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발자국이 남긴 시간의 심연
헛걸음 속에서도 우리는 방향이 아닌 리듬으로 삶의 무늬를 완성하고 있다.
사람들은 헛걸음을 두려워한다. 목적지에 닿지 못한 발자국은 낭비라 여기고, 돌아온 길 위에서는 후회를 셈한다. 그러나 삶의 어느 순간엔 깨닫게 된다. '헛걸음도 걸음이었다'는 것을. 돌아간 길, 멈춘 자리, 빗나간 방향까지도 결국은 나를 이루는 하나의 리듬이었다는 것을.
햇살이 조금 느그러진 오후, 가을의 끝자락에서 바람이 방향을 잃은 듯 잠시 머무는 오후가 있다. 낙엽이 제 그림자를 끌며 천천히 흘러가고, 그 뒤를 쫓던 햇살마저 길 위에서 멈춘다. 그럴 때면 내 하루도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흔들리고 있는 듯하다.
요즘 들어 유난히 헛걸음이 잦다. 완벽할 것 같던 내비게이션이 갑자기 멈춰버리듯, 익숙한 길에서조차 헤매거나, 문 닫힌 가게 앞에 서서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온다. "괜히 왔네, 시간을 버렸군."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말은 꼭 되돌아온 새처럼 마음에 내려앉는다. 정말 이 걸음이 허공으로 흩어진 걸까. 정말 이 하루가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진 걸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낙엽이 흩어져도, 봄이면 다시 잎이 피어나듯, 우리의 발자국 또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어디엔가 남는다.
젊은 날에는 목적지에 닿지 않은 모든 노력을 헛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세월이 쌓이니 이제 알게 된다. 이루지 못한 일들, 미뤄둔 일들, 어긋난 관계들까지도 결국 나를 이루는 밑걸음이 되었다는 것을. 인생의 많은 장면은 ‘결과’가 아니라 ‘리듬’으로 남는다. 헛걸음이라 부르던 시간들은 사실 '나를 되살리던 숨'이었다.
젊은 시절의 시간은 언제나 직선이었다. 출발점이 있고, 도착점이 있었으며, 그 사이의 모든 걸음은 결과를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인생의 시간은 원처럼 순환한다는 것을. 돌고 도는 계절 속에서, 한때 흘려보낸 경험이 모양을 바꿔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한때는 애써 쌓은 계획이 무너지고, 기대하던 일들이 무산되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 것 같았다. 우리가 헛걸음이라 부르는 시간은 사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날이 아니라 미래의 나를 위해 보이지 않는 씨앗을 심은 날의 기록이다. 실패는 뿌리로 남았고, 좌절은 흙이 되었다. 그 아래서 새로운 내가 자라고 있었다. 젊을 땐 시간의 결과를 믿었지만, 나이 들어서는 시간의 복원을 믿는다. 헛걸음이라 부른 날들조차 언젠가 다시 내게로 돌아와, 다른 형태의 빛이 되어 내 마음의 벽을 비춘다.
인생이란, 단선이 아니라 순환이다. 한때 흘려보낸 사람의 말, 그때는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한 장면이 훗날 나를 구하는 문장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이 뿌린 시간의 결과를 나중에야 읽는다. 헛걸음이라 부르는 시간은 사실, 미래의 나를 길러낸 보이지 않는 봄이었다.
익숙한 산책길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지도 앱은 신호를 놓치고, 발걸음은 낯선 골목에 멈췄다. 오래된 담벼락 사이로 국화 냄새가 스며들었고, 젖은 흙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멀리서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향을 잃었다는 두려움보다 오히려 묘한 평화가 찾아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금빛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방향을 잃는 일이 아니라, 잊고 있던 나의 리듬을 되찾는 일이라는 것을.
삶은 오케스트라와 같다. 빠르게 달리는 비바체의 시간도 있지만, 느리게 숨을 고르는 아다지오의 순간도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완전히 멈추어야만 다음 음이 태어난다. 헛걸음처럼 보이는 순간은, 다음 악장을 준비하는 삶의 카덴차다. 멈춤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따라잡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빠르다. 사람들은 결과를 향해 달리고, 버스와 지하철, 대화와 꿈까지 모두 ‘다음’을 향해 움직인다. 하지만 어떤 일은 머물러야만 꽃이 피고, 기다려야만 비로소 익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생의 많은 일은 효율이 아니라, 여백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머물러야만 그 존재와 가치를 비로소 드러내는 것들이 있다. 꽃봉오리가 터지는 섬세한 시간, 상처 입은 마음이 굳은살을 만들고 회복되는 지난한 과정. 이 모든 것들은 효율의 잣대로는 결코 재단할 수 없다.
이제 나는 가끔 의도적으로 헛걸음을 택하기도 한다. 목적 없는 산책,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후. 그런 날, 커피 잔 위로 비치는 햇빛 하나에도 마음이 머문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많은 것을 얻는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머묾의 시간에만 끊임없이 외부로 향하던 내 안의 소음이 가라앉고 진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내면이 투명해지는 순간, 이게 나였구나 하고 존재 자체를 수긍하게 만드는 힘은 성과가 아니라 이 넉넉한 머묾에서 나온다. 가만히 있는 힘이야말로 쉼 없이 질주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사색의 깊이를 더해주는 우물이다.
어느 심리학자는 말했다. 인간은 무언가를 하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멈춰 있는 시간에 스스로를 회복한다고. 헛걸음은 바로 그 회복의 시간이다. 머무름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깊은 창이다.
관계에서도 헛걸음은 늘 있다. 마음을 다했는데 닿지 않고, 오래 쌓은 인연이 뜻하지 않게 멀어질 때. 예전의 나는 그런 일을 실패라 여겼다. 하지만 때때로 돌아서는 용기 안에 관계가 깃들기도 한다.
어머니는 화가 나도 한 발 물러섰고, 서운해도 끝내 등을 돌리지 않으셨다. 그 느린 걸음이 답답하다고 여겼지만, 세월이 흘러서야 깨닫는다. 그 돌아섬 속에는 다정함이 있었다. 상대의 속도를 먼저 헤아리고, 말보다 기다림으로 마음을 전하던 사랑의 방식이 거기 있었다. 젊을 때는 사랑은 곧 말로 표현해야 된다 믿었지만, 이제는 침묵에도 온기가 있다는 걸 안다. 말보다 표정이, 표정보다 기다림이 더 많은 것을 전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향한 걸음에는 언제나 우회가 필요하다. 빠른 길만이 정답은 아니다. 진심은 느림을 닮아있다. 어머니의 걸음은 효율적인 길은 아니었지만, 가장 부드럽게 세상과 이어지는 길이었다. 사랑의 본질은 직진이 아니라, 돌고 돌아 도착하는 다정함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며칠 전, 낡은 신발을 정리하다가 밑창의 깊은 자국을 보았다. 닳은 만큼 걸었고, 걸은 만큼 배웠다. 그 흔적 속에는 흙길과 비, 그리고 수많은 계절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젊을 때는 닳은 신발이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훈훈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건 나의 발자취, 나의 생애, 나의 흔적이다.
지금도 나는 때때로 헛걸음을 한다. 하지만 더 이상 한숨 쉬지 않는다. 그때마다 마음속에 한 문장이 떠오른다. 헛걸음도 걸음이다. 이 말은 위로가 아니라 선언이다. 결과로 자신을 증명하던 오랜 습관을 버리고,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함을 받아들이는 선언.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괜찮다. 이 길 위에 내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기를 바라며, 그 발자국이 누군가에게 잠시 숨 고르는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며. 인생의 길은 결코 헛되지 않다. 돌아가는 모든 걸음이 결국 나를 데려온다. 그리고 언젠가, 멈춘 자리에서 깨닫게 된다. 내가 잃었다고 여긴 길 위에서도, 삶은 여전히 나를 걷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멈춤은 포기가 아니라 더 깊은숨을 쉬고 다음 악장을 준비하는 고요였다.
우리가 걸었던 모든 길은 비록 눈에 보이는 결실은 없었을지라도 결국, 나의 존재를 되새기고 내면을 정화시켜 준 자리로 남아 삶의 단단한 지반을 이룬다.
헛걸음은 실패가 아니라, 다음 장을 준비하며 삶의 리듬이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는 정화의 시간이자, 시간을 채우는 가장 느린 충전이다.
헛걸음의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숨이 닿는 자리 였다. 삶은 언제나 목적이 아니라 리듬으로 흘러간다. 그 리듬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이 글은 완벽해야만 안심했던 젊은 날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더 빨리, 더 멀리 가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살아가며 인생은 달리기가 아니라 산책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멈춰 서서 꽃을 바라보게 보고, 길을 잃은 산책길의 고요속에서 헛걸음은 낭비가 아니라 나를 돌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지혜가 되었음을 헤아려 봅니다.
이 글이 자신의 지나온 걸음이 헛된 것이 아닐까 염려하는 누군가에게 다정한 쉼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헛걸음으로 멈춘 그 자리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가장 조용하고, 가장 따뜻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니까요.
"길을 잃어도 발자국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의 지도가 되어 삶이 깊어진다."
by 숨결로 쓰는 biroso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