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재 이진주 Aug 08. 2024

고통을 당하며 감사를 배운다

견디지 못할 고통은 없다

한바탕 비가 사납게 내리더니 물줄기가 콩밭 고랑을 따라 옥수수밭을 지나 도랑으로 밀려든다. 동네 앞에 길가로 줄이어 피어있는 무궁화 꽃이 오늘따라 밝고 환하게 마을을 비추고 있다. 산허리에 물안개가 깔리며 여름날 장마는 비를 동반한 심술만 부리고 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변화와 알 수 없는 신비한 광경을 찰나처럼 잠깐 보이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초록빛 산야에는 다양한 색으로 꽃을 피우고 무질서한 듯 하지만 대칭과 비대칭의 예술적 감각을 보여 주기도 한다.

모든 사물은 자기만의 색깔과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내면의 고통을 이겨 낸다고 한다.

세상은 수많은 빛깔을 만들어 내고 고통이 성숙함으로 승화하며 움직이고 있음을 선인들의 가르침에서 배우게 된다.

이처럼 세상을 큰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과학의 이론에서 힘의 균형과 조화로운 위치의 선정일 것이다.

나는 오늘 내가 겪게 되는 “고통”이라는 단어를 말해보려고 한다.

“고통”의 사전적 의미는 “몸이나 마음의 아픔이나 괴로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이라고 선 듯 대답할 수 있을 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류의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우리는 태어나는 과정에서 산모의 고통을 동반하고 가족과의 이별에서 고통을 느끼게 되며 사랑하다 헤어짐도 고통으로 다가온다. 걸어가다가 넘어져도 고통이 따르고 살아가면서 뒤처지고 존재감이 없어질 때도 고통은 찾아온다. 수많은 사건사고를 비켜가지 못할 때도 깊은 병이 들어 길고 긴 병고를 겪을 수도 있다. 고통은 시시때때로 아픔을 동반한 고통으로 다가와 나를 힘들게 하는 아픔이고 시련일 것이다. 그 고통은 순전히 자기 입장에서 표현하는 극히 주관적인 개념일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고통의 한계치에 이르면 생을 포기하기도 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기도 한다. 고통은 당한 사람의 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 있다. 참고 이겨내라는 위로의 말은 쉬워도 실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죽을 만큼이나 힘이 든다는 것이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고통은 철저히 개인이 감당할 몫이 된다. 살다 보면 겪게 되는 고통은 대체로 견딜 수 없을 만큼 크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은 왜 우리의 곁에서 맴돌고 있는 것일까? 신은 우리 인간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주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은 고통 없이는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없는 창조적 이유를 안고 있다. 어쩌면 삶이 고통을 이겨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은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정된 고통이었다고 하지만 그를 인격적으로 만난다면 그 고통의 천만분의 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죄가 없으면서 오롯이 군중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 관리 빌라도의 민중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고통의 부당함을 알게 한다.

십자가는 그 자체가 고통이고 아픔이었다. 자기의 고난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자기가 매달릴 골고다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도 고통이겠지만 두 손과 두발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 고통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모자라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을 다 쏟아지게 했다. 어쩌면 너무나도 잔인한 살해 현장이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고통을 당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셨을까?. 인간이 겪어야 하는 최고의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죽음보다 더 값진 부활이라는 영생을 보여주신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에 오르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성경에서 보게 되었다. 그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셨으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인간의 육신을 입었기에 그 큰 고통을 예감하고 결국 성경 말씀을 이루고자 순응했던 것이다. 신의 아들이었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인데 그 고통을 겪는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중에 “다 이루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하신 것은 고통을 이기셨다는 메시지였다. 

내가 만일 예수님이었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참담하고 비참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이미 스스로 감당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은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고통일 것이다.     

어쩌면 고통은 우리의 삶에서 감사로 이어지게 하는 묘한 성질이 있기도 하다.

크고 작은 고통을 극복하게 되면 반드시 그보다 더 큰 보상을 해주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이는 내게 더 좋은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인생의 법칙이라 믿게 된다. 내가 감당한 고통으로 상대가 평화롭고 유익이 된다면 나의 고통은 감사의 조건일 수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는 고통이 찾아오고 그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다면 결코 더 나은 아름다운 인생길에 나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했으니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상의 모든 만물은 고통이 없이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행복과 성공을 쟁취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 조상들의 역사에도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꿋꿋이 살아낸 위인들이 많이 있음을 배우지 않았던가.

인생의 열차는 언제나 푸른 초원만을 달릴 수 없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하고 좁고 굽어진 길 위를 유연하게 달려야 하기도 한다. 맑은 햇살이 비쳐오는 평화로움과 비바람 몰아치는 구간에서도 멈추지 않고 달려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흰 구름 뭉게뭉게 피어나는 드넓은 평야의 초원 위를 신나게 달리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진주를 만드는 조개를 생각해 본다. 조개는 부드러운 살갗에 상처를 내는 모래알을 뱉어내지 못하면 그 쓰라린 고통을 감당하게 된다. 상처가 생기고 염증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점액질을 내어 감싸고 또 감싸기를 수만 번이라도 반복하여 아픔을 이겨 낸다. 결국에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결정체인 보석 진주를 만들어 낸다. 진주는 고통과 분투가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진주를 천사의 눈물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서도 내가 받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 내야만 보석같이 빛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은 참음이 먼저다. 참을 수 있다면 견디는 것이다. 견디다 보면 반드시 큰 보람으로 채워질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작고 큰 고통이 있을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고통은 성장통일 수 있다. 고통은 함께 나눌 수 없으니 위로는 작은 희망을 갖게 해주는 조언일 뿐이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을 만큼만의 고통을 허락하셨다고 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욥은 본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신실하고 덕을 세우며 건실하게 살아가는 의인이었다고 소개한다.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고난은 우리들의 심정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그것이었다. 자식을 잃는 고통, 모든 재물을 잃게 된 고통, 온몸이 종기로 상하게 되어 재를 뒤집어쓰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고통, 가장 가깝게 지내던 세 친구로부터 비난을 받는 고통, 차라리 자기 목숨을 거둬가라고 할 정도로 극한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욥이 반드시 그런 고통을 견뎌내리라 믿었기에 그 목숨은 건들지 말라고 했다. 욥은 고통을 이겨내고 전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채워주신 신에게 감사를 드리게 된다.

여기에서 나는 생각해 본다. “꼭 고통이 따라야 성공이 있는 것일까?” “고통 없이도 잘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에게 고통이 주어진다는 것은 고통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뒤에는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게 된 십자가의 고통은 죄의 징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무겁고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라도 결국 내가 지고 가야 하는 것이기에 힘이 드는 것이다. 사람들이 각자 지고 가는 십자가의 무게는 그 크기가 크든 작든 같은 무게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고통을 운명이나 숙명으로 생각한다면 기꺼이 지고 인간승리의 복을 누려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힘들어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내가 원하지 않는 무게로 지워진 고난도 나를 살리기 위함임을 알고 지치거나 좌절하지 않기를 위해 감사로 기도하게 된다.

모든 고통은 견딜만하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고 고난 뒤에 나를 살게 하는 묘약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전 12화 누와 정을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