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끝, 맥주 시작

맥주는 내 하루의 ‘엔딩 크레딧’이다

by Asparagus




요즘 나는 밤 9시가 되면 자동적으로 맥주를 마신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굳이 마시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버튼을 누르면 동작하듯이

육아가 끝나고 아이가 잠든 순간 내 몸이 자동적으로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고 맥주를 꺼낸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한편으론 마라톤이고

다른 한편으론 소음없는 전쟁이다.

나는 이 전쟁을 무기 없이 치른다.


칼대신 물티슈,

방패대신 기저귀가방

도망도 못 가고 포로도 못 잡는다.


오직 함께 견디는 것이 유일한 전략이다.

오늘 하루도 치열했다.



아침 6시 12분부터 시작된 삶의 현장

열 번도 넘게 접은 기저귀

아기가 30번째 소리 지를 때쯤엔 진짜로 넘어갈뻔한 내 멘탈

분노조절 장애? 와비슷한 행동에도 꾹 참은 내 인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틀어준 핑크퐁 에 깃든 체념과 사랑.

밥그릇 엎어버리기

온데 방데 다 튄 밥알을

무릎 꿇고 걸레질을 하다 보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나온다.


그러다가도 천진난만하게 꺌꺌꺌 거리는 아기를 보면

어이없어 나도 같이 웃는다.


생생한 감정받아주기가 끝이 나고

아기가 잠이 들면 나는 조용히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낸다.

그리고 들리는 고요한 해방의 소리




칙—!



오늘의 끝을 선포하는 작고 고요한 해방의 소리다.

한 모금을 넘긴다.

차가운 거품이 입안을 타고 흐르고,

혀를 지나, 목을 감고 떨어진다.

이건 단순히 ' 맛있다 '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건 ' 살았다 ' 는 느낌에 가깝다.


첫 모금은 입안을 청소한다.

두 번째 모금은 마음을 헹군다.


맥주를 마시는 것은 단순한 음주가 아니다.

그건 오늘 하루,

아무도 몰래 나만의 박수를 쳐주는 일이다.


오늘도 잘했어. 안 울었고.

소리는 아주 조금만 질렀고

밥도 먹였고, 웃게도 했고

결국 아이는 내 품에서 잠들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축배를 들 자격은 충분하다.



물론 맥주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아이의 다음 떼쓰기나,

내일 아침 6시 기상 같은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하지만 맥주는 말해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네 거야.”

그리고 그 말이면, 충분하다.


맥주는 그런 하루를
조용히, 그리고 단단하게 감싸주는 음료다.

내일 육아는 또 반복될 테고,
아이의 에너지는 더 넘치겠지.
호기심도 더 왕성해질 거고.

그래도 괜찮다.


나는 안다.

내일 밤 9시쯤, 이 냉장고 앞에서—
오늘을 다 살아낸 나와 다시 마주칠 거라는 걸.

그리고 또 한 번,
‘칙—’ 하고 작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내 하루는 조용히, 구원받을 것이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8화아기 옷장은 셀럽, 내 옷장은 생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