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of the best things about friendship is that age doesn't matter.
몬태나에 온 지 몇 달이 지났다. 오전에 아들이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서 ESOL 영어 수업도 들으러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차 운전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나의 영어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차를 혼자 몰고 나갈 땐 '혹시라도 차 사고가 나면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하지?' 하는 쓸데없는 두려움이 괜히 들곤 했다.
중1 때부터 영어를 배워왔고 영어공부를 매일은 못했어도 꾸준히 한다고는 했는데 미국인만 만나면 내 입은 잘 안 떨어졌다. 나와 같이 영어를 제2외국어로 쓰는 친구와는 대화를 곧잘 했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의 빠른 속도와 발음은 적응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번은 미국 친구들이 많이 모이는 모임에 호기롭게 스스로 혼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용기가 좋았다. 몬태나에 온 지 그리 오래 안 되었을 때였다. 백 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큰 강당에 모여서 서로 근황을 묻고 다과도 하며 친목을 다지는 모임이었다. 외국인도 별로 없고 대부분 미국 여성들이었다. 테이블별로 조를 구성하여 운영되는 모임.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열 명 정도가 모이게 되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한국분이 한 분 계셨다. 얼마 전 캘리포니아에서 이사를 오신 미나 언니였다. 언니는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와서 영어 때문에 고생을 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이십 년 넘게 살고 계시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금은 치과의사로 일을 하고 계신다. 물론 지금의 영어는 유창하시다.
같은 조에 해당하는 사람들 대략 열 명이서 어느 미국 친구네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미나 언니와는 한국어로만 이야기를 하다가 영어만 쓰는 모습을 보니 완전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각자 음식을 싸 와서 모이는 모임, 일명 포틀럭 파티(Potluck party)였는데 내가 가져 간 음식은 정말 안 좋은 선택이었다. 언젠가 미국인 친구가 김치를 좋아한다고 해서 아침에 정성껏 겉절이를 만들어 갔는데 한 두명만 시도해 볼 뿐이었다. 나중에 나는 김치, 떡 등의 한국음식은 호불호가 매우 강해 미국인 친구들 모임에 절대 가져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사를 하고 테이블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웠다. 하지만 내 가슴속에는 꽃이 아닌 까만 멍이 드는 것만 같았다. 미나 언니는 중간중간 이야기에 함께 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사신 지 오래되셨고 영어도 잘하시니 이야기를 함께 하는 게 무리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패션, 종교 얘기 등등 대화 주제만 파악할 수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핑퐁처럼 말이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그저 얼굴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꽤 오랫동안 조용히 있었던 내게 한 친구가 물었다. "우리가 너무 말이 많았지?" 대충 그런 의미였다.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지도 영어가 안 떠올랐다. 머리를 짜 내 한 마디 했다.
It's OK. Listening is easier than speaking.
말은 오케이였지만 마음은 안 오케이였다. 그렇게 모임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오는데 마음이 너무 이상했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여기 와서 왜 이렇게 영어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나 싶었다. 한국에선 교사로 강사로 말할 시간이 부족해서 걱정한 적은 있어도 말할 능력이 안 되어서 걱정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몬태나에 오니 말을 잘하는 건 고사하고 때론 이해하기도 벅찼다. 운전하는 동안 대화를 제대로 이해도 못한 채 어색한 미소만 띠며 앉아 있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속상한 마음이 치미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또 울고 말았다.
집에 도착해서는 운 것을 들키기 싫어 마음을 추스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눈치 빠른 남편은 "왜? 무슨 일 있었어?" 물었다. 영어 때문에 힘들다는 내게 남편은 이리저리 모임만 많이 다녀봤자 영어도 안 늘고 괜히 상처만 받으니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친구 먼저 사귀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맞는 말이었다. 매일 오전에 함께하는 영어교실 선생님이신 조안나에게 나의 이런 마음을 털어놓았더니 걱정 말라며 선뜻 친구를 바로 소개해 준다고 했다.
# 첫 번째 바니
처음 소개해 주신 친구는 바니였다. 간호사로 오래 일을 하셨다. 정년퇴직 후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자원봉사를 하시며 생활하고 계셨다. 특히 외국의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외국인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셨다. 미국에서는 그저 이름을 부르며 대화하기에 나도 마찬가지로 그냥 '바니'로 계속 불렀다. 연세가 우리 엄마보다도 더 많으신 분께 그냥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하니 처음엔 무척 어색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왠지 친구처럼 사이가 가깝게 느껴졌다.
그 무렵, 우리집에는 갖춰지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소파와 식탁이 필요했는데 새것은 너무 비쌌다. 중고 물건들을 몇 번 둘러봤는데, 맘에 드는 것이 있더라도 배달료가 만만치 않았다. 만날 때마다 뭐 도움 필요한 것이 없냐고 매번 물어봐 주시던 바니. 이런 사정을 말씀드리자, 집에 말을 싣는 트레일러가 있으니 크고 무거운 가구도 옮길 수 있다며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셨다.
어느 날 인터넷 중고 물건 홈페이지에 무료 소파가 올라왔는데 새 것처럼 좋아 보였다. 소파는 중고라도 100불 가까이 주고 사야 하는데 횡재다 싶었다. 무료로 올라오는 물건들은 대부분 반드시 픽업을 스스로 해 가라는 단서가 붙는 경우가 많다. 나는 바니께 도움을 요청드렸더니 흔쾌히 좋다고 하셨다. 커다란 말 트레일러를 바니 남편께서 가지고 와 주신 덕분에 큰 소파를 무사히 실을 수 있었고 집까지 안전하게 옮길 수 있었다. 식탁도 중고 매장에서 배달해 오는 것을 말 트레일러로 도와주셨다.
바니께선 손자가 여럿 있었는데 모두 초등학생 이상으로 똘똘이보다 나이가 많았다. 내게 손자 손녀들이 쓰던 물건들을 줘도 괜찮냐고 물으셔서 당연히 좋다고 대답을 해 드렸다. 이후 만날 때마다 옷, 장난감, 인형들을 몇 번이나 주셨다. 그리고 컵과 그릇도 본인의 집에 너무 많다며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 그릇이 많지 않았던 내게 주방 살림살이도 많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나눠주시고 영어에 대한 용기도 심어 주셨던 바니. 몇 개월 동안 정기적으로 만난 후엔 개인적으로 바쁜 일이 계속 생긴다고 하셔서 만남을 지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가끔 SNS나 문자로 안부를 전해 주시고 계신다.
# 두 번째 바니
첫 번째 바니와의 만남이 중단되고 나서 나는 또 다른 친구를 만나고 싶었다. 여럿이 함께 모이는 모임을 몇 개 알게 되었고 가끔 놀이 모임(Play date)도 하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일대일로 만나서 대화할 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시 조안나에게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미국인 친구를 또 소개해 주실 수 있냐고 요청을 드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답장이 왔다.
두 번째로 만나게 된 친구의 이름도 똑같이 바니였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신기했다. 물론 두 분은 전혀 모르는 사이. 이번 친구는 나보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많으신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비영리 단체에서 일을 하는 분이셨다. 바니를 다시 만나게 된 무렵부터 나는 초등학교의 한국반 수업을 맡게 되었다. 매주 금요일 오전 정기적으로 같이 도서관에서 만나면서 나의 수업 준비에 대해서도 상의를 드리고 필요한 영어 표현도 여쭐 수 있었다.
바니는 동물을 사랑하는 분이다. 때문에 서른 무렵부터 동물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계시고 고기도 안 드시는 채식주의자이시다. 동물보호에 대해서 그간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바니 덕분에 여러 가지 정보도 얻고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도 배울 수 있다. 또한 몬태나에서의 하이킹, 캠핑을 거의 전문가급으로 잘하신다. 백팩킹으로 장기간 캠핑을 다니시고 한 달에 두세 번씩은 옐로스톤이나 글레이셔로 여행을 다니신다.
캠핑 가는 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아무 때나 빌려가라고 하시는 바니. 우리 가족이 몬태나를 떠나기 한 달 전쯤 캠핑장비를 빌려 주신 덕분에 글래이셔 여행도 다녀올 수 있었다. 이사 전에 일찌감치 모든 캠핑 물건들을 처분해 버려서 가고 싶었던 글레이셔 여행을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아시고는 텐트, 침낭, 식기류 등 모든 장비를 빌려주셨다. 글레이셔 국립공원의 하이킹 코스를 자세히 다룬 책자도 빌려 주셔서 많은 참고를 할 수 있었다.
바니와의 만남은 팬데믹 이후에도 온라인 줌 미팅으로 계속 이어가고 있다. 어느덧 2년 넘게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국적도 인종도 나이도 모두 다르고 나의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우리는 잘 통한다. 가끔 정말 놀랍다. 바니를 바니라 계속 부르니 이젠 나이차도 안 느껴진다. 그냥 오랜 친구처럼 매주 금요일 오전이면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주말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언어는 달라도 마음은 통한다는 말, 나이에 상관없이도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두 명의 바니로부터깊은 우정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