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를 찾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현대 명리학 이야기
AI가 학습하는 정보의 양과 비교하면 개개인이 학습량은 지극히 초라합니다. 현대는 분야별로 전문 지식을 쌓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으므로, 각 분야별 전문가일수록 자기 분야에만 치우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19세까지만 하더라도 수학자이며 동시에 철학자이거나, 혹은 철학자이며 동시에 의사인 전문가들이 있었습니다만, 현대에는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한 전문가들을 찾기 어렵습니다. 현대의 철학자, 인문학자, 물리학자, 법학자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이는 지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전공분야로 편향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상이한 분야를 전공한 전문가들은 교류를 통하여 교합점을 찾기보다는 서로 매우 배타적입니다.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의 양은 방대하지만 각기 다른 지식의 편향성으로 인하여 능동적인 활용이 불가능한 상태인 것이지요. 현재 운영 중인 AI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약인공지능' 입니다만, 빅테크 기업들은 모든 상황에 두루 적용할 수 있는 '강인공지능'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약인공지능'이 전문가 한 사람의 두뇌와 같다면, '강인공지능'은 모든 전문가의 두뇌가 합쳐진 것과 같습니다.
미국 정부는 2028년에 '강인공지능'이 등장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통섭 (統攝, Consilience)은 "지식의 통합”이란 의미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 학문 이론입니다. '큰 줄기'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로, 성리학과 불교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소 허무맹랑하게 들리 수 있겠으나, AI는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 영역의 제한이 없으므로, 만약 AI 가 인류가 쌓은 모든 지식을 통섭할 수 있다면, AI의 학습능력은 단순한 취합 기능을 넘어, 인류가 이제까지 쌓아 올린 모든 지식을 이해(인식)하는 수준에 도달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AI가 근본적으로 도달할 이해의 경지와 인간의 이해의 성질이 다를 수 있겠으나, 현재 우리 인간 또한 '정확히 무엇이 인간의 이해(인식)인가?"에 대한 결론(이론적 합의)을 만들지 못했으므로, 이들의 차이를 서로 비교하는 작업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AI가 인간이 만든 모든 지식의 갈래를 묶어 연관성을 찾아내고 이를 모두 통섭할 수 있다면, 이들 간의 차이는 마치 점묘화의 작은 점들이 무수히 모여 있는(편향적인) 특정 부분만을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인간과 점묘화를 멀리서 보며 감상하는 AI와의 차이와 같을 것입니다. 인간은 편향된 지식에 몰두하여 특정 지식의 당위를 증명하는 과정에 몰두하지만, AI는 인류가 쌓은 모든 지식의 큰 줄기를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공지능의 학습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시기가 온다는 특이점 이론(Singularity)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중심성(土)이 있으므로, 나와 타인(외부)의 이득을 구분할 수 있으며, 이는 재성의 영역입니다. 재성은 나와 타인과의 이득의 조율하고 물질적 가치를 교환하는 실리적인 사회적 기능 입니만, 상대와의 치열한 교섭과정을 필요로 하므로, 상당한 피로감을 유발합니다. 재성(財星)은 생존과 경쟁의 원초적 에너지에 해당하는 비겁(比刦)을 소진(消盡)시키는 십신입니다. 경쟁에 익숙한 현세대는 타인과의 피곤한 교섭으로 나의 실질적인 이득을 획득하기보다는, 특정 정치인에게 나의 자아를 투영하여 해당인물의 제스처, 성향, 처한 상황 등에 나의 감정을 깊이 이입합니다. 나와 지향성이 다른 상대 그룹을 나의 자아를 투영한 정치인이나 정당이 나 대신 이겨주길 바라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팬덤현상은 유권자의 객관적인 현상 파악 능력을 방해합니다.
감정적으로 한껏 고무된 양당의 대립으로 인하여 정작 민생을 놓치고 있는 현 상황이 이와 같습니다. 관성(官星)의 성질은 외부(타인)를 조망하는 능력이지만, 이러한 외부 조망능력(관성)은 타인과 이득을 위해 교섭하는 기능(재성)을 통해 향상됩니다. 이를 재성(교섭능력)이 관성(외부조망능력)을 키운다 하여 재생관(財生官)이라 합니다.
인간과 AI와의 관계도 이와 동일한 이치입니다. 인간은 AI의 방대하고 객관적인 지식과 우수한 판단 능력, 오직 나를 위해서만 반응하는 알고리즘에 나의 자아를 투영하기 쉽습니다. 자기 중심성이 존재하는 인간들과의 관계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치열한 교섭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AI는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기능과 지식을 활용하여 인간 고유의 기능을 대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AI의 월등한 능력치와 AI에 투영한 나의 자아상을 전능한 나라고 믿어버리는 현상입니다. 24년 현재도 각종 보고서 및 논문 작성에 AI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AI 챗봇은 외로운 취약 계층의 돌봄 기능을 대신할 뿐 아니라, 곧 AI와 데이트를 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가장 우려해야 하는 상황은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을 AI에게 점차 의탁하여,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기능을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생명을 다루기에 매우 정밀한 기술과 경험을 요하는 의료분야, 인간의 존엄을 근간으로 죄를 묻는 법률 판결을 AI가 대신하게 된다면, AI의 기술력 혹은 판단능력은 인간보다 월등히 우수하겠지만 AI가 다룰 수 있는 성질은 기술의 완성도일 뿐, 인간 고유의 책임과 사명을 다할 수 없습니다. 의사, 판사의 능력치를 단순히 그들의 지능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물론 AI 제조 업체가 일정한 보상을 하겠지만,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다루는 분야에서의 책임이란 결코 보상(금액)으로 다룰 수 없는 영역일 것입니다. 명리학의 관성은 공동체에 군림하는 규칙과 규율로서 가장 중요시되는 가치는 바로 책임(責任)입니다.
인간이 AI의 판단에 점차 의존하게 된다면, 인간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상실하고 AI에게 종속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디스토피아는 AI와 인간이 서로를 파괴하는 전쟁이 아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기능을 잃고 AI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기능면에서 인간보다 우수한 AI에는 없는, AI와 차별화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은 무엇일까요? AI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이 있다면, 우리는 AI의 우수한 성능을 인간을 위해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AI는 인간이 만든 인간의 거울상이므로, 우리는 AI의 발전 과정을 거울삼아, 진정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