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talk is the biggest talk we do. -Susan RoAne-
몬태나에 오면서부터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물론 한국분들이 이곳에도 계셨기에 그분들과는 한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나 몬태나까지 와서 영어를 전혀 안 하고 살 순 없었다. 그동안 영어를 아주 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 한국-호주 교사 교류 프로그램으로 호주에서 2주간 지내며 호주 초등학교에서 한국에 대한 수업을 진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 나이 20대 후반. 패기 넘치는 나이였던 지라 열심히 수업 준비를 했다. 준비로 다져진 영어는 수업 시간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 항상 익숙한 초등학교 수업이었기에 재미있는 사진, 동영상만 보여줘도 까르르 웃었다. 아이들이 천진난만한 것은 한국이나 호주나 똑같았다. 아이들 앞에서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고 영어도 금방 늘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몬태나로 온 지금, 나는 어느새 불혹이 넘었고, 영어에 대한 자신감은 나이에 정확히 반비례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부부 모두 사십이 넘어 한국에서 직장생활 잘하다가 승진과 연봉을 뒤로하고 미국까지 온 사람들은 없었다. 미국 대도시지역도 아니고 몬태나까지, 여행도 아니고 아예 이사를 온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이곳에 사시는 한국분들은 대부분 젊었을 때 미국으로 오셨고 젊은 나이였음에도 영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셨다.
미국 사람들이 스몰 토크, 즉 가벼운 대화나 잡담을 참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미국 오기 전부터 들었다. 몬태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몬태나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스몰 토크를 더 많이 좋아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Hi, how are you?”를 건네고, 조금 더 대화할 시간이 있다면 이름, 몬태나 사람인지, 여기에 왜 왔는지 등등을 금세 묻기도 했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에는 모두가 바쁜 도시 생활을 했기에 인사를 자주 주고받는 문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몬태나로 이사를 온 뒤부터는 달라져야 했다. 스스럼없이 스몰 토크를 건네는 몬태나 사람들이 내게는 참 어색할 뿐이었다.
몬태나로 이사를 와서 처음 만난 외국인은 옆집에 사는 태국인 ‘툰’이었다. 이사 온 지 이틀 째 처음 만났다. 집 앞에서 만난 툰은 내게 “How are you?”라고 물었다.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굿? 솔직히 굿은 아닌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살짝 고민하는 동안 아주 어색한 2~3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곤 툰의 집에서 아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See you.”하며 사라졌다. 이웃과 나눈 나의 첫 스몰 토크는 토크 없는 스몰 토크였다.
몇 번 인사를 하는 상황을 겪고 나니 누군가 “How are you?” 인사를 할 땐 아주 특별한 일이 없고,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그냥 “Good.”이라고 대답을 하고 다시 “How are you?” 또는 “How about you?”라고 되묻는 것이 제일 안전한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말로 누군가 “안녕하세요?”하면 “네, 안녕하세요?”하고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Nice to meet you!”라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터. 지난번에 만났던 미국인 친구를 또 만났을 때 “Nice to meet you.”라고 하니 그 친구는 ‘meet’ 대신 ‘see’을 써서 “Good to see you.”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미국인 친구가 알려주길, ‘Nice to meet you.’는 처음에 만났을 때만 쓴다는 것이었다. 이거 뭐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다는 것이었다.
식당에서 종업원이 뭐가 더 필요한지를 권할 때 “I’m good.”하면 더 필요한 것이 없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통한다는 것도 미국 와서 배울 수 있었다. 그저 “No, thank you.”라는 말이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했는데, 캐주얼한 대화를 좋아하는 몬태나에서는 “I'm good”을 더 많이 쓰고 있었다. 누군가와 인사할 때, 또 만났을 때, 사양할 때 제일 쉽고 만만한 단어, ‘Good’만 잘 써도 어색한 분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
“How was your weekend?”라고 묻는 말에 ‘가족들과 외식했다고 말해야지!’라고 생각을 하고서는 “I went outside to eat with my family”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말을 하고도 약간 이상했지만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미국인 친구. 조금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outside가 아닌 out을 써야 했다.
똘똘이가 유치원에 가고 나서부터는 스몰 토크의 시간이 매일 찾아왔다. 오후에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 픽업을 기다리는 10~20분의 시간 동안 많은 학부모들을 만날 수 있었고 스몰 토크를 항상 피할 수만은 없었다. 어느 날은 영어 선생님한테서 배운 표현인 'under the weather'를 한번 쓰고 싶었다. 몸이 좀 아프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 ‘a little sick'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쓰인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정작 이 표현을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I am under the umbrella."
'아싸, 드디어 새로운 표현 썼다.'라고 생각하며 뿌듯해하려는 찰나, 듣고 있던 미국인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하길래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I have a cold." 그제야 푸하하~ 웃으며 "Ah, you are under the weather!" 날씨와 우산, 어느 정도의 상관은 있다만 둘이 서로 헷갈릴 것도 아닌데 왜 그리도 안 외워지던지. 우산으로 말을 하고 한바탕 웃은 후에야 그토록 안 외워지던 새로운 표현이 외워졌다. 입 밖으로 한 실수는 오래 기억이 남는 법. 그렇게 나는 하나씩 하나씩 영어를 다시 배워 나갔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미국 생활 반년쯤 지나고 나니 가벼운 인사, 안부 정도는 영어로 주고받는 것이 더 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다. 스몰 토크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아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꼭 필요했다. 그러면서 나만의 스몰 토크 전략도 생기기 시작했다.
1. 일단 Hi! How are you?로 시작. 조금 오랜만에 봤다 싶으면 How have you been? 이에 대한 대답은 그냥 Good이면 충분. 조금 더 길게 하고 싶다면 So far, so good. Pretty good. 등등
2. 더 대화할 틈이 보인다면 날씨 이야기. It's so nice weather. It’s gorgeous outside. It's chilly (cold). It's hot. 등등
3. 조금 길게 대화가 이어진다 싶으면 love, like 전략으로 맘에 드는 걸 찾아 칭찬. I love your T-shirt. I like your scarf. I love your glasses 등등
4. 외국인이다 싶으면 Where are you from? 동네에서 본 사람 같으면 Are you from around here? 외국 경험이 있다고 한다면 Have you been to Korea? Have you been to any countries in Asia?
5. 요즘 생활을 묻고 싶으면 How로 시작. How was your day? How was your weekend? How was your vacation? How’s your family? 등등
미국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스몰 토크가 조금씩 편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스몰 토크는 절대 스몰하지 않다. 내겐 빅이다. 아마 영원히 스몰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어로 사십 년을 살아온 나는 영어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계속 스몰 토크를 시도해 보려고 한다. 좋은 만남, 좋은 친구, 좋은 인연은 대부분 스몰 토크에서 시작되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