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며 무기력했던 시절

극한에서 배우는 지혜

by 남재 이진주

햇살은 뜨겁게 지면을 달구고 바닷물 위에 실려 오는 바람에 우리 소금밭에는 하얀 소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제비들은 비행항로도 없이 자유롭게 날고 염전 소금밭 위로 고추잠자리가 드론비행을 하고 있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함도 개념치 않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수차에 올라 한발 한발 디뎌 오르며 염전에 물을 퍼올리기 시작하면 금세 온몸에 땀으로 젖게 된다. 수차는 바닷물에 절여져 무겁기는 더해지고 있다. 먼 하늘에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나는 목적 없는 일상에 지쳐가고 있었다. 햇살에 검게 익어가는 촌놈 얼굴은 지친 듯 삐딱하게 서있는 허수아비처럼 관심밖에 서 있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해풍에 땀을 식히며 단단해진 장딴지는 더 많은 일에 사용되고 있었다. 늘 시원찮은 먹거리는 쌀 한 톨 없는 보리밥에 풋고추 하나면 되었다. 막된장 찍어서 밥 한 끼 허기를 때우던 서글픈 시절의 기억들이 생생하기만 하다. 메주를 시렁에 매여 놓은 쿰쿰한 내 방에 가끔 창틈으로 쥐가 들어올 때도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무슨 생각으로 머나먼 섬마을로 떠나와 홀로 고난과 역경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소망 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나는 20대 시작이 의미 없는 곳에다 버려지고 있었다. 단 한 발자국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었던 나의 무기력함은 존재감마저 염전 도랑에 던져져 암담한 시간 속에 버려져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님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반갑고 기뻤다. 그날도 코뚜레 맨 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수차에 올라 염전 맨 위칸에 바닷물을 실어 놓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몸은 쇳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바닷물은 염도가 5~7도 정도 된다. 바닷물을 퍼 올려서 염전에서 한동안 증발을 시킨다. 염도가 조금씩 올라가면 다음 칸으로 옮겨서 증발을 시킨다. 소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소금이 결정되는 염도에 이르기까지 계속 증발시켜 한 칸씩 내려가게 된다. 곧 소금이 햇볕과 바람에 결정되기 때문에 염도가 올라간 소금물은 염부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혹여라도 비가 오면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염전으로 달리게 된다. 빗물이 소금밭에 떨어지면 염도가 떨어져 소금물을 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비에 젖어보는 것도 참 재미가 있었다. 물이 귀한 섬에서는 소나기에 샤워하는 상쾌한 기분은 활력을 얻게 해 주었다. 염전일은 언제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비가 내리면 염파의 물꼬를 터서 저장고에 몰아넣어야 한다.

소금이 결정을 맺는 소금물은 염부들에게 주어지는 땀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재산이었다. 소금물이 24도 정도 될 때부터 소금꽃이 피게 되고 소금이 만들어진다. 소금의 비중은 약 50도 이상으로 형성된다.

나의 고향이기도 한 신안의 작은 섬마을에는 변변찮은 농사와 사면이 바다이므로 할 수 있는 김양식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곳이었다. 갯벌에서 낙지를 잡기도 하고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기도 했다.

육지에서 정기적으로 들려가는 배는 하루에 한 번 뿐이었다. 전화는 마을 이장님 집에 한 대가 있어서 긴급전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전기도 없어서 컴컴한 밤은 촛불을 켜고 달빛에 의지하기도 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시간표였다. 섬에는 특히 식수가 부족해서 빗물을 받아 두었다가 사용하기도 했다. 화장실은 마당 한편에 큰 항아리를 묻고 그 위에 발판을 놓고 냄새에 중독되며 사용하였다..

하루 종일 누구도 나를 찾아주는 이 없고 내 이름을 불러 주는 이가 없었다. 하루하루 할 일을 찾아 움직여야 했던 암울했던 시절이었다. 햇볕이 작열하는 여름이면 염전에서 종일 일을 하게 되었고 눈보라가 살갗을 파고드는 겨울이면 바다 김발에 나가서 일을 하였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던 바다는 나에게 다시 만나기 싫은 곳이기도 했다. 까맣게 타버린 피부와 거칠어진 손은 트고 피가 나올 때도 있었다. 양말이나 장갑은 일하는데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맨손의 감각으로 추위와 더위를 어루만지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게 생각되었다. 여름 내내 만든 소금은 가을쯤에 장사꾼에게 팔았고 겨울에는 김을 매어다가 발장에 김을 떠서 건장에서 말려서 김을 만들어 도시에 내다 팔아도 내게는 한 푼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가끔씩 염전 둑에 구멍을 내는 수퉁게나 짱뚱어 같은 애물단지였다.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은 정말 보잘것없는 어리숙한 모습이었고 허수아비의 하루 일상처럼 무의미한 날들이었다. 죄를 짓고 유배된 것처럼 섬에서의 하루는 고로하고 힘든 일상으로 다가왔다. 스스로 고립되어 문이 열려있어도 탈출하지 못한 유리 항아리 속의 파리처럼 밖으로 날아가지 못하는 신세이기도했다. 어쩜 섬에 팔려간 염전 노예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절망 속에서 스스로 비참함을 자처하며 기본권마저 유린당하는 가스라이팅 같은 것이기도 했다. 마치 어디에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수많은 낮과 밤을 짓이기며 살아왔던 것은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었을까?

냉철하게 다시 되돌아보니 나의 버려진 무기력한 스무 살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의 잘못된 선택이었고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허무함이었다.

아침부터 자유를 갈망하는 내 마음에 총소리가 마을을 삼키고 있었다. 누군가 표적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총소리는 섬마을을 울리고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듯했다. 처절한 나에게 극한의 시련으로 다가왔던 총소리는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고요함을 깨뜨렸다. 총은 살상 무기이기에 어디에서 날아올 줄 모르는 삶의 위협이 되어 달려들었다. 총소리가 메아리로 산등성이를 넘어갈 때쯤 마을 방송에서 나를 찾는 방송이 들려왔다. 순칠이는 이 방송을 듣는 즉시 전화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설레는 마음에 달려와서 전화를 받은 나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좌절하고 총 맞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전화기 너머로 내가 보고 싶다고 언제나 볼 수 있냐고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나의 어리석은 젊은 날은 시련의 연속이었고 자유의지를 빼앗겨 버린 처참한 모습이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따뜻한 손을 내밀어 나를 사랑해 준 분들이 생각난다. 이모부 몰래 담배를 방안에 놓아주시던 이모님과 자기 생활도 힘드신데 나를 오라 해서 용돈을 쥐어 주시던 우리 고모님이 생각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과정에서 진심을 알게 되었고 공정과 공평이 어떻게 작용되는 줄도 알았다. 나는 섬 생활에서 극한의 고통과 인내를 배웠으며 잔인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용기도 얻었다.

가끔씩 꿈속에서 나를 괴롭히는 지난날 죽음의 공포와 고통의 시간들이 보이곤 한다.

여기에 이야기하는 모든 사연들이나 원치 않는 일에는 반드시 관계라는 기술적 요인이 담겨 있다고 본다. 우리 모두의 하나하나의 행실이 우리가 겪어온 과거의 모든 관계를 바탕으로 생성되는 것으로 나와 관련된 행동을 직시해 볼 것이다. 우리는 종종 흑백의 문제에서 무엇을 지키고 표현해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를 지켜가기 위해서 두려움이나 자존감에 의지하는 모습은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시련을 주는 사람조차도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열린 사고에 담대해야 할 것이다. 마음이 닫히면 해묵은 절망과 지워지지 않는 분노에 사로 잡혀 혼란스러운 가치관을 드러낼 수도 있다. 언제나 냉철한 판단과 일관된 신뢰를 통해 강인한 용기를 축적하고 강인한 열린 마음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미완성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론 어리숙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지만 성숙한 마음을 가지고 관계의 고립을 버리고 혹독한 시련이 있어도 정신적 실천을 통해 용서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섬에 갇힌 신세를 원망하거나 비참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어떻게 해서든지 빠른 탈출구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시간은 밀물과 썰물을 반복해서 지나갔고 달의 커짐과 작아짐으로 산너머로 달려가고 있었다. 멈춰진 듯 지루하고 고된 나의 인생 한마디에서 눈물도 사치라는 절망감에 드러누웠던 날도 있었다. 악으로 깡으로 견디며 타고 넘었던 시련의 파도들은 어느새 빛바랜 책장 속에 숨겨져 있는 듯 관심을 벗어나 있다. 나는 그때의 시간들도 분노와 교만을 드러내지 않고 감사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젊은 날의 시련과 고난은 내가 나이 들어서도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 넘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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