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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백 Nov 02. 2022

그늘흔

소포를 열자

여름이 들어 있었다      


그림자는 먼저 움직이지 않는 자

어떤 그림자는 생각해선 안 될 것을 생각하다가 다치곤 한다  

노랑에 맞서는 여우팥처럼       


털을 생각하다니

여름은 계절이 아니라 짐승이 아닐까       


여름을 꺼내자 그림자만 남았다      


그림자가 생각을 갖게 되거든 

그림자에 못을 박아 두어야지    


팔월의 그늘에 들어선 그림자는 더 두꺼워졌을까

녹아 버렸을까       


그림자 없는 소년과 그림자뿐인 소녀가 서로를 발굴했다 

한 겹씩 벗겨 낼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유물처럼 과거에 관해서만 말했다 

그해,      


두 입술은 아주 더디게 지워졌고 

쌍니은처럼 닮아 갔다      


똑같은 꼬리를 나누어 가진 우리는 

바닥에 너무 오래 있어서 나는 법을 잊어버린 펭귄처럼 뒤뚱거렸다 

서로에게 앞자리를 양보하듯 무릎을 꿇고서           


상처는 아무는 게 아니라 노을처럼 저무는 거라고 바람이 말했던가 

전생의 깊이를 재던 유목의 수호신이 말했던가     

얘들아, 더 가난해져야지 

경계마저 버리고 자유로워져야지  

지층 깊숙이 울음을 파묻던 쌍니은은 그제야 

그림자에서 그늘로 넘어갔다      


꼬리에게 물려 본 사람은 안다

여름에서 하나씩 버리면 

어른이 되지          


그늘은 빛을 죽이는 꿈을 꾸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 창조주를 

기다림이 어두울수록 끄트머리가 헐거워지는 그늘의 실패      


그날, 

절반의 피조물 

더 진해진 여름이 멸망하고 있었다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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