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강남 재개발 지역에 텅 빈 공간의 거대한 구조물을 만든다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하다.
혹자는 평당 가격을 따져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을 것이고 혹자는 여유를 잊어버리고 높이만을 추구해 온 도시에 새로운 활력소라며 반기는 표정이리라. 막상 비대면 조사를 하면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 뇌는 이미 모든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는데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나의 뇌도 한번 놀란 적이 있었는데 뉴욕의 베슬(The Vessel)에 올랐을 때였다. 베슬은 높이 46m에 154개의 층계와 250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거대하지만 가운데가 텅 빈 벌집 모양의 독특한 건축물이다. 즉 여왕벌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벌과 일벌의 충성심에 취한 여왕벌, 그들이 생산한 달콤한 꿀로 가득 찬 벌집이 아니라 진짜로 텅 비었는지를 확인하러 온 사람들만 있는 벌집이다. 마천루의 건물 높이만큼 자본에 대한 욕구가 하늘을 찌르는 뉴욕 허드슨 야드에 세워진 벌집. 이는 마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이 환생하여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이들에게 ‘비움의 미학’을 느끼도록 선물한 것 같았다.
다른 방향으로 오르다가 다시 만나자 가볍게 포옹하며 활짝 웃는 연인들,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오르는 노부부의 굽은 등, 마치 놀이터의 정글짐을 오르듯 위에는 뭐가 있을까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눈망울, 꼭대기에 올라 허드슨강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여유를 가져보는 뉴요커들, 비워진 곳에서 추억만큼은 꽉 채우고 싶은 관광객들이 눌러대는 경쾌한 셔터 소리들까지. 그 뚫린 가운데를 보면서 360도 어떤 방향으로도 오르고 내릴 수 있기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많은 생각과 느낌이 시소타기를 하듯 채워지다가 비워지리라.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그 많은 계단을 올랐을까 내게 물어봤다. ‘여유는 가득 찼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비워졌을 때 오는 거구나’라는 답이었다. 그래서 베슬을 디자인한 건축가의 비움 철학은 물론 이를 흔쾌히 수용한 뉴욕시의 결정까지도 부럽고 감사했던 기억이 난다.
예전 같으면 빽빽한 스마트폰 일정표를 보며 분주하게 지냈을 텐데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다 보니 눈에 보이는 물건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관계까지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집안에 안 쓰고 쌓아놓기만 한 각종 물건들, 여러 개의 단체 카톡 방만큼 꽉 찬 관계들에서 자연스럽게 ‘비움’을 떠올렸다. 그 순간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만약, 탐욕이 꿀벌 나라에서도 사회문제가 된다면 베슬로 날아오기를. 꿀이 달아서 달콤한 게 아니라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행복한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달콤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겉으로는 비운 척하며 속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베슬을 필수 체험코스로. 부쩍 베슬이 던져주는 ‘비움’을 곱씹게 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