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가장 제일은 무엇일까
천국의 비밀을 알아가는 것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많이 불렀던 찬양곡이다.
무턱대고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난 사랑의 의미조차도 잘 몰랐던 시절이라 그냥 사랑이 제일인줄 알고 살았다.
요란한 장마가 어둠을 몰고 와 많은 비를 내리고 있다. 곳곳에 폭우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어 각자 주의하라는 재난 알림 문자가 계속 답지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인가를 자신의 최고 가치로 정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변함없이 제일은 돈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은 빽이고, 돈도 빽도 없다면 운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존재감 없이 살아왔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에서 자기에게 가장 우선이 되는 제일의 가치를 따로 정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살아가면서 충족되지 못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제일로 치는 가치를 자주 변경하게 된다.
나는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문명의 혜택이 거의 미미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전교생이 30명도 안 되는 작은 분교였다. 씨족 마을이라 모두가 사촌, 육촌, 인척관계였으며 모두가 형제처럼 지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때 내게 가장 제일인 것은 사랑받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매일 고된 농사일로 우리들을 살뜰하게 보살 필 여력이 없었다. 나는 극히 내성적이라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지도 못하고 존재감 없는 착한 소년이었다. 해가 지나가면 소고삐를 옮겨 매는 일과 몇몇 아이들과 들로 산으로 가서 열매를 따먹거나 다른 먹을 것을 찾아다니기도 했던 시절에는 마음껏 먹는 것이 제일이었다. 일 년 내내 보리밥만 먹다가 할아버지 제사나 동네잔치 때나 모내기를 할 때는 흰쌀밥에 두부가 둥둥 뜬 돼지고기 국물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제일의 행복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도회지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중학교 진학을 꿈도 못 꾸는 친구들이 있었고 중학교를 가게 된 것은 최고의 기쁨이기도 했다. 나는 도회지로 유학을 가게 된 몇 안 되는 행운아였다.
빠듯한 섬 살림에 중학교에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13살 어린 나이에 자취방을 얻어 석유곤로에 밥을 지어 손수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녀야 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시내버스요금이 십원이었던 것 같다. 가난했어도 가난이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내게는 학교생활이 제일의 것이 되었다.
처음으로 검정 교복에 흰색 프라스틱 카라를 끼고 가방을 들고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70여 명 정도 되는 한 반의 아이들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다가 만났지만 아이들이라 금세 친하게 되고 친구가 되었다.
내 생애 처음 자취생활이란 것을 해 보면서 오류투성이인 생활정도는 나중에 미소로 추억되기도 했다. 곤로불을 잘못 조절하여 밥을 태웠던 일이며 밥 하다가 곤로 기름이 떨어져 밥이 설익은 일이며 주로 먹는 반찬은 노란 단무지와 멸치 볶음이 주루였다. 유달산 산비탈 허름한 자취방에는 그래도 꿈이 있었고 소소한 행복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도 몰랐고 하루하루 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당시에는 만화가 크게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교과서 보다도 만화방에서 빌려오는 만화가 더 재미있는 읽을거리였다. 학교가 파하면 학교 앞 전파가게에서는 “마루치, 아라치, 태권동자 마루치”노래가 들렸었다.
나의 학창 시절은 가난이 불편한 줄 몰랐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 다른 아이들도 나와 친하게 지내려 하고 맛있는 도시락 반찬을 싸 오면 나와 나눠먹곤 했었다.
나의 이런 생활과 달리 우리 부모님은 생활고를 벗기 위해 섬에서 김농사를 짓고 염전일을 하며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수고한 대가에 비해 손에 쥐어지는 소득은 미미했기에 부모님은 섬을 떠나 군산 옥구라는 곳으로 이주를 하고 조개 잡는 일을 하시게 되었다. 이때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제일의 소망이었다.
목포에 남겨진 나는 외삼촌집에서 학교를 다녔고 결국 고등학교는 군산으로 오게 되었다. 우리 친구들 중에 고등학교로 진학 한 사람은 겨우 세 명 정도였다. 이때는 나의 가장 제일의 가치는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형편에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아마도 같은 동년배들 중 나보다 못한 이들도 많았었다는 생각은 한참 나중에 하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 친구들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된 채 생소한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 버스로 한 시간쯤 걸려 도착하는 학교생활은 큰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었다. 내 보디가드가 되어준 친구 있었고 마음에 두고 있는 여학생도 매일 만날 수 있어서 학교 가는 길이 즐겁기만 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감성적이었나 본다. 학교에서 시를 주로 썼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고 지냈다. 한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의 존재감을 특별했고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글씨를 잘 쓰고 행정업무를 많이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 수로 내 마음을 파고드는 부끄러움은 가난이라는 것이었다. 전에는 몰랐던 가난이 점점 불편하고 부끄럽게까지 느껴지곤 했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부모님의 경제 사정은 점점 나에게도 영향을 미쳐 왔다.
좋아하는 이성이 생기게 되고 늘 마음에 두고 있는 친구가 생기고 보니 돈이란 것이 필요하구나 생각이 들었다. 잘 보이고 싶고 그 친구랑 빵집에도 가고 싶었다. 기억하기로는 그때 시외버스비가 편도 45원이었다. 엄마가 매일 아침에 쥐어주는 100원짜리 동전 하나로 학교에 다녔다. 왕복 90원이니 하루에 남은 돈은 십원이었다. 그것을 아홉 번 모으면 하루 버스비가 되었다.
나는 달리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기에 삼 년 동안 그 여학생의 가방을 받아주는 일이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매일 아침 나는 종점에서 타고 그 여학생은 중간에 버스에 오르기에 무거운 고3의 가방을 내 무릎에 받아주는 것이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한 번쯤이라도 좌석을 양보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 여학생은 3년 동안이나 내 옆에 서서 학교에 다녔다.
그때만 해도 무엇이 내게 가장 절실하게 제일이 되는지 몰랐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우리 부모님의 경제 사정이 제일 안 좋았던 시기로 기억된다. 이때 내 바로 밑에 여동생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장티푸스라는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만 해도 충분히 나을 수 있는 병이었는데 가난과 무지함에서 사랑하는 형제를 또 하나 보내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나는 학교생활에 모범이 되었고 작문에 남다른 소질을 보이며 전라북도 고교생 백일장대회에서 장원상을 받기도 했다. 신문에 소개가 되니 우리 아버지께서 신문을 스크랩해서 보관하시며 가장 흐뭇해하셨던 기억이 있다.
대학 진학을 당분간 보류하고 나는 취업전선에 뛰어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때부터 돈이 제일의 가치란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벌어 가난한 집안에 도움을 드리고 대학교 입학금을 벌어 보려는 계획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돈이 사람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가치를 알게 되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생각 할 겨를 도 없이 수도권에 진출하여 돈을 벌었다.
하지만 생각하는 대로 돈은 쉽게 모아지지 않았다. 한 달 월급을 타면 한 달 살기에 빠듯했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대학에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에 가게 되었고 그때 생활은 그야말로 최악의 시련으로 견뎌야 했다.
사람이 사회에 진출하여 당당한 개체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많을수록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도 터득하게 되었다. 맨땅에서 부를 일궈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의 소중했던 20대, 영원히 잊힐 수 없는 고난의 흔적들이 가끔은 눈물이 글썽이게 한다. 막노동을 하면서도 나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부를 일궈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에게도 돕는 이 가 생겼고 그 도움을 받아 경제적인 문제를 조금씩 해소할 수 있었다. 운이 따라 주었고 주변에서 나를 돕는 멘토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나는 사업을 시작했고 어려움 없이 고난을 벗아 날 수 있었다. 20대 후반에 큰 식당을 빌려 아버지 회갑잔치를 정성껏 해드렸고 살림살이는 안정단계에 이를 수 있었다. 살다 보니 나에게도 백이 생겼고 운도 따랐으니 내가 제일로 생각했던 돈도 어느 정도 모아지게 되었다.
나이가 들고 아이들을 다 출가시키고 부부만 남게 되었으니 가끔씩 손주들 보는 재미가 제일이 되었다. 간간히 이곳저곳 아프다는 아내와 나는 요즘 건강이 제일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많이 아프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장서지만 사람은 생물학적 나이에 반응하게 되니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이 땅 위에 살면서 가장 제일로 여기는 부와 명예와 권세를 지양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의 제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늦은 감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부를 축적하고 명예와 영광을 두르고 산다 할지라도 그 나중은 허망한 것들을 쫒음이란 걸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절반을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만큼 생명은 소중한 제일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왔다가 죽게 된다는 진리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길어야 백 년도 못살면서 영원히 살 것처럼 바벨탑을 쌓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없어질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다 이루었다 할 쯤에 무너져 버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최종에 가서는 영원한 생명을 제일로 여기게 된다. 과연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방법을 찾고 있다.
교회에서는 예수를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윤회라고도 하고 해탈을 통해 이르게 되는 열반이라고 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아픈 것은 축복이요, 많이 아픈 것은 슬픔이니 지금 내게 가장 제일은 아프지 않은 건강이요 영생이라고 감히 이야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