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진절을 회상하다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어둠을 가르고 세종시에서 달려온 동생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인터폰 소리가 들린다. 목포에서 장병도에 가는 여객선을 타려면 집에서 03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좀 여유 있게 도착해서 연안여객선 승선표를 끊고 6시 10분에 출발하는 배에 승선할 수 있다.
이렇게 다니게 된 것이 20년이 되었나 보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군산에서 전날 저녁에 우리 집에 오셔서 주무시다가 새벽에 동생이 오면 같이 출발하곤 했었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는 우리 형제와 사촌동생인 종훈이가 함께 하고 있다.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함께 해주는 고마운 동생들이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고향에 가는 것을 좋아라 하셨다. 가실 때면 객선 갑판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옛 생각에 잠기곤 하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벌초 다니는 아들들이 자랑스럽고 뿌듯해하셨다. 고향에 가면 옛 추억도 그립겠지만 막내 여동생이 있어서 더욱 좋으셨으리라 믿는다.
그런 분이 안 계시고 이제는 우리 셋이서 매 해마다 그 길을 반복해서 다니고 있다. 내가 처음 고향을 방문하게 된 것은 꼭 20년 전이 된 것 같다. 해마다 여름에 추석을 앞두고 고향으로 여행 겸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벌초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 의무를 나누고자 했던 철든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고향 가까이 옆 섬에 계시는 고모님들이 두 분이나 계셨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특히나 옥도에 사시는 막내 고모의 따뜻하게 마음 써 주심이 가장 큰 위로며 힘이 되었다. 처음에는 마진도에 사시는 큰 고모랑 낫으로 풀베기를 했었는데 키보다 더 큰 수풀 속에서 풀베기를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몇 년 지나서는 친절에 사는 사촌동생 성희가 “오빠, 예초기 하나 사 왔으면 좋겠어요. 남의 것 빌려 쓰는 것도 미안하고요.”했다. 그래서 동생들과 십시일반 하여 예초기를 샀다. 시골에 두고 일 년에 한 번 벌초하러 갔을 때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작년에는 기계가 고장 나서 수리를 하지 않았다는 동생의 이야기에 옥도 고모부 댁에서 예초기를 가지고 갔었다.
올해도 일정을 동생에게 이야기하고 기계 고쳤냐고 물었더니 바빠서 못 고쳤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고향에 있는 영길이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영길이 동생, 나 진주네. 말일 경에 벌초하러 갈라고 하는데 부탁이 있네.” 했더니 반갑게 대답한다. “예, 형님, 걱정 마세요. 내가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우리 산소 벌초할 때에 내가 할 테니까 벌초 걱정은 하지 마세요.” 한다. 말만이라도 고맙다. 그동안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벌초 가는 일에는 고모들 외에는 관심이 덜했다. 나도 언제까지 고향에 다닐 수 있을까 장담할 수가 없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작은 아버지도 계시는데 내가 장손이라는 의무감과 아버지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기에 시작한 일이고 이제는 욕먹지 않을 만큼 한 것도 같다.
서해안 고속도로 서늘한 밤길을 달려서 고창 고인돌 휴게소에서 잠깐 쉬었다가 목포 연안부두 선착장에 도착했다. 목포 부둣가에 가까워지니 벌써 시원한 바람이다. 우선 준비해 온 물건들을 내리고 동생은 부둣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는 종훈 동생과 표를 끊기 위해 매표창구에 왔다. 서서히 날이 밝으면서 바다냄새가 휙 하니 온몸을 휘감는다. 비릿하면서 짠 냄새가 우리에게는 정겹기 마저 하다. 이른 아침이지만 매표하는 선박회사 직원들은 출근해 있었다. “장병도 어른 다섯이요.” 그랬다. 이번 고향 방문에는 인천에서 사시는 작은아버지도, 아내와 누나도 동행했다. 누나는 나름대로 볼일이 있고 아내는 고모가 같이 오라 해서 벌초를 핑계로 가게 되었다. 우리로서는 하계휴가 겸 다녀오는 일정이기도 하지만 각자의 생활이 있다 보니 일정 맞추기도 쉽지 않았으나 내가 정한 일정에 대부분 동의해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배에 승선하여 선실에 들어오니 섬에 가는 사람들이 10여 명이 있다. 배 엔진소리는 이야기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소음이 크다. 가방을 등받이로 하고 작은아버지께서 준비해 오신 계란으로 요기를 하니 새벽에 출발하느라 못 잔 잠이 스르르 온다.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배낭을 배게 삼아 누워본다. 배의 엔진소리는 더욱 강하게 온몸까지 전해져 온다. 배가 출발하는가 본다. 목포연안을 다니는 이배는 철선으로 차량과 사람을 함께 실을 수 있다. 배는 목포대교를 지나 처음 도착지인 안좌까지 약 1시간을 달린다. 그렇게 빠른 배는 아니지만 물결을 자르며 달리는 것을 보면 천천히 가는 것도 아닌 듯하다. 안좌에서 차와 사람을 내리면 거의 타는 사람은 없다. 다음은 장산면에 대고 하의도 다음으로 장병도 선착장에 댄다. 장병도에 내리면 예전 기억들이 생생하다. 지금은 농사는 거의 짓지 않고 김과 대하양식, 소금염전과 전복양식, 톳과 미역양식 등으로 주로 어업으로 그나마 마을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겨우 10여 가호만이 남아있어 앞으로 마을에서 사람이 살아가기는 어렵지 않겠나 생각한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폐교는 되었지만 운동장이나 건물은 그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학교 앞 염전은 우리들의 놀이터이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런대로 잘 사용되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살으셨고 아버지와 그 형제 9남매와 우리 3형제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내 태가 묻힌 내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20년 전부터 이곳을 찾게 되었고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벌초를 빌미로 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보람인 줄 모른다. 우리 형제가 매년 찾고 있지만 동생들의 느낌은 다를 것이다. 요즘에는 배가 바로 접안할 수 있도록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어서 오르고 내리기에 적합하게 되어있다.
성희동생과 광식이매제가 선착장에 배웅 나와 있었다. 진절에서 내려 성희 동생네 집에 짐을 내려놓고 벌초 갈 준비를 한다. 옥도에 사시는 고모부께서 예초기를 준비해 오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와 작은 아버지 산소에 벌초를 하고 집에 오니 점심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직 우리들만을 위한 만찬이었다. “오빠, 낙지연포탕, 간자미 회무침도 드시고 이것 민어구이인데 이것도 드셔보세요.”하며 권한다. 성희 동생이 있어서 고향에 올 때는 어릴 적에 먹었던 음식을 추억하게 되어 마음이 푸근하다. 점심을 먹고 옥도로 향한다. 광식이 매제가 소내기엔진 올린 배로 옥도까지 데려다주었다. 옥도에는 막내고모께서 지금도 고모부와 텃밭과 논농사 조금과 김 양식일 하시면서 살고 계신다. 고모 집에서 내려다보면 내가 몇 년 전에 3단으로 전지해 놓았던 동백나무 사이로 하의도 웅곡 선착장이 보이며 치수도 사이로 오가는 배들도 보인다. 낙지의 유명한 산지이기도 한 옥도 갯벌이 길게 가을을 맞이하여 그림자 늘어지듯 드러누웠다. 도랑 같은 바다 건너가 내 고향 진전이다. 진철은 장병도라 하는데 하의면의 부속섬으로 행정구역으로는 하의면 후광 3 구로 편재되어 있다.
장병도를 잠깐 소개하자면 전라남도 신안군 남부 해상에 있는 섬. 행정구역상 하의면에 속한다. 목포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35㎞ 떨어져 있다. 주위에는 하의도·상태도·옥도·문병도·개도 등이 있다. 이 섬은 본래 남쪽의 소장병도(건너섬)와 약 300m 거리를 두고 분리되어 있었으나, 방조제를 쌓아 염전을 만들면서 하나의 섬으로 연결되었다. 지명은 섬의 모양이 긴 자루처럼 생겼다 하여 ‘진절이’로 부르던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이후 한자 표기를 하면서 ‘장병(長柄)’으로 바뀌었다. 주민 대부분이 전주 이 씨로 1700년경 전라북도 고창에서 입도하였다고 한다. 연근해에서는 갯벌에서 낙지가 채취되고, 김 양식과 천일제염 등이 활발하다. 목포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매일 두 번씩 운항된다. 나는 이곳 진절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작은 분교여서 학생 수는 전교생 합쳐서 40명 정도 되었는데 지금은 폐교되었다. 중학생이 되어 목포로 유학하면서 고향을 떠났으니 45년이 넘었다. 지금은 무릎 아래 닿을 듯 낮아진 돌담들이 옛날 그대로이고 집안 동생들 몇몇 이서 고향섬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지명들을 기록해 본다.
목개, 땅머리, 방죽굴, 진둑굴, 느다시, 다랭이, 건너섬, 다 몰래제, 불치, 큰 산수, 왕개 등이 기억난다.
우리는 고향에 가는 일을 해외여행 못지않게 즐겁다. 고향으로의 여행은 엄마의 품처럼 아늑하고 마음의 평화이며 힐링이다. 더욱이 일 년에 한 번 가는 고향이기에 더욱 특별한 느낌을 받는다. 정 많으신 고모님께서 준비해 주신 음식은 어렸을 때 먹었던 고향의 추억을 가득 담은 음식들이다. 독옻, 우무, 서대구이, 보리새우젓, 꽃게젓, 낙지연포탕, 낙지탕탕이, 고동무침, 간자미회는 가히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일품이다. 이 음식의 재료들은 미네랄이 풍부한 옥도 갯벌 개웅에서 통발을 이용하여 직접 잡은 재료들이기 때문에 그 맛이 특별하다 하겠다. 해마다 우리는 이 여행의 재미를 달리하며 색다른 체험들도 더불어 하게 된다. 갯바위낚시도 하고 통발과 그물을 보러 가기도 한다. 그물에 꽃게가 잘 걸리고 통발에는 낙지와 보리새우, 문저리(망둥어), 돌게가 주로 잡힌다.
얼마나 더 고향을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모님 내외분이 계시고 마음의 여유가 나를 원한다면 아마도 계속 다녀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추석을 앞두고 다녀오는 연중행사 같은 고향 여행길이 즐겁고 힐링하는 여행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가을이 오면서 쭈글거리는 빨간 고추가 지친 듯 나무에 매달려 있고 고추잠자리 낮게 웅덩이 위를 나니 콩잎 냄새가 더욱 짙다. 벼는 누렇게 익어가고 깨를 베어 묶어 말리시는 고모의 굽은 허리가 펴기에 힘들어 보인다. 고향여행은 또 다른 미련과 아쉬움을 남긴다. 멀리서 잔잔한 바다 위를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숨 가쁜 연안여객선에 몸을 실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섬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목포로 나온다. 부우~웅, 기적 한번 울려주는 선장님의 배려가 고맙게 느껴진다. 배는 두어 시간을 달려 유달산을 바라보며 목포대교 밑을 지난다. 가을 닮은 하늘은 청명하기만 하다.
옥도에 오면 마진도 큰 고모님이 “여기도 들려가라.” 하시는데 못 가서 죄송하다. 마진도에는 정 많으신 우리 고모님과 사촌동생 은호가 대하양식과 전복양식을 하며 농사일도 곁들여하시며 부지런하게 살고 계신다. 물론 기회가 되면 마진도에도 가고 싶다. 그곳은 또 특별한 재미있는 추억 만들기에는 좋은 곳이다.
올해도 동행자가 되어준 경곤, 종훈 동생에게 정말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여행에도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두 동생들은 나의 고마운 동행자이다. 특히나 안산에서 교직에 있는 긍정의 아이콘인 종훈 동생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몇 해 전에는 코로나가 유행해서 두 해를 못 갔고 작년에는 내가 허리협착증세가 심해서 못 가게 되어 아쉬움이 더욱 하기만 하다. 내가 20여 년 전 울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으니 세월이 참 야속하기도 하다.
내가 가지 못하면 동생들도 가지 않을 것인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영혼이라도 위로해 줄 고향 방문을 계속이어가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작년에는 고모부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들이 안 계시면 더더욱 멀어져 가는 고향길이 될 것이기에 마음은 안타까움에 머물게 된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내 고향은 진전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조상대대로 살아오셨던 바다위 작은 섬에는 무슨 기별이 전해질런지. .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섬으로 오래 기억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