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Y냐 LOVE CHROME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녀의 파우치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보면
그녀가 평소에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오늘의 관찰 포인트는 바로
‘빗’이다.
도쿄의 감도 있는 여자들의 가방 속엔
꼭 두 종류의 빗 중 하나가 있다.
그리고 이 두 빗은, 말하자면
*도쿄 감도 있는 여자 120%*를 설명하는 상징 같은 존재다.
① 프랑스에서 온 우아한 연대기 — BULY의 이니셜 빗
파리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가장 조용히 잘난 체하는 빗.
BULY 1803.
마치 19세기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귀부인이 들고 있을 법한 그 브랜드.
빗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적이고, 너무 아름답다.
사실상 이건 헤어 브러시보다는 고급소품에 더 가깝다.
불투명한 베코우 문양, 둥글게 마감된 손잡이,
그리고 빠리 스럽게 새겨진 이니셜.
디자인이 워낙 고와서,
빗질을 안 하고 그냥 꺼내만 둬도 뷰티 오브제처럼 보인다.
재밌는 건 —
이 빗을 넣고 다니는 그녀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아, 이거요? 선물 받았어요~.”라고
이상하리만치, 자기 돈 주고 샀다는 사람은 없다.
BULY는 누군가에게 ‘받아야만 하는’ 빗인 셈이다.
“나도 언젠가 받아보고 싶네…”
② 금속처럼 빛나는 야망 — LOVE CHROME
반면 LOVE CHROME은 정반대다.
처음 보면, ‘이게 빗이야? 사이버펑크 무기야?’ 싶다.
거울처럼 매끈한 금속 광택에, 가격은 기본 10만 원.
로즈골드 도금 모델은 무려 30만 원을 넘는다.
“세상에, 누가 저걸 사?”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지만,
놀랍게도 그녀들은 산다. 그리고 눈이 반짝이며 이렇게 말한다.
“이거 진짜 좋아요. 정전기도 안 생기고, 빗으면 빗을수록 머릿결이 살아나요.”
‘빗으면 빗을수록 좋아진다.’
이 문장을 나는 적어도 다섯 번은 들었다.
듣는 사람도 괜히 당장 머리를 빗고 싶게 만드는,
그 진심 어린 세일즈 멘트 말투.
무엇보다 BULY와 달리, LOVE CHROME은 다들 자기 돈으로 산다.
“내 머릿결 하나쯤은 내가 책임져요.”
작지만 확실한 주도권이 그 반짝이는 금속 빗 속에서 빛난다.
BULY는 유럽 박물관의 수집품 같고,
LOVE CHROME은 미래도시에 사는 여성이 소지할 만한 뷰티 기기 같다.
미학적으론 BULY, 기능적으론 LOVE CHROME.
그게 나의 개인적 평가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
호텔 어메니티에서 가져온 빗을 파우치에 넣고 다닌다.
내 지극한 취향은 아베다(Aveda)의 나무 패들 브러시다.
딱 두 번만 빗어도
정수리부터 모발 끝까지 모조리 반듯하게 정돈되는 그 기분.
정말 최고다
하지만 문제는 단하다,
너무 크다.
지퍼백도 아닌 서류봉투에 넣어야 할 것 같은 사이즈.
전철에서 꺼내면 미용사 선생님이 출장 왔나? 하는 눈빛을 받는다.
그래서 결국, 나는 아베다를 집 전용 빗으로 두고
외출용 빗은 여전히 고민중이다.
BULY는 선물 받을 사람이 없고
LOVE CHROME은 약간 부담스럽다.
누가 좀 예쁘고, 실용적이고, 3만 원대고에
디자인 미학까지 갖춘 K-빗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있다면 내가 바로 1번 고객이다.
도쿄 여자들의 빗을 보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에게 빗은 단순한 머리카락 정리 도구가 아니다.
작은 디테일을 사랑하고, 그 디테일로 자기만의 세계를 완성하는 작은 선언문이다.
머리칼 한 올을 고요히 빗어내는 동작 속에서,
그녀들은 오늘 하루도 자기 자신을 존중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파우치 속에서 호텔 어메니티 빗을 꺼내며 생각한다.
“뭐 언젠가 나만의 빗을 만나게 되겠지.”
그 빗이 BULY일지, LOVE CHROME일지,
아니면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K-빗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그날이 오면
나는 이 허접한 어메니티 빗을 아주 근사하게 은퇴시켜 줄 거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작은 세리머니까지 곁들여서.
(최소한 호텔 슬리퍼 정도는 같이 묻어줘야, 호텔 세트답게 영광의 퇴장을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