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사치가 주는 위로에 대하여
Le Chocolat Alain Ducasse Manufacture à Tokyo
나는 나 혼자 불금을 보내기 좋아한다.
학생 때는 무조건 친구들과 어울려야 스트레스가 풀리는 줄 알았다.
술집의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도,
옆 테이블의 웃음이 내 목소리를 덮어도,
그게 ‘젊음’의 형식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직장인이 된 후로는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시간 속에서 내가 천천히 회복되는 걸 안다.
나의 불금 루틴은 이렇다.
샤워를 마치고,
조명을 한 칸씩 낮춘다.
유리컵에 와인을 천천히 채운다.
그리고
알랭 뒤카스 초콜릿 박스의 종이를
비밀편지 봉인을 푸르듯 조심스레 벗긴다.
와인 한 모금, 초콜릿 한 조각.
쌉싸름이 먼저 길을 열고,
버터 같은 고요가 혀끝에 앉는다.
그 순간, 내 모든 감각은
‘미각’이라는 객석에 질서정연히 착석한다.
이 시간에는 어떤 알림도 들어오지 않는다.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받지 않는다.
오타쿠적으로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다.
이 우아하고 약간 집착적인 습관은 사실 한 사람 덕분에 생겼다.
회사 입사 초기,
동경하던 편집장님이 계셨다.
한 100년은 된 듯한 아주 낡은 켈리백을 멋스럽게 들고 ,
심플한 옷차림에 흰 운동화를 일부러 구겨신은
어디 하나 허투루 꾸미지 않는, 진짜 멋진 분이었다.
그 편집장님이 어느 날,
다른 사람 몰래 쉿- 하며 초콜릿 하나를 건넸다.
그건 정말 ' 쉿!'이라는 감탄사가 어울리는 맛이었다.
은은한 씁쓸함과 잊히지 않는 부드러운 마무리.
그 이후로 자꾸 그 초콜릿이 생각이 났다.
나는 그 맛을 찾아
초콜릿 가게를 전전했고
구글맵을 뒤지며
일주일에 2번씩이나 초콜릿 탐방에 나섰다.
그러다 마침내 니혼바시의 Le Chocolat Alain Ducasse에서 가장 가까운 그 맛을 찾았다.
문을 열자 카카오의 냄새가 얇은 이불처럼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유리 케이스 안의 초콜릿들은 군인처럼 정렬해 있었고,
직원의 손놀림은 카디건의 단추를 잠그듯 느린 그곳에서
거의 비슷한맛의 초콜렛과 다시 재회했다.
지금도 작은 사치를 부리고 싶은 날이면 그곳을 찾는다.
명품백을 고르는 태도로 초콜릿을 고르고,
와인을 곁들일지 말지 심사숙고한다.
어떤 날은 마다가스카르의 산미가 잘 맞고,
어떤 날은 브라질의 둥근 풍미가 더 부드럽다.
그건 기상예보처럼 정확하진 않지만,
내 하루의 기압을 조절해 준다.
이상기압을 만났을 때는 달콤함을 조금 더 키운다.
날씨와 마음은 종종 같은 지도 위에 있다.
혼자 보내는 불금은 외롭지 않다.
외로움은 사람이 비어서 생기고, 고요는 공간이 비어서 생긴다.
둘은 비슷해 보여도 서로 다른 것들이다.
나는 고요 쪽을 고른다.
한 주를 건너온 사람에게 필요한 건 많은 대화보다
잘 마무리된 쉼표 하나일 때가 많다.
Le Cabaret
이젠 와인 이야기.
와인을 처음 좋아하게 된 건,
요요기 하치만이라는 동네 덕분이었다.
학생시절 나는 그곳에 오래 살았고
하루의 끝엔 늘 요요기공원이나 동네 골목을 산책했다.
그 골목엔,
카페, 바, 빈티지숍 , 빵집, 문구점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그곳은 도쿄라는 도시의 사생활이 살아있는 구역.
그 골목 어귀에는 늘 항상 붐비는 작고 바쁜 비스트로가 있었다.
이름은 Le Cabaret
항상 이 가게 앞만 지나면
걸음이 느릿느릿해졌다.
파리의 뒷골목 어딘가에서 옮겨온 것 같은 간판,
그리고 늘 만석인 테이블들.
너무 가보고 싶은데 혼자가 기는 머쓱해서
먹기 좋아하는 같은 반 남자아이를 꼬드겨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예약이 너무 쉽지 않다.
한 달 내내 실패.
그러던 어느 날, 단골 빵집 사장님이 잡화점을 새로 열었다.
그곳엔 정말 별의별 게 다 있었다.
지우개, 수첩, 가위, 그리고 와인까지 팔았다.
그 시절, 막 내추럴 와인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시음을 하고 내추럴와인 2병을 샀다.
그리고 무심코 물었다.
“혹시 Le Cabaret 가보신 적 있으세요?”
사장님은 웃으며 대답했다.
“알죠 알죠. 전 일주일에 세네 번은 가는데요.”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네? 저는 한 달 동안 예약을 못했는데요…?”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불시에 가면 은근 자리가 비어 있을 때 많아요. 다음에 불러줄까요??”
그렇지만 너무 거기에 목매달아 빵집아저씨와 같이갈정도는 아니였기에
조금 어색하기도하고 해서, 결국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 괜찮아요. 기회 되면… 언젠가.”
며칠 뒤 어느 밤, 동네를 산책하다가 Le Cabaret 앞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크게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그 빵집 사장이었다.
그는 환하게 손을 흔들었고,
나도 모르게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우연과 인연이 겹쳐진 덕분에
나는 다음 주 목요일 저녁, 드디어 2인 테이블을 예약할 수 있었다.
(참고로 그 빵집은 바로 카타네 베이커리다. 지금도 여전히 그 빵집은 잘 되고 있다.)
그리고 그날, 같은 과 남학생을 끌고 들어간 Le Cabaret.
와인과 고기, 마지막 푸딩까지—
한 입, 한 잔, 모든 게 놀라웠다.
그 남학생은 말했다.
“여기 내 단골 될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약 쉽지 않을걸.”
그 순간, 나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속 한 장면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비스트로의 와인잔에 비친 불빛은 어쩐지 파리의 가스등 같았고,
내가 앉은 자리마저 영화 세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와인은 나에게 어색한 손님에서 다정한 파트너가 되었다.
불금의 저녁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때론 지친 하루의 끝을 묘하게 가볍게 해준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취향이란 건 다 이렇게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한 번의 우연, 한 번의 초대.
그리고 잔에 담긴 몇 모금의 경험.
Le Cabaret.
그곳은 단순한 비스트로가 아니었다.
나와 와인을 이어준, 첫 번째 문이자,
내가 도쿄에서 만난 가장 낭만적인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