번에는 정말로 밥이라도 먹어야겠다 싶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청 옆 브런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위치가 좋아 젊은 직원들이 자주 찾는다. 그래서 단점은 좀 시끄럽다는 것. 그날은 다행히 손님이 많지 않았다.      


 가을이 오는 길목.

다른 이들은 갑자기 찾아온 추위를 피해 근처 해장국집으로 달려갔나 보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아, 춥다.’를 연발하며 연한 브라운색 카디건 앞섶을 여몄다. 입은 춥다고 했지만 옷차림은 따뜻해 보였다. 예전보다 살집이 붙어 있었다. 마스크를 벗으니 후덕해진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잘 지냈냐는 통상적인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다지 고와 보이지는 않지만 단풍이라는 걸 시도하고 있는 벚나무 몇 그루가 눈에 띄었다.     


 지금은 아가씨 때 모습은 찾기 힘들어졌다. 30여 년 전 그녀는 옆에 있는 과에서 근무했다.   나이는 두세 살 어렸지만 공무원을 일찍 시작했다. 작은 얼굴, 가는 허리, 지금으로 보면 여자 아이돌급 몸매였다. 게다가 옷은 또 왜 그렇게 입고 다녔는지.


 노랗게 물들인 긴 생머리에 짧은 스커트, 성의 없이 질질 끌고 다니는 슬리퍼까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옷차림과 말투였다. 가끔 아버지뻘 되는 과장들이 혀를 끌끌 차며 대놓고 뭐라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다음날 더 진한 화장에 화려한 옷을 입었다. 여직원에게 바지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경직된 공무원 조직 속에서 그녀는 특이한 존재였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날라리’라 불렸지만 자기 일은 틀림없이 해치웠다. 나이가 많은 축들은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젊은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는 로망이었다.


 발령을 받고 삼 개월 정도 지났을 때 나는 그녀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이 부러워 청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키 큰 여자 민원계장님이 나를 불렀다. 그녀는 아주 고상하고 점잖은 억양으로 나에게 말을 했다.     

 “대학생 때는 청바지를 입어도 되지만 여기는 안되는 거 알죠?”   

  

  나는 너무 창피했다.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민원대 옆으로 지나는 그녀가 나를 흘깃 쳐다봤다.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청바지는 안되고 반바지는 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청바지가 반바지보다는 낫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왜 나만 지적을 당하는 건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며칠 후 현관 앞에서였다.      


 외부 출장을 가려고 현관 앞을 나서는데 그녀가 검은색 중형차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열린 차창 사이로 운전자의 얼굴이 보였다. 40대 정도의 남자 어른, 그녀는 운전대를 잡은 그 어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까르르 깔깔, 슬리퍼를 신고 마룻바닥을 지나가는 소리만큼 경쾌하고 가벼운 웃음소리였다. 출장을 함께 나선 남자 직원이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 사람이 아버지래. 1호차(시장 차) 운전사야. 끗발이 대단하지’"    


 그녀의 아버지는 운전직 공무원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운전면허가 있고 자가용을 가지고 있지만 90년대 초만 해도 드물었다. 관공서에도 기껏해야 오토바이 정도였고 자동차는 자치단체 장이나 의회 의장을 수행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1995년 본격적인 지방선거가 실시되면서 선거로 자치단체 장을 뽑았다. 대부분 선거로 인해 탈 사람이 바뀌면 1호차의 기사도 바꿨다. 전임 시장, 군수를 모셨던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불편해서 그랬을 거라고 한다. 뭐 입장을 바꿔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한 번도 보직이 바뀌지 않았다. 만 58세를 채우고 수년 전 퇴직했다. 그 당시만 해도 6급 이하는 58세, 5급 이상 상위직은 만 60세가 정년이었다. 그는 그렇게 ‘전설’로 남았고 지금까지도 그런 이는 한 사람도 없다.


  수장의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상당한 권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암암리에 가족의 인사를 부탁하고 아는 사람을 천거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 지금은 『이해충돌 방지법』이니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같은 제동 장치가 있어 어림없는 얘기지만 30년 전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그저 운전에만 충실했다. 그녀의 천방지축은 어차피 결혼과 동시에 사그라졌고 특별한 혜택을 누리지도 못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아버지가 정년 때까지 수장의 차를 몰 수 있는 비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남아 있는 그분은 늘 현관 앞에 차를 주차해 놓고 차량용 떨이개로 차의 먼지를 구석구석 쓸어내던 모습이었다.     


 나는 우람한 몸집, 우직한 눈매와 열릴 줄 모르게 꾹 다문 입술을 가진 그녀의 아버지, 퇴직한 선배 공무원의 안부를 물었다. 아직도 그렇게 멋진 포스로 지내고 계시는지. 마침 주문했던 식사가 나오자 그녀가 배고프다면서 일단 먹자고 했다. 이런저런 자식들 얘기, 각자의 사무실 분위기, 아는 사람들 얘기가 이어졌다. 이윽고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그녀가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췌장암 말기였다.     

 이미 의사가 선고한 기한을 넘기고 있었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지금은 마른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올해 초 소화가 안된다면서 병원을 자주 찾았다. 약이나 주사 처방으로도 복통이 감소되지 않자 내시경을 했지만 뚜렷한 병명을 찾지 못한 채 아버지는 매일 1kg씩 몸무게가 빠졌다고 한다. 가족들이 너무 걱정스러워 싫다는 아버지를 끌고 서울로 올라갔다. 최종 진단을 받았지만 이미 암 덩어리는 위와 간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매일 뒷산을 오르고 영양식을 챙겨 먹으며 ‘살 수 있다’는 일념으로 견디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지만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안쓰러워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만, 병원에서 준 약도 일부러 먹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 내성이 생기고 약에 의지해서 운동과 섭식을 중단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고통이 극에 달했음에도 아버지는 입을 앙다물고 참더란다. 답답했지만 그저 묵묵히 아버지를 응원하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매일 빼놓지 않고 하는 일과가 차를 운전해서 시청에 와서 막내딸 얼굴을 한 번 보고 가는 거였다. 그녀가 기운도 없는 아버지가 운전하는 것이 너무 걱정스러워 화를 내며 만류하자 아버지는 할 줄 아는 게 운전밖에 없고하루라도 운전대를 잡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라고 하더란다. 지금은 너무 쇠약해져서 운전도 직접 못하는 데도 주말이면 꼭 그녀에게 차를 태워 달라고 한다.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일까? 이른 나이에 공직에 들어와 40년을 운전했다. 지겨울 법도 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 같았다. 죽음이 임박해 오는 순간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몰두하는 사람. 이제 겨우 일흔일곱밖에 되지 않았다. 친구들과 일박 이일 등산도 거뜬히 할 수 있고, 일요일에는 파크골프장에서 신나게 경기 한 판 붙어볼 나이였다.    

  

 그녀는 포크로 단무지를 찍는다. 손에 힘이 없는지 잘 찍히지 않아 여러 번 포크질을 한다.

 “잘 견디시고 계시니 걱정 말아”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상투적이고 성의가 없어 나 자신을 책망했다.  

   

 며칠 후 그녀의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운전 만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고 했던 1호차 기사님, 이제는 아프지 않은 세상에서 신나게 4륜 구동을 몰고 다니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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