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자리, 그 공간에 담긴 나와 우리의 이야기
아늑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신 친정아빠
‘보금자리’라는 아늑하고 따뜻한 단어를 떠올리면 우리 친정아빠가 가장 생각이 난다.
친정아빠는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어릴 때부터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지하 단칸방에서 생활하셨다고 했다.
아빠는 내성적이고, 무뚝뚝하신 편이며, 평소에 말수가 지극히 적으신 편이라 술이 한 잔 되시면 숨겨두었던 마음속 이야기를 한 번씩 꺼내시곤 한다. 최근에 알았던 가슴 아팠던 이야기가 있다.
“아빠가 어렸을 때 지하 단칸방에 살았는데 낮에는 물론, 밤에 잠을 잘 때면 특히 빈대가 튀어 올라서 모기장을 사계절 내내 치고 자야만 했어. 너무 가난해서 컵라면도 우리 삼 남매에게 귀했는데, 그 컵라면은 일하고 돌아오신 아버지가 거의 드셨고, 형과 누나와 나는 먹지 보지도 못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야말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친정아빠는 처절한 빈대와의 생활환경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기숙사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일찍부터 독립을 해오신 셈이다.
감히 그 세월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학업에 매진하고, 수도공고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꿈에도 그리던 공기업에 입사하셨다.
친정엄마와는 중학교 동창이셨는데, 고등학교는 각자의 학교로 가게 되면서 일명 ‘러브레터’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셨다고 한다.
친정아빠는 정확히 20살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 원래 충청도가 고향이신 아빠는 고향과 멀리 떨어진 장안읍 길천리(그 당시에는 양산)라는 낯선 곳에서 적응해야만 하셨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드셨을지, 그래도 친정 엄마가 다행히 부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계셔서 옆에서 큰 힘이 되셨다고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결혼을 결심하게 되셨고, 친정 부모님은 23살이란 어린 나이에 나를 낳으시고 부모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앨범 속 사진들을 보자면, 30대인 지금의 내 모습보다 훨씬 앳된 20대의 친정아빠가 한 살배기 나를 포대기로 업고 있었고, 엄마는 아빠 옆에서 환하게 웃고 계셨다.
내가 결혼 전에 그 사진을 봤을 때는 ‘엄마, 아빠가 정말 젊으셨구나.’ 말고는 여타 다른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내가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이 되어보니 갑자기 20대의 친정부모님의 앳된 모습의 사진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며 울컥하는 감정에 눈물을 훔쳤다.
친정아빠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신 탓인지 주변 사람들도 혀를 내두르는 구두쇠이시다.
한 달 용돈으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만 원으로 생활하실 정도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연수원에서 신입 직원들을 대상으로 원자력 관련 교육을 강의하셨을 때, 강의료로 현금을 5만 원씩 받으셨다고 한다. 그 강의료를 봉투에 차곡차곡 모아 친정엄마 생신 때 50만 원을 건네셨다. 엄마는 그런 아빠의 검소한 모습에 감동하셨다고 했다.
내가 어릴 적 우리 부모님은 작은 주택가에서 신혼살이을 먼저 시작하셨다. 친정 엄마께서 신혼 초를 회상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소꿉장난 하듯이 작은 것부터 하나씩 늘어가는 살림살이의 재미를 느끼셨다고 했다. 그 이후, 사택이 완공되면서 우리는 드디어 아파트라는 곳에서 편하고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아늑한 보금자리는 친정아빠의 성실함과 책임감이 낳은 결과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행복한 시절을 추억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남매가 아무런 걱정과 고민 없이 순수하게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버지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지금의 보금자리로 거처를 옮겨 오셨다. 이 보금자리도 82년도에 입사하셔서 월급쟁이로 꼬박꼬박 자금을 모으신 결과 이뤄내신 것이었다.
지금도 한 번씩 친정아빠가 말씀하신다.
“나는 이 정도만 사는 것도 너무 감사하다”라고.
부모의 도움은 일절 없이 자수성가해서 순전히 아빠의 힘으로 내 집 장만을 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어릴 때 엄마도 보험 일을 힘들게 하시면서 가정 경제에 이바지하셨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하고 풍요롭게 생활하고, 하고 싶은 것을 여유롭게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아빠의 덕이 매우 크다.
1982년도에 입사 후 한 직장에서 올해로 무려 41년 차가 되셨고, 이제 곧 정년을 앞두고 계신 연세가 되셨다.
20살 때부터 3교대를 해오신 점을 비추어 봤을 때, 그 한결같은 세월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진급을 앞둔 시점에는 방에서 온종일 시험을 준비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저렇게 뭐든지 열심히 해야 되는구나.’를 은연중에 항상 느꼈던 것 같다.
아빠는 분명 당신이 겪었던, 지독히 견디기 힘들었던 가난을 적어도 우리 가족들에게는 대물림하기 싫으셨을 것이다.
그랬기에 어린 나이에 스스로 확립하셨을 자립심,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직장에서의 성실함을 무기로 한 길만 걸어오신 당신의 인생. 이제 정년까지는 2년여 남짓 남으셨다. 조금만 더 힘내시고, 오랫동안 한 길만 걸어오신 만큼, 이제 정년퇴직을 하시면 부디 마음의 여유를 갖고 푹 쉬시며,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상을 마음껏 누리셨으면 좋겠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도 분명 훌륭하신 삶을 살아오셨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아빠라는 존재가 있음에 내가 존재함을 느끼고, 시간이 흐를수록 존경심과 안쓰러운 마음도 더 진해진다.
“아빠, 우리가 그동안 아빠 덕분에 아늑하고 편안한 보금자리에서 잘 살 수 있었어요! 앞으로 더 잘할게요. 사랑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라고 문득 이 말들을 그대로 친정아빠께 전하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