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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행시 Oct 30. 2022

60대 캠프장님

정말 순수한 도움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사는 나는 서울이 참 어렵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무엇보다 길이 너무 복잡하다. 지방은 아무리 도심지가 발달했다고 해도 몇 번 다녀보면 대략 그림이 그려진다. 그런데 서울은 버스를 타고 내림과 동시에 방향감각을 잃는다.    

 

 원래 길눈도 어둡지만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주는 중압감이 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그냥저냥 봐줄 만한데 서울만 오면 사람이 약간 띨 해진다. 그날도 그랬다.    

 

 2년마다 하는 건강검진을 끝내고 결과지를 받았다. 정상치를 벗어나는 숫자가 흔했다. 몇 가지는 정밀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심란했다. 안 좋은 거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겁은 많아서 걱정이 앞섰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건강 염려증’이라고 놀려댔다.     


 안 되겠다 싶어 정밀 검사를 받으려고 큰 병원에 예약을 했다. 태양이 지글지글 끓기 시작하는 8월 어느 날,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지방에서 큰 병원을 가려면 모든 것들을 챙겨가야 해서 나름대로 완벽하게 준비했다. 버스는 에어컨을 얼마나 빵빵하게 틀어 놓았는지 몸이 으슬으슬 춥기까지 했다. 다행히 너무 추워 온도 좀 높이라고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만 하는 사이 서울에 도착했다. 부랴 부랴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예약한 시간에 맞춰야 하니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접수 직원에게 내원 이유를 설명하자 검사결과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알고 있었다는 듯 당당하게 서류를 내밀었는데 아뿔싸 2년 전 서류였다.     


 진단 결과를 비교해 보느라 2년 전 결과지까지 꺼내서 들여다본 후, 가져올 서류는 넣어두고  넣어 둘 서류를 가지고 온 것이다. 접수 직원은 이것으로는 안되니 다음에 다시 오라고 했다. 너무 얄미웠다. 요술봉이라도 있으면 당장 그 직원을 오징어로 만들고 싶었다.      


 나는 지방에서 오랜 시간이 걸려서 왔으니 다른 대안은 없냐고 물었다. 직원은 나를 올려다보더니 안되었다 싶었는지 이메일 자료라도 가져오라고 했다. 왜냐하면 의뢰서가 없으면 검사에 따른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러 마하고 접수대를 벗어났다.   

  

 건강검진을 한 병원에 전화를 해서 이메일로 진단결과서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출력이 문제였다. 병원에서는 코로나19로 일체의 외부 컴퓨터나 프린터기 사용을 차단한 상태였다. 병원 입구에서 안내를 전담하는 직원에게 물었더니 가까운 주민센터에 가면 출력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했다.  

    

 구글 지도로 가까운 주민센터를 검색하니 길 건너 반대 편에 ○○3동 주민센터가 있었다. 지도상에서 주민센터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현황 도로로는 꽤 먼 거리였다. 신호를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왼쪽 방향으로 걷다가 60미터쯤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고 언덕을 따라 쭉 내려가면 목적지가 나왔다. 소요시간은 10분.      

 그 10분은 기계처럼 몸을 움직일 때나 나올 수 있는 수치였다. 한 여름 태양볕에 걸음이 느려지는 오십 대 아줌마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의 숫자에 5분을 더한 다음 간신히 주민센터를 찾아 들어갔다. 하지만 이곳도 코로나19로 외부인의 컴퓨터 사용을 금지해 놓은 상태였다.      


 나는 창구에 앉아 있는 공무원에게 내가 공무원임을 밝히고 필요한 서류의 출력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정말 염치 불고하고 용기를 낸 거였는데  9급 공무원은 그런 일은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뭐 틀린 말도 아니다. 주민등록등본이나 인감증명서를 발급해 주는 일이 그의 일이니 당연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실망을 안고 나가려는데 입구 왼쪽에 현판이 하나 보였다. ‘○○3동 자원봉사캠프’. 안을 들여다보니 PC가 한 대 있었다. 반가웠다. 안으로 들어가니 60대로 보이는 여성 한 분이 물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도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내가 병원 진료 때문이라고 하니 마음이 약해졌는지 PC를 내어줬다. 다행히 검진기관에서 진료 결과서를 보내 주었다. 나는 인쇄 버튼을 누르고 안도의 숨을 쉬었는데 이번에는 프린터가 문제였다. 자주 쓰지 않다 보니 프린터 위에는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용지함은 비어있었다. 캠프장은 밖으로 나가 용지를 구해왔다. 용지함에 종이를 채우는 사이 그녀는 프린터기 위에 있던 물건들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인쇄는 27장이나 되었다. 필요한 곳만 부분 출력을 했어야 하는데 정말 바보스럽게도 전체 출력을 눌러버린 것이다. 얼마나 미안하던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캠프장님은 괜찮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않냐고. 오히려 큰 병이 아니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나는 바닥에 널려진 물건들이 신경이 쓰였다. 내가 불편함을 초래했으니 같이 치웠어야 하는데 필요한 서류가 손에 쥐어지자 빨리 나가고 싶어졌다.  

    

 이래서 사람이 간사하다고 하는 건지. 나의 마음은 미안함이 90퍼센트였지만 내 뇌리에는 부끄러움이 90퍼센트였다. 공무원이나 하는 사람이 서류하나 제대로 가져오지 못해서 서울 바닥을 헤집고 다니는 꼴이 한심스러웠다. 캠프장이 어서 가보라고 하는 말과 동시에 뒤도 안 보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검사 결과 큰 문제는 발견되지 않아 별다른 처방 없이 집으로 내려왔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사흘이나 지났을까? 봉사단체에서 어려운 이웃 반찬 나눔을 하겠다고 찾아왔다. 그들을 보니 ○○3동 자원봉사 캠프장이 생각났다. 그렇게 은혜를 입고도 그냥 지나칠 뻔했다. 점심시간에 마트에 가서 복숭아 한 상자를 사서 그분에게 보냈다. 다음 날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다. 우리는 단 몇 분 동안 만난 사이지만 마치 오래된 지인들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해 예순 다섯, 3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하고 정년퇴직을 했다. 오랜 직장생활로 그동안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하겠노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1년쯤 지나자 시들해졌다. 댄스 프로그램을 등록했지만 타고난 몸치인지 3개월이나 땀을 내며 노력했지만 안되더란다. 그림도, 탁구도 같이 했지만 길게 하지 못했다.

     

 그래도 뭔가를 배우려는 욕심에 이삼 년을 버텼지만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 관계도 그랬다. 퇴직 후에는 여기저기 연락도 자주 오고 만남도 잦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찾아주는 이도, 찾아갈 곳도 없었다. 점점 모든 게 시들해지더니 나중에 우울증이 찾아왔고 사는 게 무의미해지더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예전에 알고 있었던 자원봉사자 한 분을 만났다. 봉사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사람이 좋아 도와주겠다는 명분으로 한 번 두 번 나오게 된 것이 지금, 캠프장까지 하게 되었다고.      


 오래된 모델이라 프린터 출력 속도가 느렸다. 세월아 네월아,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장을 뽑는데도 몇 초가 걸렸다. 그렇게 27장이 될 때까지 어색한 분위기를 다행히 캠프장은 자신의 이야기로 채워 주었다. 마음이 급해서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였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줄줄이 꿰어졌다. 우리는 서로에게 잘 지내라는 안부를 다시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살다가 이런 일도 있구나.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이런 선정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내가 만약 캠프장이었다면 나도 그랬을까? 대단한 분이다.      


 예전에는 내가 공무원으로서 누군가에게 많은 것들을 베풀며 산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 고마움을 기릴 만큼  겸손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았을 뿐이었다. 날마다 서로에게 가진 것을 내어 주고 때로는 누군가로부터 받아 가며 사회라는 커다란 상자 속을 거닐고 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내 것만 소진하고 나만 손해 본다고 하고 있으니 아직 진화가 덜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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