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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행시 Oct 30. 2022

50대 내 남자의 꿈

명퇴 쇼크

‘은퇴’가 그저 어느 날부터 직장을 나가지 않게 되는 일상의 변화쯤으로 치부되어 온 지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이 단어는 불안을 동반한다. 아마 은퇴시점에서 오는 온도 차이 때문일 것이다. 만기를 채우고 자연스럽게 나가는 것과 채우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는 행위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일 년 전,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사회를 맡아 다음 순서를 읽어 가는데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아침에 회의가 있다고 분명 말을 했는데 마누라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걸 또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보류를 누르고 다음 순서를 읽는데 또 울렸다. 회의에 방해가 될까 봐 다시 보류를 누르고 이번에는 발언대 아래 넣어 두었다.      


 참석한 위원들의 단어가 공중에서 부딪혔다. 충돌과 반복, 어느 때는 살짝 뒤틀려진 조합으로 두서없이 떠다니다가 3시간 만에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회의장을 정리하려는데 서 있느라 애썼다며 팀원들이 들어가라고 했다. 오랜만에 차려입은 정장에 구두, 둔중한 상체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는지 다리가 퉁퉁 부었다.      


 구두 위로 보이는 발등이 붕긋하게 올라와 있다. 걸음도 잘 걸어지지 않아 다리를 질질 끌며 사무실을 향하는데 그제야 세 번이나 바람 맞힌 남편의 전화가 생각났다. 뭔데 이렇게 전화를 했지? 그렇게 자주 전화를 주는 사람이 아니어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큰일이 났거나 급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내리 세 번 울린 전화는 잠잠해져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니었는지도 모르지만 궁금한 마음에 번호를 눌렀다. 두 번의 신호음에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퇴 신청서 내고 오는 길이야. 내기 전에 당신한테 말하려고, 근데 안 받길래, 그냥 냈어.”     


 남편은 '집에 택배 하나와 있다'라는 정도의 사실을 말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통화가 됐으면 신청서를 내지 않았을까? 이미 결정된 일, 의논이 아니라 단순한 통보였다.      


 언제고 닥치리라 예상했지만 ‘그냥 냈어.’라는 마지막 문장을 듣자 나를 지탱해준 뭔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것 같았다. 가슴 한가운데가 따끔했다. 심장이 떨어지면 이런 기분일까?       

 “그. 랬. 군. 요.”

 간신히 끌어 모은 네 개의 글자를 내뱉고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수년 전부터 남편은 명퇴를 하겠다고 말했다. 일부러 사표를 내지 않는 한 60세 정년까지 보장된 공무원이었다. 그냥 의례적인 푸념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퇴직을 주장했다. 이유는 지금까지 살면서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못했다는 거였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체질에 맞지 않아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았다고 했다. 그게 '농사'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농사는 정년퇴직 후에 해도 충분한데 굳이 명퇴까지 하고 할 일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남편이 말하는 ‘농사’는 그저 소득 없이 먹거리만 조금 심는 100평 남짓한 소일거리 수준이었다. 대놓고 ‘한량’을 하겠다는 걸로 들렸다.     


  ‘농사’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밭 한 뙈기 없는 형편에 아직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가장이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어머님과 나는 남편의 명퇴 반대를 위해 끊임없이 연대했다. 친지들의 모임에서 일부러 공론을 만들어 남편의 명퇴가 얼마나 무모한 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게 했고 남편이 즐겨보는 산(山) 사람들 프로그램을 보면서 대부분 병든 사람이나 사업이 망한 사람들이라고 폄하했다.   


 남편의 현실성 없는 결정에 반기를 들었지만 그는 완강했다. 서로의 감정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전까지 우리 부부는 크게 다툼이 없었다. 남편은 가정적이고 온순했다. 남을 앞 서기보다 같이 가는 걸 좋아했고, 누구에게 잘 보이기보다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했다. 성과나 경쟁을 싫어해서 그저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승진도 동기보다 늦었고 가고 싶은 부서도, 업무도 배정받지 못했다. 성실했지만 독보적이지 않았다.      


 눈물과 애원으로 아들을 달래는 어머니의 안쓰러움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2년 후 명퇴를 하겠노라며 선전포고를 했다. 그날이 바로 포고를 받은 지 2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남편은 7월 말 정식 퇴직을 앞두고 보름간 장기휴가에 들어갔다. 아침 출근 준비에 분주한 나를 보며 남편은 땅을 알아보러 가겠노라고 했다. 퇴직과 함께 주어지는 명퇴금으로 작은 농가주택이 딸린 텃밭을 알아보겠노라고. 땅값이니 시세니 뭐 그런 쪽에는 워낙 관심이 없는 터라 얼마가 드는지도 몰랐다.      

 공무원은 연금을 주기 때문에 명퇴금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잣대를 어디에 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소기업과도 비교 안될 정도로 적은 금액이다. 이제 땅을 보러 간다는데 최소한의 관심을 보여야지 싶었다.      

  “모자라지는 않은 거야?”라고 물었다.

 문장을 발음하는 동시에 후회가 밀려왔다.


 남편은 내쪽을 바라보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지 않아도 모자랄 것 같아. 돈 좀 있냐?”     


 작은 지방도시, 결혼해서 내 집 하나 마련한 게 전부였다. 딸 셋에 팔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님, 매달 목돈 들어가는 일은 없지만 한 달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다. 은행보다 이율이 높다 하여 공제금을 넣고 있었지만 그건 미래 우리 가족을 위한 비상자금이었다.      


 맞벌이라 경제 사정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버는 만큼 쓴다는 말이 있듯이 저축도 쉽지 않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남편은 유유자적 ‘농부 놀이 환상’에 빠져있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화가 났다.      


 시어머님의 슬픔에 가려 나는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괜찮은 게 아니라 그냥 깊숙이 눌려있는 거였다. 대범한 척, 괜찮은 척, 무장하기 위해 줄곧 누르고 눌러왔던 배신감, 실망, 분노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퇴직 결정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당신이 병이라도 날까 봐 참았어, 그런데 이건 아니지. 생활비는 내가 번다고 하지만 그 나머지는 당신도 부담해야 할 몫이야. 가족이니까.”  

    

 냅다 소리를 질렀다. 남편의 돈타령은 대꾸할 가치도 없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대답 따위는 필요 없었다. 자동차 키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렸다. 시동을 켜고 운전대를 잡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평온했던 내 삶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오십 줄에 접어들면서 가끔 남편은 생일날 고가의 선물을 들고 들어왔다. 나름 커리어 우먼 인 엄마가 변변한 가방이나 옷도 없다면서 아이들이 아빠를 설득했을 테지만 여태껏 받아보지 못한 호사에 혼자 슬며시 웃곤 했다. 나 자신이 속물처럼 보였지만 얄궂은 일상에‘돈’은 사람을 미치게 했다.     


 나는 내가 그저 소심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명품 타령을 하며 옷과 가방을 들먹일 때도 속으로 ‘속물들’이라고 비웃곤 했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나도 명품 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을까? 나도 한 벌에 수 십만 원 하는 재킷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 남편과 아이들은 신경을 써줬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가족의 그늘이 되었던 나무를 잘라내고 자신만의 동굴 속으로 가 버린 남자, 그늘이 없어져 지글지글 끓는 태양 아래 시커멓게 기미 오른 얼굴로 온몸이 바싹 말라가는 여편네는 아랑곳하지 않는 채. 어떻게 하지?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15분 후에 사무실에 닿는다. 빨리 멈추지 않으면 빨개진 눈으로 사무실로 들어가야 한다. 쉽게 멈추지 않는 눈물 때문에 차를 주차하고 몇 분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이 어이없는 눈물은 무엇인가? 남편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고 그저 시간만 보내면 저절로 해결될 줄 알았다. ‘언젠가 저 사람도 마음을 바꿀지도 몰라. 퇴직이 그리 쉽나? 힘드니까 저렇게 말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정작 힘든 건 남편이 아니라 나였는데도 말이다.   

   

 가장의 퇴직, 돈벌이의 중단, 지금까지 안온했던 우리 가족의 삶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두려움을 그저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나는 아이처럼 울고 있을 수밖에. 어떻게 하루가 지났는지.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이 와 있었다. 이미 저녁을 먹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마주치지 않으려고 쓸데없이 집안을 돌아다녔다. 남편도 눈치를 챘는지 흘끔거렸다. 그리고 말도 없이 A4 한 장을 내밀었다.     


 '명퇴 설계서'라고 남편의 글씨가 있었다. 남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동산, 물론 아파트 한 채였지만 연금액, 예금, 보험이 쓰여 있었다. 당장 퇴직한다고 문제 되는 건 없었다. 수입이 조금 줄어들 뿐 모든 것은 가정경제에 맞춰 살아가면 된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루 사이 남편도 핼쑥해져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반듯하게 입고 출근하는 남편, 직장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고민을 나눌 수 있었던 동료이자 선배, 어린아이 같이 구는 철부지 아내를 위해 아낌없이 비싼 선물을 사들고 올 줄 아는 다정한 남편을 이제 기대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상실.      


 이미 물질이 주는 달콤함에 길들여진 사람한테 갑자기 소박한 농부의 아내를 기대하는 남편의 뻔뻔함이 더욱 힘들다는 것을. 어차피 지금 와서 바꿀 수는 없었지만 단지 남편이 퇴사를 하든, 농부가 되든 가족의 일원임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리고 나에도 지금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인생이란 게 무지개 너머 어마어마한 것들을 마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저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들을 엮어가는 과정이다.  남편이 가는 길에 가족이라는 굴레는 늘 지고 가야 할 운명 같은 것, 각자의 삶의 방식을 인정해주고 현실과 잇닿은 사소함마저 회피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로로 우리 부부는 화해 아닌 화해를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남편의 퇴직을 이유로 더 이상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울 일은 아니라는 것’이 맞을지도.     


  몇 달 후 남편은 집 근처에 작은 농지가 딸린 농가주택을 구입했다. 벽지와 장판만 바꾸고 필요한 몇 가지를 옮겨놓고 남편은 월요일 아침 그의 농지로 출근한다. 초보 농부답게 온갖 작물을 심어놓고 매일 고라니와 까치들과 신경전을 벌인다.     


 ‘백수’라 놀리는 나에게 '국가가 인정한 농부'라면서 '농업경영체 등록신청서'를 흔들어 대는 남편의 환한 웃음을 이제는 담담하게 볼 수 있다.      


 경제적인 면은 확실히 타격이 컸다. 하지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 가뭄으로 땅은 메말랐지만 싹이 움텄다. 유난히 잦은 마른바람에도 곡식은 제 살 익어가는 냄새를 보내왔다. 남편은 가족이 먹을 거라며 그 흔한 농약 하나 주지 않고 채소를 길러냈다.      


 풀과 함께 자란 채소는 사실 볼품없었지만 식탁 위에 올려지면 그 진가가 발휘됐다. 자기들만이 가지고 있는 달큼하고 싱그러운 냄새를 마음껏 뽐내며 우리 입맛을 돋구었다. 채소도 이렇게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데 사람인들 어떻겠는가? 남편도 어쩌면 남들이 이미 잘 닦아놓은 넓고 편한 길에서 빠져나와 아무도 가지 않은 작고 비좁은 비탈길을 오르면서 어딘가 숨어있는 자기만의 색을 발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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