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니까 로스
우리 가족은 어쩌다 몬태나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남편이 몬태나주립대학교 박사후과정, 영어로는 포스트닥터(포닥) 과정에 선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회사의 포닥 지원과정을 알게 된 후 몇 군데 대학으로 포닥 신청을 했었다. 몇 달 후, 남편은 몬태나주립대학교(MSU)에 계신 로스 교수님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다. 하지만 회사는 결국 포닥 지원과정을 허락하지 않았고 몬태나로 가기 위해서 남편은 사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반대편, 이곳 몬태나까지 가족을 다 데리고 오는 남편의 어깨는 아마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 번뿐인 인생 몬태나에서도 살아보고 싶었다. 아마 로스 교수님이 남편을 뽑아주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족은 한국에 계속 있었을 것이다. 단 한 군데에서 합격 소식을 받았으므로 몬태나까지 우리 가족이 올 수 있었던 것은 로스 교수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 로스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이사를 하고 얼마 안 되어서 남편의 연구실에 아들과 함께 놀러 갔을 때다. 연구실 구경을 하러 아들과 잠시 들른 적이 있었는데 복도에서 교수님을 마주쳤다. "Hi! How are you?" 반갑게 인사를 해 주시면서 활짝 웃으셨다. 갑자기 이름이 헷갈려서 말을 꺼냈다.
Your name is Ro...?
Right. 로스. Just call me 로스!
미국에서도 지역에 따라 Sir, Ma'am, Doctor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문화가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몬태나의 많은 사람들은 그저 이름을 부르며 대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교수님이나 나이 많으신 분의 이름만을 그냥 부르는 게 무척 어색하고 '이래도 되나?' 반문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호칭 없이 이름으로 대화하는 것이 점점 편해지기 시작했고 또 평등한 관계를 느끼게 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호칭이 주는 무게가 상당하다. 나이에 따라, 직업이나 직급에 따라 엄격하게 호칭을 나누는 문화 때문에 이름만은 절대 부를 수 없다. 선생님, 사장님, 교수님 등 이름 대신 적절한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장, 교감, 보직교사, 교사 모두 선생님이지만 교장선생님은 '교장'을 붙여서, 교감 선생님은 '교감'을 붙여서 호칭해야 하고 보직교사도 '부장님'으로 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호칭 문화 속에서 사십 년을 살다가 몬태나로 오니 많은 것들이 달랐다.
로스 교수님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본인의 집으로 랩실 연구원, 지도 학생들, 그리고 가족들까지 초대를 했다. 본인께서는 주메뉴인 고기와 빵, 소스, 음료수 등을 모두 준비하셨다. 교수님의 취미는 사냥. 대접한 고기 종류는 모두 사냥해서 얻은 엘크 고기, 엔탈롭(사슴과 비슷한 동물) 고기였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샐러드나 디저트 등 간단하게 준비하던지 그냥 오던지 선택사항이라고 하셨다. 나는 한국의 음식을 맛 보여 드리고 싶은 생각에 약밥을 만들어서 은박 용기에 한 덩어리씩 먹기 좋게 싸갔다. 설탕을 한 스푼 더 넣은 효과(?) 덕분인지 다행히 다들 처음 먹어보는 약밥의 인기는 좋았다.
여름에 교수님이 몇 달간 집을 비울 땐 집 마당에 있는 라즈베리, 딸기, 콩 등을 아무 때나 수확해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몇 번이나 똘똘이와 함께 수확을 해 와서 맛있게 먹곤 했다. 이렇게 저렇게 교수님을 몇 번 뵙고 초대도 받고 나니 나도 우리집으로 초대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작은 우리집이지만 교수님 한 분 정도는 충분히 초대를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한국음식을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
몬태나로 오고 나서 두 번째 맞는 여름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로스 교수님을 집으로 초대했다. 내가 준비한 한국음식은 불고기, 잡채. 그리고 여름이니까 오이냉국을 만들어 대접했다. 물론 포크 대신 젓가락을 드리며 한국 음식이니 먹는 방법도 한국식이면 좋겠다고 하니 "Absolutely!" 대답을 하셨다. 미끌거리는 잡채도 젓가락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열심히 시도하시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대학에서 오래 일을 하셨고 몬태나에 사신 지도 십여 년이 훨씬 지났다고 말씀하시는 교수님.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본인의 여동생이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여동생 분은 어릴 적 로스 교수님네 가족으로 입양이 되었단다. 여동생은 아주 어릴 적 입양되었기에 한국에 대한 기억도 없고 한국말도 전혀 못하지만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많다고 하셨다. 가족 중에 한국사람이 있다고 하시니 왠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영화 기생충이 유행을 할 때 로스 교수님이 남편한테 짜파구리를 먹어 봤냐며 맛있어 보였다는 말을 하셨다고 했다. 그때 나는 짜파구리를 해 먹기 위해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온라인으로 몇 개 구매해 놓은 상태였다. 남편한테 교수님께 두 봉지씩 갖다 드리면 좋겠다고 하면서 봉지에 넣어서 드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수님은 그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아까워서 못 먹고 여동생이 왔을 때 주었다고 하셨단다.
로스 교수님은 대학에서 개최된 학회 마지막 날 식사를 하는 시간에도 가족 모두 오라고 해 주셔서 똘똘이와 함께 같이 가서 뵐 수 있었다. 졸업을 하거나 연구실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송별회를 열어 주시며 샌드위치, 음료수, 과자, 아이스크림까지 모두 본인이 직접 준비해 주셨다.
로스니까 부를 때도 당연히 로스라고 했던 분.
늘 소탈하시고, 또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로스.
남편의 직장 상사였지만 나도 로스 교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