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덧문을 닫으며 마주한 낯선 나의 초상
계절의 경계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단지 추위가 아니라,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내면의 덧문이다.
밤 10시. 창밖의 공기가 더 이상 ‘가을의 품’이 아니다. 날카롭게 벼려진 서늘함이 계절의 이별을 알리는 마지막 인사처럼 피부를 스친다. 늦가을의 빛은 희미해져 가고, 거리의 그림자들은 한결 길고 짙은 묵언으로 우리를 에워싼다.
달력의 숫자는 단순히 10월의 끝을 고하지만, 이 밤은 서리가 내린 후(상강), 대지가 곧 깊은 잠에 들기 전 겨울의 입구(입동)가 열리기 직전의 가장 얇고 예민한 틈새에 놓여 있다.
절기로 볼 때, 상강 이후의 이 시기는 모든 수확을 끝내고 완전히 침잠해야 하는 고독의 시간이다. 고요히 스스로를 거두고 텅 빈 채로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숙명적인 내려놓음의 정서가 대지를 지배한다.
하지만 서양의 핼러윈은 이 침묵을 깨고 유쾌한 일탈을 요구한다. 풍요를 내려놓은 가을의 문이 닫히고, 고독한 동면을 준비하는 겨울의 덧문이 열리는 그 틈새에 낮의 이성이 어둠의 장난스러운 광기에게 잠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창문 밖, 웃음소리와 기묘한 분장의 행렬이 스쳐 지나간다. 이 밤이 현실의 규칙에서 잠시 벗어난 유예의 시간임을 속삭인다. 이 모순적인 두 정서, 동양의 깊은 내려놓음과 서양의 경쾌한 일탈이 교차하는 밤에 서게 된다.
시계는 자정을 향해 흐르고, 계절은 문턱을 넘으려 한다. 나는 이 기묘하고 아름다운 경계의 밤에, 우리가 왜 그토록 열렬히 '가짜 표정'을 쓰고 싶어 하는지 묻는다.
저 우스꽝스러운 가면들이 폭로하려 애쓰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목소리는 무엇일까. 그 목소리는, 계절의 경계에서 우리의 영혼이 겪는 또 다른 형태의 '내려놓음'을 갈망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10월 31일 만을 위해 가면을 준비하지는 않는다. 사실 삶의 모든 날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가면 무도회와 같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사회라는 무대를 위한 '습관이 된 유리벽'을 착용한다.
그것은 '책임'이라는 이름의 단단한 외투이기도 하고, '유능함' 혹은 '친절함'이라는 이름의 매끈한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 유리벽을 통해 타인의 시선과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며, 거친 세상과의 마찰을 줄여주는 투명한 막을 두른다.
하지만 이 유리벽이 너무 오래, 너무 완벽하게 달라붙어버릴 때, 내면에는 고독한 비극이 싹튼다.
가면과 나 자신을 구분할 수 없게 되며, 스스로에게조차 거짓된 미소를 보이기 시작한다.
'착한 사람'이라는 표정을 벗지 못해 마음속의 진정한 외침을 삼키고, '강한 사람'이라는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흐르는 눈물마저 참아낸다. 이 유리벽은 나를 지켜주었으나, 이제는 내 영혼을 가두는 차가운 감옥이 된다.
마치 상강이 지나 모든 결실을 거두고 난 가을 들판처럼, 우리의 마음속은 헛헛함으로 가득 찬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교하게 조율된 '나'를 연기하느라, 정작 나의 가슴이 무엇을 향해 떨고, 무엇에 기뻐하는지 잊어버린다.
완벽하게 설계된 삶의 궤도 안에서 안전하지만, 그 궤도에서 벗어난 작은 일탈조차 상상하지 못하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그렇게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사회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모든 감정들, 유치하고, 불순하며, 때로는 폭발적인 욕망들이 무거운 잔영처럼 쌓여 숨 쉬지만, 그 잔영의 존재를 외면하며 매일 더 두꺼운 일상의 벽을 덧대어 쌓는다. 이 헛헛함은 침묵의 계절을 앞둔 가을밤의 스산한 온도와 꼭 닮아 있다.
바로 이 숨 막히는 지점에서 핼러윈의 가면은 해방의 손짓을 건넨다. 우리의 절기가 우리에게 '내려놓음'을 요구할 때, 핼러윈은 '일시적인 소유'를 허락한다. 일상의 가면이 '진짜 나'를 가리기 위한 표정이었다면, 이 밤의 가면은 '숨겨진 나'를 꺼내기 위한 유쾌한 반역이다.
10월의 마지막 밤, 기꺼이 '나'이기를 잠시 놓아 버린다. 뱀파이어, 괴물, 혹은 우스꽝스러운 피에로가 되는 순간, 일 년 내내 우리를 짓눌러왔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안개처럼 희미해진다. 이 기괴한 복장을 입는 행위 자체가
"저건 내가 아니야, 이건 잠깐의 놀이일 뿐이야."
라는 마법의 주문이 된다.
가면은 나를 가리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익명을 보장해 주는 방패가 된다. 평소엔 감히 꺼내지 못했던 목소리를 외치게 하는 힘. 이것이 축제가 주는 역설이자, 익명의 숨결이 선사하는 자유다.
'가장 가짜인 표정'을 연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가장 진짜인 욕망'을 세상으로 풀어놓는다. 일상의 표정이 '타인이 원하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 밤의 코스튬은 '내 안의 유령이 원하는 나'를 위한 것이다.
완벽한 불일치 속에서 완벽한 익명성을 얻고, 그 익명성 뒤에 숨어 그동안 숨 막히게 했던 '또 다른 나'에게 시원한 숨 쉴 공간을 허락한다. 이 짧은 광란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상강 이후의 헛헛한 마음을 채울 낯선 용기를 얻는다.
가면을 쓴 나는 평소의 나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던 당당함과 대담함, 때로는 유치함까지도 허락받는다. 이 순간만큼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오직 이 밤의 낯선 자유만이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켈트족이 '삼하인' 밤을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얇아진다고 믿었던 것은, 어쩌면 우리 안의 기억이 귀환하는 시간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거두고 침잠하는 이 절기의 틈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내면의 깊은 곳, 망각 속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잔영'을 돌아보게 된다.
10월의 마지막 밤은 그래서 '나만의 유령'을 만나는 시간이다. 이성에 밀려 무의식 저편으로 사라졌던 나의 오래된 슬픔, 묻어두었던 후회,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 실현되지 못한 꿈들.
이 모든 '가슴에 머문 잔영'들이 오늘 밤 경계가 얇아진 틈을 타 스멀스멀 기어 나와 우리의 주변을 맴돈다.
핼러윈은 이 슬프거나 억압된 기억들을 애써 밀어내는 대신, 그들에게 기꺼이 눈을 맞추고 "Trick or Treat"을 외치며 함께 어울리는 정화의 의식이다.
내 안의 억눌린 자아들은 외친다. "나에게 달콤한 위로(관심과 인정)를 주지 않으면, 나는 계속해서 장난(고통스러운 존재 증명)을 칠 거야!"
이 외침을 들음으로써 비로소 내면의 갈등을 해소할 작은 실마리를 찾는다.
이 유쾌한 축제를 통해,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것을 '놀이'로 승화시킨다.
무서운 존재(고통)를 우스꽝스러운 분장으로 전복시킴으로써, 그것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함을 선언한다. 오히려 그것 또한 나의 일부임을 당당하게 껴안는다. "그래, 내 안에는 이토록 순수하고 슬픈 유령이 살고 있었어!"라고. 이 밤은 고독한 기억들이 마침내 자신을 인정받고, 잠시나마 자유롭게 춤추는 무대이다.
시계의 초침이 자정을 향해 간다. 축제의 소음은 물러나고, 마법은 풀린다. 우리는 짙은 화장을 지우고, 빌려 입었던 낯선 옷들을 정리한다.
화장솜에 묻어나는 물감은 지난 몇 시간 동안 허락되었던 유쾌한 일탈의 따뜻한 잔여물이다. 일상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정화의 과정이며,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용한 다짐이 된다.
11월 첫날의 새벽이 밝아오고, 입동을 앞둔 바람은 어제보다 한층 깊은 고독을 머금는다. 다시 일상의 표정, 책임이라는 습관이 된 유리벽을 집어 든다. 이 새벽의 공기는 무겁지만, 어제와는 미묘하게 다른 감각이 우리의 내면을 지탱한다.
무언가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하룻밤의 해방을 경험한 우리는 일상적 가면이 '나의 전부'가 아님을 확인했다. 그 가면이 피부에 달라붙어 무거웠던 것이 아니라, 잠시의 간격을 두고 얹힌 외투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젯밤 만났던 내 안의 유령, 그 장난스럽고 솔직했던 '또 다른 나'의 숨결이 우리의 심장 깊은 곳에 고요한 속삭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0월의 마지막 밤, 그 시간과 계절과 정체성의 경계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가면을 벗어던질 용기가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가면을 유연하게 쓰고 벗을 수 있는 자유와 지혜일지 모른다.
일상의 유리벽을 부정하는 대신, 그것 역시 내가 선택한 수많은 '나' 중 하나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때로는 내 안의 유령에게도 기꺼이 가면을 씌워 세상 밖으로 내보내 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
내년에도 이 찰나의 경계는 다시 우리를 찾아오리라. 그때까지 우리는 이 밤의 자유와 용기를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 축제의 온기가, 일상의 차가운 외투 아래에서도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잔불이기를 바란다.
모든 가면 아래 가장 깊이 숨 쉬는, 바로 '나'라는 이름의 고독한 진실을 위하여.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이별과 시작은 이처럼 모호한 가면을 통해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그 유리벽 너머의 잔영이야말로 우리를 이토록 외롭고도 빛나게 만드는 유일한 증거이다.
가면의 유통기한이 끝난 후에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트릭 오어 트릿'을 외칠 용기를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진실의 조각들이 겨울의 덧문을 통과하여 새로운 계절의 씨앗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이 모든 경계의 사유 끝에, 우리는 더욱 단단하고 진실하게 서 있는 11월의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삶의 모든 가면은 결국,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얼굴이었습니다. 내려놓는다는 건 포기가 아니라, 더 단단히 서기 위한 연습입니다.
‘상강과 입동 사이’라는 시간의 틈, 계절의 끝자락에서 만난 유령은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덕분에 내 안의 고요를 확인합니다.
이 밤, 가면을 쓴 채 일탈하는 서양의 풍경과 침잠하는 동양의 절기가 한데 섞여, 가장 낯선 곳에서 가장 진실한 나를 발견합니다.
모든 가면은 결국 나로부터 시작되고,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새긴 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고독만이 다가올 겨울의 추위를 이기는 유일한 온기입니다.
"가장 깊은 고독 속에서만, 진짜 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by 숨결로 쓰는 biroso나
<작가의 말>
이 글은 지난 글 〈10월의 마지막 밤〉에서 다루었던 '붙잡고 싶음과 놓아보려는 마음의 사이’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그 글이 고요한 애도의 결이었다면, 이번 글은 그 기억을 품은 채 ‘사유와 회복’의 결로 이어집니다.
10월의 마지막 밤, 동양의 침잠과 서양의 해방이 교차하는 순간을 ‘경계의 미학’으로 바라보며 썼습니다.
참사의 아픔을 지나며, 10월의 밤을 더는 단순한 축제로만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번 글 에서는 그때의 슬픔을 직접 언급하기보다, 그 공기를 가만히 품은 채 계절의 온도와 인간의 내면을 겹쳐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유리벽 뒤의 자아를
가면 속에 비추며,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기 위해 쓰는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삶과 멈춤, 해방과 침묵의 경계에 서 있는 인간의 내면을 동서양의 감각으로 함께 담았습니다.
이 글이 모든 경계의 틈새에서 진실을 마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조용한 위로와 문학적 숨결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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