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익숙한 하루로 돌아가는 길
가장 익숙한 리듬으로 돌아가는 길은 거창한 결심이 아닌 조용하고 작은 습관들로 시작된다.
바람 사이로 스며드는 공기가 한결 투명해졌다. 창문을 스치던 여름의 열기는 어느새 희미해지고, 그 자리를 차분한 바람이 채운다. 부엌 창문 너머로 빛 한 줄기가 사선으로 떨어지며, 식탁 위의 유리 컵을 천천히 적신다. 며칠의 소란이 빠져나간 집은 마치 긴 숨을 내쉰 사람처럼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 삶은 나물의 은근한 냄새가 아직 공기 속에 머물고, 싱크대 옆에 세워둔 접시들은 물방울을 몇 개 더 떨군다. 식탁 위엔 아직도 북적임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따뜻한 잔향이 체온처럼 방 안을 감싼다. 현관문을 열어 쓸고 닦자, 지난해 명절에 쥐었던 빗자루의 감촉이 손끝에 되살아난다. 바람은 새것이지만, 풍경은 낯설지 않다. 명절은 그렇게 우리를 지나가고, 집은 다시 제 리듬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명절의 무게를 한때는 온몸으로 버텼다. 물 끓는 소리에 맞춰 불을 줄이고, 기름이 튀지 않게 손목을 살짝 기울이며, 한 상을 차리고 또 치우는 동안 날은 금세 저물었다. 이제 그 역할의 일부는 다음 세대가 자연스럽게 이어받는다. 어제의 전은 오늘의 주문이 되었고, 정성의 모양도 손보다 마음의 온도로 재는 일이 많아졌다. 손을 놓았다는 말이 아니다. 손이 덜 움직이는 동안 마음이 더 자주 안부를 묻는다. ‘괜찮았니’ ‘더 필요했니’ 같은 말이 늦게라도 건네지면, 하룻밤 사이에 식탁 가장자리가 다시 따뜻해진다. 그 따뜻함이 일상을 떠받친다.
다시 일터로, 교실로, 버스 정거장으로 발길을 옮기면 명절 때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귀에 들어온다. 프린터가 토해내는 종이의 마찰음, 잔을 얹을 때 유리와 유리가 맞부딪히는 미세한 울림, 서랍을 여닫을 때 나무가 내는 낮은 숨소리. 소란이 끝나야 들리는 소리들이다. 평소엔 지나치던 것들이 유난히 선명하다. 이 선명함이 ‘다시’의 정체다. 같은 책상을 마주하지만 손의 각도가 달라지고, 같은 창밖을 보지만 빛을 붙드는 마음이 조금 더 깊어진다. 반복이 아니라 복원, 복원이 아니라 갱신에 가까운 움직임이 시작된다.
돌아가는 일에는 작별이 필요하다. 손님을 배웅 하고 현관문을 닫을 때, 집 안의 공기가 아주 작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가라앉는 동안 지난 며칠의 표정들이 떠오른다. 다독여 준 어깨, 말없이 건넨 접시, 멀리서 도착한 안부의 메시지. 사라진 게 아니라 지나간 것들이고, 지나갔지만 남아 있는 것들이다. 한 손으로 컵을 헹구다 물을 멈추고 창밖을 보면 구름 사이로 엷은 빛이 번진다. 전날 밤 보이지 않던 달이 낮빛으로 잔잔히 남아 있다. 달이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늦게 도착한다. 그런 식으로 마음도 뒤늦게 도착한다. 늦게 온 마음은 오래 머무른다.
익숙한 하루로 돌아가는 길은 거창한 결심보다 작은 습관으로 완성된다. 의자를 제자리로 밀어 넣고, 수건을 반듯하게 개어 걸고, 빈 그릇 두 개를 포개 찬장 안쪽에 넣는 일. 그러면 집은 곧바로 우리의 편이 된다. 스스로에게도 같은 일을 해 준다. 필요 없는 말을 한 걸음 뒤로 물리고, 오래 미뤄 둔 문장을 오늘의 목록 첫 줄에 올려 본다.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러나 꾸준히. 이 단순한 반복이 삶의 바탕을 다시 팽팽하게 잡아준다.
저녁이 되면 바깥의 소음이 또다시 높아지겠지만, 방 안의 공기는 이미 안정되었다. 물이 잠시 가라 앉듯 마음도 낮은 곳으로 안착한다. 며칠 전의 웃음과 수고, 반가움과 허전함이 뒤섞여 투명한 층을 만든다. 그 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고 또렷한 빛이 보인다. 구름 뒤에 있던 달이 비에 씻긴 하늘로 천천히 고개를 내밀듯, 익숙한 하루의 중심도 다시 모습을 찾는다. 명절이 남긴 것은 결국 사람의 온기와 자리,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조용한 자신감이다. 내일 아침 커튼을 젖히면 바람의 결이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 바람 속에서 어제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가 부드럽게 겹친다.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단단해질 때, 삶은 늘 새로워진다.
조용히 밝아지는 저녁, 식탁에 잔 하나를 더 올려 둔다. 그 잔은 오지 못한 이들을 위한 자리고, 한편으론 오늘의 나를 위한 자리다. 한 모금의 물이 목을 적시듯, 일상의 첫 문장 하나가 마음을 적신다. 명절이 데려온 시간과 떠나보낸 마음들이 제 위치를 찾아가고, 집은 다시 우리를 품는다. 숙연할 만큼 평범한 풍경 속에서 하루의 온도가 안정된다. 돌아온 자리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떠남과 돌아옴이 서로를 완성해 준다는 것을, 그래서 익숙함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멀리 데려가는 힘이라는 것을.
조용히 다시 시작한다. 작은 습관을 다듬고, 마음의 먼지를 털어낸다. 문 손잡이를 잡는 손길이 가볍다. 빛은 눈에 보일 만큼 선명하지 않아도 좋다. 손이 기억하는 일들, 마음이 기억하는 온도가 오늘을 지탱해 줄 테니. 그리고 내일, 또 내일. 반복이라는 이름의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소란을 지나 고요로, 고요에서 다시 빛으로. 그 길 위에 삶이 서서히 맑아진다.
방 안의 불을 끄면, 창밖의 빛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세상은 이미 자신들의 속도로 쉼 없이 흐르겠지만, 나는 이곳, 나를 가장 오래 품어온 익숙한 자리에서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다.
며칠의 소란을 통해 우리는 덜어내는 법을 배웠고, 돌아온 자리에서 다시 채우는 법을 기억했다. 이제 마음은 서두르지 않고 다음 페이지를 기다린다.
작은 습관들이 만들어낸 이 고요하고 단단한 바탕 위에서, 우리는 가장 느린 속도로 가장 먼 곳까지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소란이 멎은 자리에 남은 건, 익숙한 하루의 숨결이었다."
by 숨결로 쓰는 biroso나.
<작가노트>
이 글은 연휴가 지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날의 공기를 기록하려 했습니다. 떠나보낸 마음들이 서둘러 사라지지 않도록 집과 삶의 작은 습관들을 다시 세우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독자님들께서도 오늘의 자리에서 작게라도 다시 시작해 보시길 바랍니다. 작지만 확실한 움직임이 생활의 온도를 단단히 잡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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