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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네 Apr 06. 2022

슬럼독 밀리어네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선택해나가는 것

출처 : 네이버 책

    - 소설과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새는 흔하지 않지만 몇 년 전만 해도 TV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프로그램 중 하나가 바로 퀴즈쇼였다. 인터넷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하고 손가락질 몇 번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이제는 사양길에 접어든 쇼이지만 말이다.


 답을 선택할 때의 고뇌,  찬스 선택의 신중함,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한 자의 한탄과 옳은 선택을 한 자의 환희에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 점이 수십 년간 퀴즈쇼가 우리네 안방을 차지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쇼에 출연해 대망의 마지막 문제를 맞히고 쏟아지는 박수갈채 속에 거액의 상금을 손에 넣는 상상을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그 상상을 실현해낸 청년이 있다. 대학교수나 저명한 학자들도 풀지 못할 문제를 막힘없이 풀어낸 빈민가 출신 청년, 피라미드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리볼버 권총의 개발자는 알고 있는 희한한 청년의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는 2008년 개봉한 동명 영화의 원작, 비카스 스와프루의 '슬럼독 밀리어네어'다.




 흔히 인생새옹지마라고 한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 인도의 어느 경찰서에서 샌드백마냥 얻어터지고 있는 청년이 딱 그 꼴이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람 모하마드 토머스. 그는 새옹지마라는 동방의 사자성어는 몰랐겠지만 몇 가지 알고 있는 것은 있었다. 바로 어젯밤에 열린 W3B (누가 십억의 주인이 될 것인가?) 퀴즈쇼에서 출제된 문제들의 정답이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퀴즈쇼의 우승자로 10억 루피를 손에 쥐었던 청년이 이제는 후덥지근한 취조실에 묶여 신나게 얻어터지는 신세가 되었으니 새옹지마란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있겠는가.


 상금의 지불능력이 없던 퀴즈쇼 관계자들은 경찰들을 매수해 토머스에게서 부정한 방법으로 퀴즈를 풀었노라는 자백을 얻어낼 것을 사주한다. 돈 앞에 정직한 경찰은 약속대로 토머스를 무자비하게 고문한다. 결국 고문을 이기다 못한 그가 거짓 자백을 하려는 순간, 취조실 밖이 시끄러워지더니 한 젊은 여자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그녀의 이름은 스미타 샤. 스스로를 토머스의 변호사라고 소개한다. 제 이름은 스미타 샤. 변호사죠. 정작 토마스는 그녀를 처음봤지만서도. 작은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기개와 명확한 논리에 밀린 경찰은 마지못해 토머스를 풀어준다.


 스미타의 집. 푹신한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토머스에게 스미타가 CD 한 장을 내민다. 바로 어젯밤 퀴즈쇼의 녹화본. 진실을 말해달라는 그녀에게 토머스는 자신은 정말 퀴즈쇼의 정답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그녀와 함께 DVD 플레이어를 켠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와 함께.


1번 문제(1천 루피)

 토머스의 둘도 없는 단짝인 살림은 '아르만 알리'라는 배우의 열렬한 팬이었다. 고된 도시락 배달일을 하면서도 언젠가 아르만 알리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살림의 꿈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 덕에 토머스마저 아르만 알리에 대해 박사가 될 정도. 여느 때처럼 영화관에 아르만 알리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간 두 사람. 알리의 녹색 눈동자와 갈라진 턱, 뾰족한 코에 살림이 정신이 팔 린동 안 웬 수상한 노인이 그의 옆에 앉는다. 그리곤 시작되는 수상한 몸짓. 영화가 절정에 다다를수록 그의 몸짓은 더 대담해지고 결국 살림이 폭발하고 만다.

 분노한 살림의 주먹이 노인 얼굴을 강타하고 수염마저 뭉텅이로 뽑아내는 동안 토머스는 보았다. 그 노인의 녹색 눈동자와 뾰족한 코 그리고 갈라진 턱을. 그리고 살림의 영웅은 그렇게 사라졌다.


 DVD가 켜지고 W3B의 스튜디오가 TV 너머로 보인다. 쇼의 진행자인 프렘 쿠마르는 마주 앉은 토머스에게 간단한 진행 룰과 함께 첫 번째 문제를 내놓는다.

Q )아르만 알리와 프리야 카푸르가 처음으로 함께 주연을 맡은 영화는?

토머스에게는 쉬운 문제. 그가 입을 열어 대답한다.

A)배신


2번 문제(2천 루피)

 토마스는 티모시라는 중년의 백인 신부 밑에서 자랐다. 태어나자마자 이름도 없이 버려진 토머스를 거두고 복잡한 인도의 종교 환경을 감안하여 '람 모하마드 토머스'라는 괴상한 이름을 지어준 사람도 그이다.

토머스는 영국 사람인 티모시 신부와 성당에 함께 살며 인생에서 얼마 안 되는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어느 날 '존'이라는 새로운 신부가 교구에 부임하고 토머스는 존의 부적절한 행동을 목격하게 된다. 저녁이면 남자들을 불러들여 육체적인 관계를 즐기고 있었던 것. 이를 용납할 수 없는 티모시 신부와 존 신부의 갈등은 깊어지고, 이른 아침 두발의 총성과 함께 두 사람의 갈등도, 토머스의 행복한 시절도 끝나게 된다.


 W3B의 스튜디오. 토머스에게 프렘 쿠마르가 은밀히 다가와 다음 문제가 'FBI가 무엇의 약자인가'라는 것을 알려준다. 토머스가 너무 일찍 탈락하면 곤란한 모양이다. FBI가 뭔지 모른다는 토머스의 말에 그럼 아는 게 뭐냐고 프렘 쿠마르가 묻는다. 성당에 오래 살아서 INRI(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는 안다고 말하는 토마스. 고개를 주억대며 자리로 돌아간 진행자는 약속된 퀴즈를 낸다.

Q ) 십자가에는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을까요?

참가자 또한 약속된 답을 말한다.

A) INRI

할렐루야!


3번 문제(5천 루피)

  아르만 알리를 마음속에서 지운 살림과 토머스. 어느 날 그들이 사는 뭄바이의 허름한 집단주택단지로 샨타람 씨 가족이 이사를 온다. 중년의 아내와 '구디야'라는 이름의 딸 하나가 딸린 천문학자 샨타람 씨는 하지만 이 주택단지가 몹시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시선은 하늘 너머 우주를 바라볼지언정 그의 두발은 이 시궁창에 묶여 있는 것을. 뭄바이의 흔한 빈민이 되었다는 현실에 낙담한 샨타람 씨는 점점 술에 의지하게 되고 성격도 가혹해져 갔다. 아내와 딸에게 걸핏하면 손찌검을 하고 자신이 '플루토'라고 이름 붙여준 고양이마저 술에 취해 살해하는 지경에 이른 것.

  구디야를 내심 흠모하고 있던 토머스는 샨타람 씨가 자신의 딸에게까지 몹쓸 짓을 하는 지경에 이르자 더는 참지 못한다. 술에 취해 난간을 오르는 그를 밀어 추락시킨 것. 사랑의 힘으로 저지른 일이지만 차가운 바닥에 널브러져 축 늘어진 샨타람 씨를 보곤 토마스는 이곳을 뜨기로 결심한다. 살림과 구디야를 뒤로 한 토머스는 뭄바이를 떠나 무작정 델리를 향한다.


 W3B의 스튜디오. 프렘 쿠마르가 토머스를 향해 세 번째 문제를 묻는다.

Q) 태양계에서 가장 작은 행성은?

토머스는 순간 난자당한 채 쓰레기통에 처박혀있던 구디야의 고양이를 떠올린다.

A) 명왕성(플루토)


 - 이 책은 2005년에 출간되었고 명왕성은 2006년 8월 태양계 행성 분류에서 제외되었다. -


 4번 문제(1만 루피)

  티모시 신부가 세상을 떠난 후 델리의 한 소년원으로 보내진 토머스. 그간 지내던 성당과는 다르게 소년원은 무척이나 척박한 곳이었다. 비좁은 시설, 불결한 환경, 형편없는 음식, 학대를 일삼는 관리인 등등. 그곳에서 토머스는 힌두교도들에게 온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살림과 만나게 된다. 고아라는 점 말고도 여러 공감대가 있던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가까워지다 못해 '마만'라는 남자에게 둘은 세트로 입양되게 되는데 마만은 두 사람을 뭄바이로 데려간다. '직업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난데없는 노래와 춤을 배우게 되는 토머스와 살림은 인생역전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들과 같이 마만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만나게 되며 그 꿈은 곧 악몽으로 바뀌게 된다. 어찌 된 일인지 아이들이 하나같이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  

 직업훈련이 막바지에 이르러 살림은 강사가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하는 노래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크리슈나 신에게 바치는 성가, '수르다스의 성가'를 배우고 하산하게 된 살림. 하지만 기쁨도 잠시, 살림을 장님으로 만들어 동냥을 시키려는 마만의 끔찍한 계획을 토머스와 살림이 엿듣고 둘은 곧장 탈출계획을 세운다. 절체절명의 순간, 탈출을 망설이는 살림에게 토머스가 말한다.


너는 운명을 믿는다고 했지? 그럼 이 동전으로 우리 운명을 결정짓자. 앞면이 나오면 도망가고, 뒷면이 나오면 여기 있는거야. 좋아?(146p)


얼마 전 점쟁이에게 받은 행운의 일 루피 동전에 선택을 맡기자는 것이었다. 주저하던 살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토머스는 동전을 던진다.


앞면이었다.


W3B의 스튜디오. 프렘 쿠마르가 네 번째 문제를 말했다.

Q)맹인 시인 수르다스는 어떤 신을 찬송했습니까?

토머스가 말했다.

A) 크리슈나


--- 중략 ----


10번 문제(1천만 루피)

 살림과 함께 마만의 마수에서 벗어난 토머스. 하지만 도망쳐 나온 고아 두 명이 몸을 뉘 일 곳이 이도시에는 흔치 않았다. 문득 마만의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닐리마 쿠마리'라는 중년의 배우가 적선을 잘해준다는 것을 떠올린 두 사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무작정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뜬금없는 방문이었지만 마침 하인이 필요했던 닐리마는 토머스를 하인으로 고용한다. 살림은 이슬람교도라 퇴짜를 맞았지만서도. 그래도 닐리마 덕에 두 사람은 인근 집단주택에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닐리마를 수행하며 은퇴한 여배우의 일상을 엿본 토머스는 그녀의 삶이 비록 풍요로울지라도 그렇게 화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면 도도한 자세로 사인을 해주지만 돌아서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잊을까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 얼마나 대중의 관심을 갈구하는지 밤중에 집에 침입한 도둑이 자신의 팬이라며 그녀의 출연작들을 줄줄 읊자 되려 기뻐하며 그에게 차를 대접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머스는 그녀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을 깨닫는다. 웬 수상한 남자가 그녀의 집에 드나들더니 닐리마의 몸에 하나 둘 멍과 상처가 늘어나는 것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자와 영화계 관계자들까지 그녀를 퇴물 취급하자 닐리마는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며 더더욱 어두운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토머스가 저녁 시장에서 돌아온 어느 날. 닐리마는 자신의 침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된다. 1985년 '뭄타즈 마할'이라는 영화로 얻은 여우주연상 트로피와 함께.


 W3B의 스튜디오. 제작진의 의도와는 다르게 지나친 선전을 하는 토머스, 어느새 12개의 문제 중 10번 문제였다. 쉬는 시간, 프로듀서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던 프렘 쿠마르가 토마스에게 다가와 더 이상 도전할 것인지를 묻는다.

 토머스는 이미 백만 루피를 손에 넣었기에 이쯤에서 그만하겠다 말한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프렘 쿠마르는 그가 퀴즈에 더 참여하기를 종용하고 심지어 다음 문제의 정답까지 알려준다. [폴크해협의 길이는 몇km인가? - 137km] 2번 문제에서 받은 진행자의 도움을 떠올린 토머스는 이에 동의하고 스테이지에 오른다.

대중들 앞에서 다음 문제의 도전을 선언하는 토머스. 그리고 교활한 웃음과 함께 프렘 쿠마르가 문제를 낸다.


Q) 비극의 여왕 닐리마 쿠마리는 여우주연상을 언제 받았습니까?

 방금 말해준 문제가 아니었다!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토머스가 진행자를 노려보았지만 프렘 쿠마르는 능글맞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토머스에게 돈을 줄 생각이 없었던 것.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토머스 편이었다.

A) 1985년

순간 넋이 나간 프렘 쿠마르가 자신도 모르게 정답 버튼을 누르고 방청객에서는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11번 문제(1억 루피)

 모진 세상의 풍파에 이리저리 치이다 인도 북부의 도시 아그라까지 흘러들어온 토머스. 외국인들을 상대로 아그라의 명물, 타지마할의 순 엉터리 가이드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심각한 언어장애가 있지만 착한 심성을 가진 고아 '샹카르'와 가정부인 '라즈완티'의 도움을 받아 한 지체 높은 귀족부인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타지마할이 워낙 유명한 관광지인 덕에 부자나라 관광객들을 상대로 가이드를 하는 토머스는 손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하루는 델리에서 온 부자 대학생들의 가이드 노릇을 한 토머스가 손님들과 함께 '그렇고 그런곳'을 찾는다. 이런 장소는 처음이기에 쭈볏대며 발을 들이자 '니타'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그를 맞는다. 능숙한 그녀의 리드에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우리의 토머스는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빠져들고 수차례에 걸친 그의 열렬한 구애에 니타 또한 토머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결국 서로와 미래를 약속하는 두 사람. 하지만 대개의 창부들이 그렇듯이 니타의 일은 그녀가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니타를 데려가려면 40만 루피를 내라는 포주의 말에 토머스는 낙담을 금치 못한다.

 그러던 중 샹카르가 무거운 병에 걸린다. 어느새 샹카르와는 형제처럼 지내던 토머스는 백방으로 뛰어 샹카르가 지역에서 유행하는 광견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내지만 약값이 40만 루피라는 의사의 말에 얄궂은 세상에 대한 원망을 쏟아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샹카르의 옆에서 간병을 하던 토머스는 우연히 샹카르의 어머니가 집주인인 귀족부인 '스와프나 데비'인 것을 알게 된다. 외간 남자와 놀아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폐증이 생긴 샹카르를 별채에 두며 자식임을 숨기고 살았던 것이다. 토머스는 그 길로 스와프나 데비에게 달려가 그녀의 아들을 살려달라 애걸한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치부를 완전히 덮을 기회라 생각한 모진 어머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버린다.

 그리고 다음날. 스와프나 데비가 고관대작들을 모시고 성대한 파티를 하던 때, 수십 시간의 발작 끝에 샹카르는 짧은 생을 마쳤다. '엄마, 엄마!'라고 소리 지르며.

충격에 빠져 며칠간 폐인 생활을 하던 토머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니타가 반 송장이 되어 병원에 있다는 것. 토머스와의 미래를 위해 창부 노릇을 거절한 그녀를 뭄바이에서 온 손님이 무자비하게 폭행했다고 한다. 토머스는 반드시 40만 루피를 구해야겠다 마음먹는다.

 며칠 후, 대담하게도 스와프나 데비의 금고를 털어 40만 루피를 준비한 토머스. 물론 양심의 가책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니타를 사기 위해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토머스를 웬 안경 쓴 사내가 잡아 선다. 광견병에 걸린 자신의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그 돈을 빌려달라는 것. 토머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걸하는 사내의 청을 애써 뿌리치고 포주에게 40만 루피를 내민다. 하지만 즉석에서 포주가 금액을 60만 루피로 올리자 그제야 토머스는 깨닫는다. 니타는 자신이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낙담한 토머스의 눈에 병원 바닥 위를 뒹구는 신문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누가 십억의 주인이 될 것인가?]라는 퀴즈쇼 광고가 담긴 신문지. 그는 쇼가 열리는 뭄바이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복도에는 방금의 안경 쓴 사내가 그대로 서있었다. 체념한 표정의 사내에게 토머스가 돈이 담긴 봉투를 내밀자 남자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꼭 갚을 테니 연락 달라며 자신의 명함을 내밀고 엉겁결에 명함을 챙긴 토머스는 바삐 뭄바이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W3B의 스튜디오. 토머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1억 루피가 걸린 단계에서 모르는 문제를 맞닥뜨린 것.

Q)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코스터드라는 인물은 어디에 나오는가?

 토머스는 고심 끝에 '우정의 힌트' 찬스를 사용하기로 한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주변에 문학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 함정. 난감함에 옷감을 뒤적이던 토머스의 손에 뭔가 잡힌다. 웬 영어교사의 명함이었다.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아그라의 병원에서 만난 그 남자의 명함임을 생각해낸 그는 급히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을 건다.

 수화기 너머 등장한 남자는 연신 고맙다는 말과 함께 힌트를 주지만 확실치는 않은지 말꼬리를 흐린다. 그럼에도 남자를 믿기로 한 토머스. 프렘 쿠마르를 바라보며 정답을 외친다.

A) 사랑의 헛수고


 정답이었다.


13번(?) 문제(10억 루피)

 드디어 마지막 문제에 다다랐다. 토마스에게 다가온 프렘 쿠마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문제는 그가 절대 풀지 못할 거라 장담한다. '두고 보면 알겠지'라는 토머스의 말에 웃으며 자리로 돌아간 진행자는 관객들 앞에서 마지막 문제를 낸다.

Q) 타지마할은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는데 뭄타즈 마할의 아버지의 이름은?

 대학에서 중세사 공부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문제. 무대에 배경음악이 깔리자 낮은 목소리로 프렘 쿠마르가 말한다. 이제 짐 싸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그러자 토머스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답은 아시프 자에요.' 타지마할에서 가이드를 한 그에게는 쉬운 문제였던 것. 통쾌하긴 했지만 토머스의 실수였다. 얼굴이 창백해진 진행자는 즉시 프로듀서에게 달려가더니 문제를 바꿔버린다. 방금 문제는 그저 광고를 위한 가짜였다고 말이다.

 굳은 표정의 토머스는 본체만체하고 프렘 쿠마르가 열세 번째 같은 열두 번째 문제를 낸다

Q)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의 조(調)는 무엇인가?

 이번에는 토머스가 타임을 외칠 시간. 광고가 나가는 도중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토머스를 프렘 쿠마르가 따라나선다. 나란히 서서 소변을 보는 두 사람. 잠자코 프렘 쿠마르의 조롱을 듣던 토머스가 문득 말한다. 자신은 퀴즈쇼가 아닌 복수를 위해서 이 자리에 왔다고.

 순간 당황한 프렘 쿠마르를 권총으로 겨누며 토마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 사실 두 사람은 초면이 아니었다. 토머스가 닐리마 쿠마리의 집에서 목격한 수상한 남자가 바로 프램 쿠마르였던 것. 또한 니타를 잔인하게 폭행한 뭄바이 손님도 바로 그였다. 퀴즈쇼 광고에서 토마스가 본 것은 10억 루피의 상금이 아니라 연인을 해친 프렘 쿠마르의 히죽대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교수형을 당하건 말건 일단 니타와 닐리마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토머스에게 프렘 쿠마르는 벌벌 떨며 마지막 문제의 답을 알려줄 테니 목숨만을 살려달라며 애걸한다.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분노를 끌어모으는 토머스. 니타와 닐리마의 참혹한 모습과 샹카르의 죽음, 살면서 겪은 온갖 굴욕과 상처까지 되새기며 눈앞의 원수를 쏘려 하지만 쏠 수 있어! 쏠 수 있어! 심성이 모질지 못한 토머스는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목숨을 건진 프렘 쿠마르는 고맙다며 그에게 모종의 힌트를 준다. 니타와 살림을 떠올린 그제야 토머스는 10억 루피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다시 무대 위에 오른 두 사람. 토머스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찬스인 '반반씩 찬스'를 사용한다. 그러자 스크린에서 2,4번 선택지가 사라지고 1,3번 선택지만이 남았다. 이제 확률은 반반. 갑자기 주머니에서 행운의 동전을 꺼내 든 토머스가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1번, 뒷면이 나오면 3번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한다.(방송을 아는 사람이다.) 동전이 허공을 향해 던져지자 수많은 방청객들의 눈이 동전을 향해 집중됐다. 책상 위에 떨어진 동전이 몇 번 빙글빙글 돌다 넘어졌다. 앞면이었다. 1번 답을 선택하는 토머스.

 북소리가 커지더니 스크린에 '정답'이라는 글자가 번쩍거렸다. 도시의 빈민이던 토머스가 10억 루피의 주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프로듀서가 무대 위로 올라와 프렘 쿠마르를 데려가고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곤 영문도 모른 체 경찰서로 끌려가 샌드백 신세가 되는 토머스. 여기까지가 DVD에 촬영된 내용이었다.


 길고 길었던 DVD를 끈 스미타와 토머스가 서로를 바라본다.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토머스에게 스미타도 비밀 하나를 털어놓는다. 자신이 바로 토머스가 구해주었던 '구디야'라는 것과(3번 문제 참고). 난간에서 떨어진 자신의 아버지는 다리만 부러졌을 뿐 무사하며 어제 신문에서 토머스가 구속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경찰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는 것을 말이다.


 육 개월 후. 스미타의 변호로 토머스는 경찰의 손에서 완전히 풀려난다. W3B회사는 그에게 상금을 마지못해 주곤 파산했으며 프렘 쿠마르는 차 안에서 숨진 체 발견된다. 살림은 꿈에 그리던 영화배우가 되었고 니타는 토마스의 부인이 되었다. 발리우드식 해피엔딩.


  어느 날 스미타와 함께 걷던 토머스가 마지막 비밀 하나를 꺼내 놓는다. 그가 종종 자신의 운명을 걸곤 했던 일루 피 짜리 행운의 동전에 대한 비밀. 동전을 건네받은 스미타가 동전을 이리저리 살피다 놀란다. 동전의 양면이 모두 앞면이었던 것. 동전을 던져 결정한 그의 선택들은 사실 전부 운이 아닌 토머스의 의지였던 것이다.

동전을 돌려받은 그는 이내 동전을 바다 위로 던져버린다. 왜 행운의 동전을 버리냐는 스미타를 돌아보며 토머스가 말한다.


"이젠 더이상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행운은 내면에서 오는 것이니까요."(449P)




 2005년 발표된 비카스 스와루프의 소설과 2008년 출시된 대니 보일 감독의 동명의 영화는 구성은 유사하지만 등장인물의 이야기와 퀴즈 내용 등은 아예 다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가 크다. 한번 알아보자.


1. 람 모하마드 토머스 : 인도의 종교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주인공의 이름이 영화에서는 '자말 말릭'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토머스는 천애고아이지만 말릭은 폭도로 돌변한 힌두교도들에게 어머니를 잃고 형인 '살림'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직업도 서로 다른데 토머스는 퀴즈쇼에서 자신을 식당 웨이터라 소개하지만 말릭은 콜센터에서 차를 나르는 심부름꾼이다.

 소설에서 토머스의 친한 동생인 살림이 영화에서는 말릭의 형으로 등장하는데 소설에서의 살림의 특징을 말릭에게 일부 차용한 것이 눈에 띈다. 영화배우의 광팬이라던지 부모가 힌두교도에게 살해당한다던지 마만에게 큰일을 당할 뻔한다던지.


2. 살림 : 토머스의 피붙이보다 소중한 동생인 살림이 영화에서는 애증의 피붙이이자 주인공의 형으로 등장한다. 사실상 이름만 가져다 쓴 새로운 인물로 봐야 하는데 극의 주요 빌런인 자베드의 밑에서 일하다 히로인인 라티카와 말릭이 다시 이어지는데 도움을 주고 사망한다.


3. 스미타 : 토머스의 구원자이자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스미타가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퀴즈쇼 진행자의 신고로 말릭을 잡아다 고문하던 경찰관이 말릭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해를 풀고 그를 놓아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4. 여자 친구 : 소설에서는 '니타'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등장해 토머스의 마음을 훔치지만 영화에서는 '라티카'라는 히로인이 등장한다. 니타는 토머스가 아그라에서 일할적 만나게 되는 매춘부지만 라티카는 자말 형제의 소꿉친구이자 형제를 연적으로 만드는 매력의 소유자.

 영화에서는 말릭이 라티카를 찾아 헤매는 여정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았지만 소설은 주인공인 토머스의 인생 이야기, 그러니까 일 루피짜리 행운의 동전으로 대표되는 그의 삶에 대한 신념과 선택의 이야기가 중심이다.(니타는 소설의 거의 3/4 지점에 등장한다.)


5. 퀴즈쇼 : 소설에서는 W3B라는 제목의 10억 루피가 걸린 퀴즈쇼가 배경이지만 영화에서는 'who want be a millionaire?'라는 쇼가 배경이다. 퀴즈쇼에서 출제되는 문제가 서로 크게 다르며 W3B는 쇼의 첫 출연자가 토머스인 탓에 시작하자마자 문을 닫는 신세가 되었지만, 제법 오래된 쇼로 묘사되는 영화에서는 연락이 끊겼던 말릭과 니타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장치로 작동한다.



 

 발간되자마자 상이란 상을 전부 휩쓸고 프랑스어, 독일어, 이태리어 등 32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이 소설은 의외로 작가인 비카스 스와프루의 데뷔작이다. 펜을 잡은 지 겨우 2달 만에(난 브런치 글을 몇 달 만에 쓰는데) 집필한 작품이라고 한다. 빈부격차, 종교 갈등, 불안한 치안과 아동학대 등 인도의 각종 사회문제를 퀴즈쇼라는 장치로 풀어낸 작가의 참신함과 짧은 시간에 쓰인 데뷔작이라 보기 힘든 흡인력까지, 상을 많이 받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퀴즈쇼가 주요 배경인 이야기답게 이 소설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마만에게서 도망을 칠 것인지, 1억 루피가 걸린 문제에서 잠깐 얼굴 본 것이 전부인 사내의 조언을 들을 것인지, 10억 루피가 걸린 문제에서 원수가 준 힌트를 믿을지 등등 인생의 갈림길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선택해나가는 주인공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러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토머스는 주머니에서 일 루피 동전 하나를 꺼내어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곤 한다. 하지만 이 동전은 양면이 모두 앞면인 답정너 동전. 토머스에게 동전을 던진다는 것은 요행에 선택을 맡기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선택한 답을 타인들에게, 그리고 그 자신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의식에 불과한 것이다.  

  

 흔히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한다.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영화는 어떤 것을 볼까?' 하는 사소한 선택부터 어느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맞을지 등의 중요한 선택까지. 인생 순간순간의 선택이 쌓여 지금의 우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중요한 선택을 앞둔 사람들은 그 부담감에 종종 미신이나 점괘에 기대곤 한다. 선택이라는 행위의 중압감과 그것이 틀렸을 때의 후회를 덜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미신에 의지하건 결정을 내리는 것은 자신이며 그에 대한 보상과 대가도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스스로를 믿고 과감하게 선택지를 뽑는 것이 어떨까. 정히 어렵다면 우리도 답정너 동전을 하나 만들어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강사가 '나는 문제를 찍어도 틀리고, 처음 점찍은 답을 바꿔도 틀린다'라는 수험생의 푸념에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여러분이 문제를 딱 보고 생각해낸 그 답. 그게 바로 정답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였는가? 사소한 선택이었는지도, 중요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분이 진정 마음속에서 우러난 선택을 하였다면 분명 옳은 선택을 했으리라 확신한다.


행운은 다른 곳이 아닌 내면에서 오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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