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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귀인을 몬태나에서 만났다.

만날수록 감사한 사람. 볼수록 또 보고 싶은 사람.

by Olive

Sometimes miracles are just good people with kind hearts.


해외생활도 처음, 몬태나 처음,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남편과 메일을 주고받은 직장 상사인 미국 교수님, 한국교회로 메일을 보내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던 한인회장님 부부, 그렇게 세 분과의 연락이 전부였다.


몬태나 보즈만은 인구 4만이 조금 넘기 때문에(2020년 기준은 5만), 한국사람도 30~40명 정도에 불과하다. 적은 수의 한국사람이지만 몬태나에서 사는 3년 그리고 반 동안 우리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물론 우리 부부처럼 사십이 넘어 미국으로 온 가족은 없었다. 모두 20~30대에 오셔서 짧게는 10~20년, 길게는 30년 이상 미국에서, 대부분은 몬태나에서 계속 살고 계셨다.


처음 해외생활을 시작하는 여느 한국사람들처럼 우리도 한국을 떠나기 전 우리가 가게 될 보즈만에 한국사람들이 계신지 검색을 해 보았다. 그러나 검색되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몬태나주립대학교에서 대학생활을 했던 교환학생의 후기글 몇 개와 보즈만에서 식당을 운영하시며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계신 이호 사장님에 대한 신문기사가 전부였다.


남편은 누군가에게 한국교회가 그곳에 있다면 교회를 통해 한국사람을 소개받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목사님께 메일을 드렸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보즈만에 살고 계시는 몬태나주 한인회장님의 연락처를 알려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한인회장님과 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전화통화도 할 수 있었다. 한인회장님께서는 밤늦게 도착하는 우리들에게 "첫날은 새로운 집에서 자기도 어려울 테니, 우리집에서 자고 가슈."라고 제안해 주셨다. 안 재워주셨더라면 가구도 없고 바닥에 온돌도 없는 집에서 대책 없이 첫 날밤을 보낼 뻔했다.


# 잘 노는 것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

몬태나에서 한인회장님 부부를 뵙게 된 것은 우리 가족에게 큰 의미가 있다. 두 분이 안 계셨더라면 우리의 몬태나 정착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회장님께서는 우리처럼 대학교 캠퍼스 주택에서 오래 사셨고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오셔서 우리 부부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셨다. 사모님께서도 한국에서 교직생활을 하셨기에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며 용기와 격려를 많이 해 주셨다. 회장님은 대학에서 계시기에 허박사님으로 불렀다. 허박사님께서는 진정한 몬태나 생활을 즐기고 계신다. 캠핑, 낚시, 그리고 캠핑요리에 관해서는 전문가이시다.


허박사님께서는 캠핑장에 우리들을 매번 놀러 오라고 해 주셨다. 덕분에 송어 구이, 가마솥 해물탕, 삼겹살에 묵은지 구이 등 맛있는 음식들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잘 노는 것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죠. 결국 노는 것이 남는 것이여."라고 하신 말씀은 내게 명언처럼 남아 있다. 그간 한국에서는 '놀면 뭐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었다. 사십 년 동안 노는 것보다는 공부하던지, 일하던지 둘 중 하나였던 내 생활에 대한 후회는 없다. 그러나 잘 노는 것, 노는 시간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임을 몬태나에 와서야 허 박사님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전문대학교 교수님으로 일을 하시는 사모님은 박교수님으로 불렀다. 한국에서 교직에 오래 계셨다가 가족과 함께 몬태나로 오셨다. ESOL 영어수업을 들으시면서 영어를 배우던 중, 우연한 기회로 전공을 살려 수학 공부를 도와주는 자원봉사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친구의 소개로 이곳의 전문대학 강사를 뽑는다는 공고를 접하게 되었고 지금은 전문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신다.


처음에 보즈만에 와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김 선생님, 잘 오셨어요. 여기에서 좋은 일 더 많이 생길 거예요."라는 말씀을 항상 해 주셔서 큰 힘을 얻었다. 보즈만에 온 지 얼마 안 되었고 차도 없어서 여러 불편함을 겪고 있을 때 장도 함께 봐주시고 보즈만의 이곳저곳을 똘똘이와 함께 구경도 시켜 주셨다. 도착해서 며칠이 지났을 때 아기 반찬 없어서 힘들지 않냐면서 시애틀에서 사 오신 냉동 어묵을 주신 적이 있었다. 어묵이 그렇게 소중하고 맛있는 반찬인 지 박교수님께서 주신 어묵을 통해 배웠다.


# 다 잘 될 거예요.


몬태나 보즈만에 도착하고 나서 이틀 째 되던 날, 허박사님과 박 교수님께서 우리에게 소개해 주신 분은 이호 사장님이시다. 이호 사장님은 보즈만에 오기 전 신문기사로 뵌 분이었다.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는데, "몬태나 처음 와서 힘들죠? 내가 그 마음 다 알아요." 하시며 커다란 통에 담은 김치와 고추장 한 병을 주셨다. 처음에 와서 김치 재료를 어떻게 사야 할지, 고추장과 된장은 어디서 파는지 등 모르는 것 투성이었을 때 주신 김치와 고추장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이호 사장님께서는 보즈만시의 시의원으로도 활동하고 계신다. 2013년에 당선되신 후 4년 임기가 지나고 2017년 재선에도 성공하셨다. 식당을 운영하시며 어려운 사람을 위해 모금활동, 구호활동도 많이 하신다. 늘 우리 가족에게 "다 잘 될 거예요."라는 말씀을 해 주시는 분. 따뜻한 마음이 더해져서 이호 식당의 음식이 더 맛있는 것이 아닐른지 생각해 본다.


# 몬태나주 유일한 한글학교


몬태나주는 우리나라의 3.8배에 이르는 넓은 크기를 자랑한다. 하지만 인구는 백만에 불과, 경기 용인시 인구에 불과하다. 엄청나게 넓은 지역이지만 한글학교는 딱 한 곳, 보즈만에 있는 몬태나 보즈만 한글학교 밖에 없다. 20여 년 전에 교장선생님이신 노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만드셨다.


몬태나에는 한국사람이 매우 적기 때문에 한글학교만 있을 뿐 학교 건물도, 한글 수업을 전업으로 맡아서 가르치는 선생님은 없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한글학교가 교사로서 새로운 기회였다. 휴직 후 미국에 와서 정체성을 찾고 싶었던 내게 늘 기회를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교장선생님. 한글학교가 있었기에 한글 수업도 시작할 수 있었고 여름에는 한글 캠프도 운영하여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많은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격려와 지원 덕분에 나는 몬태나에서도 선생님의 꿈을 펼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남편분이신 윤 집사님께도 감사한 마음이다. 한국어로는 나이 많은 분께 이름을 못 부르기 때문에 처음 뵐 때 적절한 호칭을 고민해야 한다. 보즈만에 와서 배운 새로운 호칭은 집사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보즈만에서는 많은 한국분들께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문화였다. 윤 집사님께서는 떡을 무척이나 좋아하신다. 매번 떡을 만들 때마다 생각이 났던 분이시도 하다. 윤 집사님께서는 한글학교 학술대회가 시애틀에서 열렸을 때 나와 교장선생님을 태우고 장장 11시간이나 운전해 주셨다.


# 머리를 잘라주신 언니


보즈만에서 가장 그리웠던 한국음식은 다름 아닌 떡. 몬태나에서도 어떻게 하면 떡을 만들어 먹을 수 있을까 연구(!)해 보면서 인절미, 찹쌀떡, 오븐 찰떡 등 많은 떡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쿠킹클래스로까지 이어졌다. 한 번은 떡을 다 같이 만들어 먹기 위해 모인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혜진 언니를 처음 만났다. 혜진 언니는 나보다 열살 이상 많은 분이시만 막냇동생이 나와 동갑이라고 하시면서 언니라고 부르라 하셨다.


이후 혜진 언니께서는 우리 가족을 댁으로 초대해 주셔서 맛있는 식사를 했다. 그 무렵 나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면서 미국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계속 길어지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내 머리 길이. 아들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맘에 안 들고 비싼 가격에 팁까지. 물론 운 없게 실력 없는 미용사를 만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 미용사들은 한국 사람의 머릿결을 잘 못 다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내 머리를 자르러 가는 것이 계속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언니께서는 몬태나에 오래 사셨으니 혹시 아시는 미용실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직접 머리를 잘라주실 수 있다고 하셨다. 알고 보니 언니는 한국에 계셨을 때 서울의 어느 여대 앞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오래 일을 한 경력이 있으셨다. 언니의 미용 솜씨는 진짜 전문가! 가끔씩 머리를 잘라주셔서 몬태나에 사는 3년 반 동안 나는 미용실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또 갈 때마다 팥죽, 고등어구이, 짜장면 등 몬태나에서 먹기 힘든 음식도 종종 해 주셨다. 혜진 언니의 따뜻한 손과 마음이 있어서 나의 보즈만 생활은 더 행복했다.


#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몬태나주립대학교 내에는 밀러 홀이라는 커다란 식당이 있다. 학생 및 교직원 식당이지만 외부인들도 돈을 내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구내식당이다. 이 식당의 크기와 규모는 그동안 경험했던 대학 구내식당과는 달랐다. 각종 코너별로 다양한 음식이 준비되고 디저트에 음료까지 완벽하게 갖춘 대형 패밀리 레스토랑과 닮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는 한국 셰프님이 세 분 계신다. 장 집사님께서는 세 분 중 한 분이시다. 장 집사님께서는 추수감사절에 댁으로 초대를 해 주시고, 가끔 점심을 해 주시기도 하셨다. 화단에 있는 대파도 나눠주시고 똘똘이 간식도 챙겨주신 장 집사님. "뭐 먹고 싶은 거 있음 이야기해."라는 말씀을 자주 해 주셨던 장 집사님. 부모님도, 친척도 안 계시는 낯선 몬태나에서 이 말이 얼마나 감사하게 들렸는지 모른다.


교회를 통해서도 몇몇 한국분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보즈만에서 한 시간 떨어진 빅스카이라는 동네에서 살고 계신 권사님과 장로님도 생각이 안 날 수 없다. 권사님과 장로님께서는 나와 동갑인 따님을 두고 계셔서 그런지 마치 엄마, 아빠처럼 마음을 써 주셨다. "빅스카이에 언제 한번 놀러 와."라고 말씀해 주셔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권사님께서는 된장찌개, 잡채, 불고기 등등 우리 가족을 위해 많은 음식을 준비해 주셨다. 모든 음식이 맛있었지만 특히 권사님의 된장찌개는 나와 남편에게 인생 된장찌개였다.


나 집사님과 마이클 장로님께서도 참 따뜻한 마음을 많이 나누어 주셨다. 나 집사님께서는 집으로 몇 번 오라고 해 주셔서 맛있는 음식도 주시고 집에 있는 커다란 개들과 똘똘이가 함께 놀 수 있도록 시간도 마련해 주셨다. 몬태나를 떠나기 전 초대해 주셔서 맛있는 저녁도 주시고 또 서예를 함께 해 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마이클 집사님께서는 늘 격의 없이 인사하시며 다정다감하게 안부를 물어봐 주시는 분이시다. 때때로 그분의 선하고 환한 미소가 그리워진다.


보즈만에 온 지 이틀째, 이호식당에서 허박사님, 박교수님, 이호 사장님 / 추수감사절 장집사님 댁 / 설날모임 교장선생님 댁
혜진언니께서 머리 잘라주시고 주신 동지팥죽 / 몬태나 스테이크를 사주신 교장선생님과 윤집사님 / 서예시간 나집사님 댁

되돌아보니, 몬태나에서 우리 가족은 '귀인(貴人)'을 만났다. 귀인이란 '사회적 지위가 높고 귀한 사람'을 뜻한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많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서 동시에 귀한 사람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주신 마음이 너무 귀해서 만나면 만날수록 감사한 사람. 볼수록 또 보고 싶은 사람. 바로 우리 가족이 몬태나 보즈만에서 만난 한국분들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한다.



[참고 자료]

http://www.joyseattle.com/news/16407

https://www.voakorea.com/archive/4637031

https://www.ihoskoreangr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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