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꽃들에 대한 단상

- 올봄 새로 만난 몇 가지 들꽃과 사람꽃에 대하여 -

by 이윤구

꽃을 보면 좋다. 길을 가다가도 뭐라도 보이면 멈춰 서기가 일쑤고, 재촉과 타박을 들어도 그예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야 직성이 풀린다. 덕분에 핸드폰에는 보이는 대로 찍어놓은 꽃들이 제법 많다. 그렇다고 꽃에 대해 박식하거나 무슨 식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보면 좋고, 눈에만 넣어두면 금방 잊어버릴 것 같아서 카메라에 담고 마음 한편에도 갈무리해 둘 뿐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노랗고 하얗게 피어 날렵한 자태를 뽐내는 인동덩굴과 수줍음 많은 보라색 벌깨덩굴을 만났다. 인동덩굴과 벌깨덩굴은 성격이 극과 극처럼 보인다. 달리 금은화(金銀花)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노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인동덩굴은 이른 아침부터 날 좀 봐달라는 듯 꽃잎을 한껏 뒤로 젖혀 제 속내까지도 다 드러내고 있다. 이에 반해 이름마저 소박한 벌깨덩굴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양이 영락없이 눈 밑에 주근깨 몇 개쯤은 박혀있는 숫기 없는 촌색시 같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한참을 들여다봐도 끝내 그 속내를 알아채기가 어렵다. 무릎을 꿇고 요리조리 머리를 조아려 보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서 찍어도 봤지만 끝내 속내는 고사하고 표정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같은 꽃이라도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은 그런 꽃들이 좋다. 화단을 장식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꽃들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무심히 피어있는 들꽃들이 좋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두고두고 그리운 꽃들이 좋다. 성형이라도 한 듯 표 나게 화려하고 예쁜 꽃보다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도 도무지 알아볼 수 없게 작아서 돋보기를 쓰던지 카메라 줌을 켜고서야 겨우 눈 맞춤할 수 있는 그런 녀석들이 좋다.


올봄에 몇 가지 꽃을 새롭게 만났다. 그중 하나가 벌깨덩굴이었고, 나머지는 솜나물과 봉삼이다. 자주 지나다니던 길섶이나 무덤가에 본디 있었던 것들임에 틀림없어 보이건만 그동안 때를 맞추지 못한 까닭인지 그런 꽃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올해서야 낯을 익히게 된 것이다. 밥벌이를 내려놓고 나서 심신이 한결 여유로워지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솜나물은 지난 4월 어머니를 모시고 외조부모님 묘소에 성묘를 갔다가 합장한 봉분 옆에서 새롭게 만났다. 첫인상이 에델바이스를 닮았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인지라 사진을 찍어 검색을 해보았다. 이름이 솜나물이었다. 녀석을 보면서 첫눈에 목화솜을 펴서 만든듯한 에델바이스가 생각난 것도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름에 ‘나물’ 자가 붙어있어 먹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작고 하얀 몸 새를 보면 먹겠다는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생길 수가 없다. 작고 앙증맞으면서도 속내가 무르지 않아 보이는 데다 성정은 한없이 맑아 보여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 시정의 잡스러움과는 한참 거리를 두고 사시다 가신 외조부모님을 닮은 듯하여 더욱 반갑고 마음 한편이 찡하게 울렸다. 많은 외손들 중 별나게 나를 아껴주시던 그분들이 1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솜나물처럼 피면 좋으련만........

다른 하나는 봉삼이다. 봉황삼이라고도 한다는데, 꽃대는 찌를 듯 곧게 하늘로 솟아올랐고, 봉황의 날개나 꼬리털인 양 활짝 펼쳐진 넓은 잎새를 보고 있으면 꼬리가 잘린 듯한 느낌의 ‘봉삼’보다는 봉황삼으로 불러주는 것이 제격인 꽃이다. 특히나 그 꼿꼿함과 당당함에 비해 살짝 저물어가는 저녁의 푸른빛을 머금은 듯 한 흰 꽃은 크기도 빛깔도 과하지 않은 여느 우리 꽃 그대로여서 보자마자 내게는 들꽃 중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사람꽃’이란 말을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고두심이 좋아서’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배우 고두심이 배우 박상면에게 손주 자랑을 하면서 말한 꽃 이름이 사람꽃이다. “사람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놈 뒤 꽁지를 쫓아다니다 보면 누가 밥 먹자고 해도, 술 사준다고 해도 까짓것 뒤도 안 돌아보게 돼. 사람꽃은 어쩔 수가 없어.......”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미인이나 기생을 해어화(解語花) 했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귀여운 손주를 ‘사람꽃’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른 어떤 말보다 더 깔맞춤이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꽃이 내 안에서 피었다가 지고, 다시 피기를 반복하였을 것이련만 누가 밥 먹자고 해도, 술 사준다고 해도 뒤도 안 돌아보고 뒤 꽁지를 쫓아갈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생각해 본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한 것인가.......


수십 년을 함께 해왔음에도, 서로 내 속 네 속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어느 틈에 겨울바람에 말라버린 산수국처럼 색깔도 향기도 없이 형체만 남아있는 것을 볼 땐 사람이 꽃이라는 말이 맞기나 한 것인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사람꽃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오히려 새로 맺은 인연이 덜 버거울 수가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슬프다.


어쨌거나 사람이 모두 꽃이라면, 나는 꽃이나 매한가지로 과하게 세련되고 도도한 사람보다는 적당한 사람이 좋다. 너무 자신만만하거나 지나치게 왁자지껄하거나 기가 센 사람을 만나면 원래 외겹인 제 모양에 유전자 조작이든 무엇이 되었든 장식이 더해진 겹꽃들을 보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 마치 넓은 잎으로 밑에 난 작은 것들을 무람없이 덮어버릴 것만 같아 지레 초조하다. 들꽃들에 눈길을 주는 것이 고벽이 되어 굳어진 탓인지 덜 화려하고 덜 세련되고 덜 크고 눈치도 코치도 조금은 덜떨어진 듯한 그런 사람에게 눈이 한 번 더 가고, 마음이 기울고, 부러 마음을 쓰는 것이 아깝지 않다.

두 달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특히, ‘숲길 등산 지도사’ 교육에 참가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사람이 모이면 각양각색, 십인십색(十人十色)인 것은 어디나 다를 것이 없다. 어떤 이는 있는 듯 없는 듯하여 눈을 비비고 봐야 보이는 것이 영락없는 꽃마리나 봄맞이꽃이다. 더러는 하얀 민들레나 눈부시게 흰 구절초를 닮았다. 누구는 큰 까치수영처럼 가지런하고, 누구는 나리꽃을 닮았다. 과하게 잎이 넓고 꽃이 큰 사람도 있었다. 벌깨덩굴처럼 도무지 말이 없고 수줍어 괜스레 안쓰러워지는 사람도 있다. 여전히 덜 화려하고 덜 세련되고 덜 크고 눈치도 코치도 덜떨어진 듯한 사람에게 눈이 가고, 친근한 동류의식을 느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력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더 있는 것임은 틀림이 없다.


어찌 됐든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게 쉽지 않은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의 중간쯤, 40명이 넘는 새로운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각각의 빛깔과 향기를 탐색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이름은 잊어도 누군가는 향기로 기억되고 누군가는 빛깔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문득 그들에게 나는 어떤 꽃으로 기억될지 궁금해진다. 어떤 색깔, 어떤 향기, 어떤 느낌으로 기억될지 궁금하다. 물론 그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든지 간에, 화초로 기억을 하든 잡초로 기억을 하든 나는 나로 있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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