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 너를 명약으로 인정하노라!
봄바람 난 잔디가 아파트 단지를 연초록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성질 급한 노란 산수유가 꽃을 피워 일요일 오후를 맞이한다. 모처럼 빈 일요일이라 딸에게 자전거를 태워주기로 했다. 겨우내 베란다에 묶여있던 자전거도 바람 쐴 겸 따라나섰다. 기회를 놓칠세라 아들도 태워 달란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핸들과 안장 사이에 간이 의자를 설치했던 터라 둘을 태워주는 데 문제가 없었다. 아이들을 앞뒤에 태우고 단지를 돌며 아파트 스카이라인을 감상하며 내 집이 이곳에 있다는 행복감을 만끽했다. 자전거를 장만한 것도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한 거였다.
산동네 단칸방에 세 들어 살다 첫 아파트를 장만하고 이사 오면서 행복의 실체를 보았다. 재래식 화장실은 수세식 양변기로 플라스틱 목욕통은 백옥 같은 욕조로, 연탄아궁이는 중앙난방으로…. 월동준비 한다고 연탄 수백 장을 나를 일도, 길이 미끄러워 연탄재를 뿌릴 일도, 가스 떨어졌다고 급하게 전화할 일도 없다. 엘리베이터가 높은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는 건 운전기사가 차로 모셔주는 성공한 행복감이다.
자전거를 태워주던 그날 오후는 유난히 따뜻했다. 아들은 앞 보조 의자에 앉히고 안전띠를 단단히 고정했다. 딸을 뒷좌석에 태우며 허리를 단단히 잡도록 몇 차례 일렀다. 등에 쪼이는 따스한 봄볕은 행복지수를 올려놓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두 아이와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어 바퀴 돌았을 때 따스한 봄볕이 딸에게 졸음을 쏟아부었다. 딸이 슬그머니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잡으려 했으나 앞에 탄 아들도 떨어질 듯하여 어쩔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한 손으론 미처 내리지 못한 아들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딸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서며 휘청거리는 듯하더니 “아빠 머리 아파”하며 칭얼거렸다.
머리를 다친 듯했다. 순간 천 길 벼랑으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는 행복의 끝이 보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의 계곡으로 떨어지는 행복을 잡지 못하는 무기력한 내가 있었다. 머리를 살폈으나 피가 나거나 상처가 보이지는 않았다. 괜찮을 거야, 단순 타박상일 거야, 아무 일도 아닐 거야.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급하게 집으로 돌아와 물을 먹이며 ‘한숨 자고 나면 나을 거야’ 나를 달래는 말로 딸을 안심시키며 재웠다. 자는 동안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내가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유치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딸이 계속 토한단다. 커다란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주저앉았다. “왜 그래요, 무슨 전환데 그래요” 옆에 있던 누군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괜찮을 거야.’를 되뇌며 아내에게 말했다.
“딸 데리고 경희대병원으로 갈 테니 직접 와요. 별일 아닐 거야.”
유치원으로 가는 이십여 분 동안 지옥문 몇 개를 지났다. 불길한 생각만 떠올리는 문이다. 뇌출혈로 수술해야 하는 건 아닐까, 아파트로 이사 잘 못 온 것은 아닐까…. 유치원 가는 길이 구만리다. 토한 탓인지 선생님 손을 잡고 나오는 데 힘이 없어 보였다.
응급실 의사에게 어제 상황을 설명했다. 의사는 말을 시키고, 걸음걸이를 살펴보는 등 몇 가지 진찰을 하더니 시티 촬영을 해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조여 왔다. 침대에 눕혀 링거 주사를 꼽은 채 방사선실로 올라갔다. 대기자가 많아 기다려야 된단다. 기다리다 잘못될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진찰실 안쪽을 기웃거리다 간호사 제지를 받기도 했다. “이○○ 님 들어오세요.” 간호사 호명이 들렸다.
얼마 후 의사는 촬영 필름 여러 장을 형광 불빛에 비춰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의미일까? 진정되려던 가슴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출혈 증상은 보이지 않으니 안심하란다. 아내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연신 굽히며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토하는 것은 머리 충격을 받는 순간 뇌는 위에 음식물이 남아있으면 부패하여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낸단다. 그러면 위는 위험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밖으로 음식물을 강제 배출하는 과정이니 진정시켜주면 괜찮아질 거란다. 처방을 내렸다.
“콜라 한 병에 설탕 큰 술 하나 정도 넣으면 탄산성분이 모두 빠져나갑니다. 그걸 조금 먹여보고 토하지 않으면 나머지를 다 먹이세요.”
믿기지 않는 처방을 대학교수가 내려줬다. 콜라에 미량의 카페인 성분이 들어있어 위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어릴 적 상처 부위에 된장을 바르던 것처럼 믿기지 않았으나 의사 말에 따랐다. 보글보글 넘치더니 김 빠진 콜라 반 병이 만들어졌다. 조심스레 반 컵 정도를 먹였다. 물 한 모금 마시는 즉시 토했던 딸이 토하지 않았다. 나머지 김 빠진 콜라를 모두 마시는 것으로 딸의 자전거 추락 사고는 완치되었다.
‘김 빠진 콜라’ 너를 명약으로 인정하노라!(사진 : lee j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