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후, 내 뇌는 아이에게 임대 중

출산하고 생긴 건망증 — 어디에 두었는지도 잊어버린 내 정신

by Asparagus



아기를 낳고 나서,
내 뇌의 절반쯤이 누군가 몰래 빼간 것 같다는 기분을 자주 느낀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분명히 주방에 와서 뭔가 하려던 참이었는데,
순간 아기가 울어서 달려갔고,
다시 돌아왔을 땐 내가 왜 거기에 서 있었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휴대폰을 찾고,
찾고 나면 아기 물티슈를 찾고,
또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도대체 물티슈 찾는데 왜 냉장고를 자꾸 여는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비효율적인 행동을 반복했다.




예전엔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다고 자부했었다.
커리어도, 친구 관계도, 집안일도 어느 정도 손에 잡히는 범위 안에 있었고.
그런데 출산 후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멀티태스킹이
“분유를 타면서 한쪽 귀로 아기 울음소리 체크”
이 정도 수준이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그랬다.
“엄마들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자기 뇌의 일부를 아이에게 내어준다.”
그래서 아기의 사소한 표정, 기분, 배변 패턴 같은 건 기억력이 날카롭게 좋아지지만
정작 자기 약속이나 카드 비밀번호, 심지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같은 건
머릿속에서 스르륵 지워져버린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무 공감되면서도,
괜히 울컥했다.



내가 건망증이 생기다니…
아직도 좀 충격이다.



며칠 전에는
남편이 시킨 피자를 받자마자,
전혀 기억도 못한 채 오븐에 다시 넣고 돌려버린 적이 있다.
“좀 식었길래…”라는 변명을 했지만,
사실은 내가 피자가 도착했다는 걸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고 맥주를 꺼내왔다.
피자의 치즈는 줄줄 흘러내렸지만...



어쩌면,
이 시기의 건망증은
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살짝 비워두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면서
너무 많은 걸 기억해버리면
터져버릴지도 모르니까.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어제 저녁을 뭘 먹었는지 잊어버려야
아이의 방긋 웃는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이니까.




그리고 문득,
내년에 복직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솔직히 조금 두렵다.


이 멍해진 머리와 흐트러진 집중력으로
예전처럼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엄마고, 어디까지가 사회인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올 것 같아.

그게 살짝 무섭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언젠가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조금씩,
조금씩,
내 뇌의 빈칸도 다시 채워질 거라고.



나는 오늘도
냉장고 앞에서 10초쯤 멍하니 서 있다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뭘 가지러 왔더라?”
그리고 웃는다.


아, 나 지금도 잘 살고 있구나.
조금 건망증이 심해졌을 뿐,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만큼은
잊지 않았으니까... 괜찮다고,
웃으며 위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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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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