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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태나의 아름다운 여성들의 모임

도메스틱 엔지니어링

by Olive

몬태나에서 보낸 3년 6개월의 이야기

Time and good friends are two things that become more valuable the older you get.


3월 초 어느 날 동갑내기 한국인 친구가 내게 전화를 했다. 근처에 있는 교회에 도메스틱 엔지니어링이라는 여성들의 모임이 있다며 같이 가보자는 것이었다. 한 달에 한번 있는 모임으로 미국인 여성분들을 주축으로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여성분들과 함께 하며 다과도 하고 재미있는 활동도 하는 모임이라고 했다.


동갑내기 친구네 가족은 지숙씨네. 몬태나 보즈만에 우리 가족보다 6개월 먼저 왔다. 우리 가족이 해외생활 신입사원이라면 친구네 가족은 여러 나라에서 해외생활을 두루 경험해 본 베테랑 부장급. 지숙씨는 해외생활의 지혜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에 보즈만에 있는 동안 내게 이모저모 도움을 많이 준 고마운 친구다.


도메스틱 엔지니어링 모임에 간 날. 처음으로 영어 환경에 맞닥뜨려진 첫 만남의 장면이 머릿속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2017년 3월 10일 저녁 8시였다.


두꺼운 패딩잠바를 입고 깜깜한 도로를 따라 카풀을 해서 간 곳은 교회 옆에 있는 작은 도서관 건물이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고 그동안 한국분들만 만났었기에 한국말만 하고 지냈었다. 하지만 모임에 도착하는 순간, 여긴 미국이지! 큰 깨달음이 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두 영어만 사용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날이 바로 영어만 쓰는 많은 분들을 한 자리에서 뵙는 첫 경험이었다.


환한 미소로 “How are you?”를 건네며 반겨주는 많은 분들. 처음 뵈었지만 따뜻한 포옹으로 환영해 주셨다. 하지만 인사를 해 주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은 온통 ‘큰일이다. 이제 영어만 써야 하는 거야?’라는 생각뿐이었다. 한쪽에 차려진 다과상에는 따뜻한 티와 쿠키, 과일이 있었다. 다들 차 한잔에 간식 한 접시씩 가지고 둥그렇게 앉기 시작했다.


모인 여성분들은 족히 서른 분은 가까이 되어 보였다. 절반은 미국인들이었고 연세가 지긋하신 분도 계셨지만 젊은 사람들도 있었다. 나머지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었는데 대학생, 대학원생 또는 아기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다.


모임 이름은 도메스틱 엔지니어링. “What does it mean?” 물으니 집안일을 가정을 경영하는 전문가라는 의미를 붙여 부르는 말이라고 했다. 전업주부 또는 가정주부를 도메스틱 엔지니어라고 한단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엔지니어라는 말이 붙으니 마치 대학의 어떤 전공처럼 느껴졌다.


매달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모임에는 주제가 있었다. 오늘의 주제는 ‘Bedtime: A Wonderful Time of Day’. 자장가에 대한 추억, 잠버릇, 잠자는 시간 등 Bedtime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느껴졌던 압박감. 누군가 룰라비...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뜻이지? 아, 맞다. 자장가!’ 점점 내 차례가 올수록 정신은 아득해져 갔다. ‘아,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할 수 없다. 그냥 내 소개나 하고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며 잠을 워낙 잘 자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야겠다.’라고 우리말로 할 말을 열심히 생각해 냈지만 영어로 이 말을 표현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머릿속 통역기를 돌려보는 사이 금방 내 차례가 왔다. 뒤죽박죽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차례가 지나갔다. 뭐라고 말했는지 하나도 기억도 안 났다. 내 순서가 지나가고 나서야 다른 사람의 표정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그전까지는 내가 말할 것을 생각하느라 잘 들리지 않았던 주변의 말들도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청 긴장하며 어설픈 영어로 한 몬태나에서의 첫 영어발표(?)였지만 모든 분들이 진심으로 귀 기울여 준 태도에서 많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후로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도메스틱 엔지니어링 모임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꼭 참석을 했다.


매달 다양한 주제로 모임이 이루어졌다. 뜨개질을 하기도 했고, 쿠션을 만들기도 했다. 추수감사절이나 부활절 등 중요한 날들이 있는 달에는 주제에 맞게 파티를 열어 주었다. 모임 때마다 맛있는 다과나 음식을 준비해 주셨고, 재미있는 게임도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모든 준비는 20~30명의 미국인 여성분들만 서로 담당을 정해 돌아가며 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참가자들은 늘 부담 없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해 주었다.


도메스틱 엔지니어링 모임은 대학교 학기 일정에 맞게 운영이 되었기에 방학 기간에는 정기모임이 운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기모임 이외의 시간에도 번개 형식으로 다양한 소모임이 이루어졌다. 영어 연습, 그림 그리기, 성경 공부, 요리 강좌 등 주제도 다양했다. 또한 원하는 모임의 주제가 있다면 언제든 제안할 수 있다고 늘 강조했다.

참가비도, 실습비도 없는 모임. 갈 때마다 언제나 환하게 반겨주고 잘 지내고 있는지 도와줄 것은 없는지 챙겨주는 도메스틱 엔지니어링 사람들. 여성이라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모임을 운영해 주어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국말이 안 통해도, 영어로 내 생각을 다 담기엔 부족해도 마음은 서로 잘 통할 수 있었다. 한 달에 1~2번씩은 꼬박꼬박 이루어진 모임 덕분에 나는 미국인 친구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가끔씩 다양한 나라에서 온 분들이 주최가 되어 자국의 음식을 같이 만들고 먹어보는 모임도 이루어졌다. 이런 행사가 이루어질 때마다 나도 한국 음식을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한국 요리 모임을 제안했다. 하지만 장소가 문제였다. 우리집은 세 식구 살기에 딱 좋은 크기.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는 턱없이 좁은 장소였다. 그러자 흔쾌히 한 미국 친구분께서 본인의 집과 부엌을 쓸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불고기와 잡채, 김밥 중에서 고민을 하다가 내가 만들기로 결정한 요리는 잡채! 김밥용 김은 구하기가 어려우니 패스, 불고기는 채식주의자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패스. 잡채는 몬태나에서 재료를 모두 구할 수 있었고 고기를 빼고도 충분히 맛을 낼 수 있기에 최종 낙점했다.


잡채 수업을 할 때 우리나라에 대한 소개도 간단히 하고 싶었고 집에서도 각자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인쇄물도 나눠주고 싶었다. 수업 시작 한 달 전부터 조금씩 조금씩 인쇄물에 담을 내용을 만들었다.


잡채 수업을 하기로 한 날, 우리 집 부엌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계란 지단은 미리 부쳐서 준비했고 당면과 채소, 양념 재료들을 챙겼다. 함께 먹을 흰쌀밥도 필요할지 모르니 크게 한 대접 준비했다. ‘파이팅! 저도 갈 거예요. 가서 도와줄 거 있음 함께 도울게요.’ 지숙씨가 문자를 보내주었다. 힘이 났다.


준비물들을 잘 챙겨서 미국 친구네 집에 시작 30분 전 도착했다. 모임 홈페이지에 며칠 전부터 잡채 수업을 공지하긴 했지만 참가 버튼을 누른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기에 많아야 5명 정도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요리 시작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다. 10명쯤 모두 모였다.


준비한 인쇄물을 돌리고 간단히 한국에 대해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한국어로 인사해 보자고 하며 인사말도 알려주었다. 그리고 바로 잡채 만들기에 돌입했다. 잡채 레시피는 생생정보통 잡채 황금 레시피를 응용했다. 당면은 물에 미리 불리지 않고 끓는 물에 11분 삶는 것이 비법이었다.


당면이 삶아지는 동안 야채들을 열심히 채 썰었다. 탁탁탁! 모두가 칼 끝을 지켜보는 듯했다. 갑자기 옆에서 한 미국 친구가 “아하!”하며 얘기했다. “Chop! Chop! Chop! So, the name is ‘chop’chae, right?” 재미있는 발상에 모두 웃었다. 그 친구 덕분에 모두에게 잡채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쏙 들어왔다.


잡채를 다 만든 후에는 식탁에 모두 둘러앉아서 쌀밥과 함께 시식을 했다. “Great! Yum!” 모두들 맛있다고 해 주시니 바빴던 하루가 다 보상되는 듯했다. 부족한 영어로 진행한 잡채 수업이었지만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몬태나 보즈만에서 있었던 시간 중 코로나가 없었던 3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도메스틱 엔지니어링이 있어서 마음 한편이 늘 따듯했다. 이번 모임 주제는 뭘까? 또 어떤 친구들을 만날까? 설렘도 안겨 주었다.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매달 다양한 모임을 준비해 준 몬태나 여성 친구들. 나는 그 친구들을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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