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호랑이와 바다의 이야기
- 영화와 소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대략 10여 년 전,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 파주 인근의 훈련소에서 한 달여간의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군대 생활에 관한 시트콤이나 예능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오듯이 고된 군 복무, 그중에서도 훈련소 생활은 종교가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종교시설의 문턱을 넘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연병장에서는 '저게 나랑 같은 인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악랄한 조교가 종교 행사장 안에서는 독실한 종교인으로 탈바꿈해 온누리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외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대부분은 훈련소에서 접하기 힘든 **파이 등의 스낵류와 온건한 성격의 사제들이 부여하는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러 온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조교들도 교회나 성당 안에서의 얼차려는 지양하는 편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적엔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몇 년간 다니긴 했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난 후로는 종교와는 담을 쌓고 지낸 나였다. 하지만 **파이의 달콤한 맛은 고난한 훈련소 생활에서 차마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고, 어느새 나는 20년간 거부하던 세례를 훈련소에 입소한 지 단 몇 주만에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쩌랴 내친김에 다른 종교행사에도 참여하기로 한 나는 곧바로 불교 행사에서는 수계를, 천주교 행사에서는 영세를 받기에 이르는데 같은 생활관에 있던 훈련소 동기가 그런 나를 보고 '너는 도대체 종교가 뭐냐?'라고 묻기도 했다.
그 질문에 '나를 지켜주는 신이 많으면 좋은 거 아니야?'라며 대답한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던 그 친구의 얼굴이 기억난다.
이런 나의 가치관 때문이었을까. 힌두교와 기독교에다 이슬람교까지, 세상의 종교라는 종교, 신이란 신은 모두 편견(?) 없이 받아들이며 그저 신을 사랑하고 싶다는 한 소년의 말이 모순적인 궤변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늘의 이야기는 벵골호랑이 한 마리와 함께 쪽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넌 소년의 이야기, 신과 종교를 사랑하는 소년의 이야기, 캐나다의 작가 얀 마텔의 맨부커상 수상작이자 이안 감독의 동명 영화의 원작, 파이 이야기(life of pi)다.
글 쓰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렵게 세상에 내놓은 소설이 크게 성공할 수도 있지만 대개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인도 폰디체리의 한 카페에 앉아 더위를 식히는 한 캐나다 작가 또한 얼마 전 쓰린 실패를 겪은 참이었다.
재충전을 위해 인도까지 날아와 커피 한잔을 홀짝이는 외지인에게 마을 주민들이 관심이 많다. 그를 유심히 살피던 한 백발의 노신사가 그에게 말을 걸자 캐나다에서 온 작가는 스스럼없이 캐나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야기가 끝나고 작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쯤 노신사가 그에게 말한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젊은이는 신을 믿게 될 거요."
소설의 소재를 찾던 작가는 관심을 보이고 노신사는 신비한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의 이름을 알려준다. 그 사람이 살고 있다는 토론토로 돌아가 이야기의 주인공을 찾는 작가. 어렵게 연결된 전화에 "아주 오래전 일인데요."라고 말하면서도 작가를 만나주는 주인공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피신 몰리토 파텔, 프랑스 파리 최고의 수영장 '피신 몰리토'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소년. 인도 폰디체리에서 대규모 동물원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피신은 좋게 말하면 특이한, 나쁘게 말하면 괴짜인 소년이었다.
학우들이 '피신'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피싱(pissing, 소변을 보는)으로 바꾸어 부르며 놀리자 수업시간에 홀로 칠판 앞으로가 원주율 π를 그리며 자신을 '파이 파텔'이라 부르라고 선언하거나, 아침에는 예수에게 기도하고 점심에는 메카를 향해 절하다가 저녁에는 인도인답게 힌두교의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기행을 일삼는 아이였다. 세 개의 종교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에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라며 모두의 어안이 벙벙해지도록 만드는 재주 또한 지녔다.
사려 깊은 소년의 부모님조차 소년의 종교관을 잠시 스쳐가는 사춘기 방황 정도로 치부하였지만 신에 대한 소년의 사랑은 점차 그의 마음에 더욱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인도 내 정치상황이 혼란에 빠지고 가족들과 동물원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던 파이의 아버지는 중대 결정을 한다. 바로 인도를 떠나 캐나다로 이주하는 것. "콜럼버스처럼 떠나자"는 아버지의 말에 "콜럼버스는 인도를 찾아서 항해했는데요" 라며 핀잔을 주는 파이의 서운함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동물원 이주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1977년 6월 21일. 노아의 방주마냥 수많은 사람과 짐승을 실은 일본 화물선 '침춤호'가 마드라스를 출발했다.
그리고 배가 가라앉았다. 폭풍우 치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구명보트 위에 짐승 몇 마리와 소년 하나만을 두고.
빗줄기가 잦아들고 정신을 차린 파이. 소년의 눈앞에는 다리가 부러진 채 낑낑대는 얼룩말과 바나나 뭉치를 타고 보트로 건너온 오랑우탄, 혐오스러운 하이에나 한 마리와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의 250kg짜리 벵골호랑이가 함께 올라탄 구명보트가 보였다.
사는 곳도 먹는 것도 제각각인 짐승들이 자그마한 보트 위에서 서로 어울려 살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하다. 흉측한 하이에나의 이빨 앞에 얼룩말과 오랑우탄이 차례로 희생당한 뒤 하이에나 또한 리처드 파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제 보트 위에는 말라빠진 채식주의자 인도 소년과 거대한 벵골호랑이 둘만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파이에게는 광막한 태평양 한가운데서 살아남아야 하는,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숙제가 주어진다. 말 그대로 한배를 탄 고양잇과 맹수는 덤이다.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망망대해에서 목마르고 굶주린 호랑이와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구전을 펼쳐 호랑이를 고사시킬까 고민하는 파이. 하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던 소년은 결국 마음을 바꿔 그와 함께 태평양에 맞서는 것을 택한다.
중국집 아들은 짜장면을 못한다지만 폰디체리 동물원네 아들은 조련가로서 재능이 있었다. 타고난 낙천적 성격과 슬기로움으로 호랑이를 훈련시키는 파이. 자신에게 밥 주는 사람도 못 알아보는 리처트 파커의 펀치에 몇 번이나 수면으로 나동그라지면서도 소년은 조금씩 조금씩 호랑이를 훈련시켜 갔다. 그리고 파이는 호랑이와의 줄다리기를 통해 이 역경 안에서도 살아가려는 의지를 놓지 않는다.
여러분에게 비밀을 털어놓겠다. 마음 한편으로 리처드 파커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207p)
하지만 호랑이와는 달리 태평양은 그에게 조련될만한 것이 아니었다. 거센 풍랑으로 물자를 보관해 놓은 뗏목까지 잃은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죽어가고 있었다.
극심한 영양실조로 파이는 정신이 흐려지고 눈앞이 갑작스레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꿈인지 생시인지 환각인지 모를 세상에서 리처드 파커와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자신과 같이 조난을 당한 이를 만난다. 프랑스 억양을 쓰는 그는 공교롭게도 파이처럼 눈이 멀었다. 동질감에 그를 '형제'라 부르는 파이.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망망대해에 조난된 형제와 짧고 맥락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파이는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발을 잘못 디딘 그를 방수포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리처트 파커가 맹렬하게 덮친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형제의 몸은 갈가리 찢기고 그의 비명에 파이가 전율한다.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아야 하는 법. 파이는 형제가 타고 온 보트에서 음식과 물을 찾아다 입에 털어 넣고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
바다 위의 형제 덕에 시력을 회복한 파이 앞에 괴상한 녹색섬 하나가 나타난다. 아직 눈이 회복이 덜되었나 보다 하고 눈만 껌벅이는 파이. 몇 번을 눈을 비벼도 그 섬이 사라지지 않자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섬에 발을 내딛는다.
신비한 섬이었다. 흙이라고는 전혀 없고 온통 해초 같은 풀과 그위에 서있는 나무들로 이루어진 곳. 섬안에는 수십만 마리의 미어캣이 뛰놀고 깨끗한 담수가 솟아오르는 연못이 여럿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랫동안 바다에 부대낀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각자 해초와 미어캣으로 양껏 배를 채우며 힘을 되찾는다.
어느새 섬 생활에 적응해가는 파이와는 달리 리처드 파커는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이 섬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안절부절못하는 호랑이는 보트에 내버려 둔 파이는 미어캣들과 나무 위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저녁. 소란스러운 미어캣들의 움직임에 잠이 깬 파이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나무 아래 연못에서 온갖 종류의 죽은 물고기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동이 트자 나무에서 내려와 살펴본 연못은 거짓말처럼 텅 비어 있었다. 서서히 섬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 파이는 며칠 뒤 우연히 눈에띈 과일 안에서 사람의 치아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치아 32개가 각기 열매처럼 매달린 나무를 보며 공포에 휩싸인 파이. 결국 안식처라 생각했던 섬이 해가 지면 생명을 집어삼키는 식충 섬임을 깨달은 파이는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침이 밝을 즈음, 나는 암울한 결정을 내렸다. 이 살인마 같은 섬에서 육체는 편하고 정신은 죽은 쓸쓸한 반쪽 인생을 사느니, 내 삶을 찾아서 여길 떠나 죽는 편이 낫겠다고.(351p)
리처드 파커와 함께 배에 올라 죽음과도 같은 항해를 다시 시작하는 소년. 바다는 거칠고 하늘은 잿빛이었다.
보트가 멕시코 해안에 다다랐다. 너무나 지쳐 모래사장에 쓰러진 파이 위를 리처드 파커가 무심하게 뛰어넘었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몇 차례 넘어지면서도 호랑이는 똑바로 해안가 밀림을 향한다. 리처드 파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파이는 그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려 마지막 인사를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고통스럽고 끔찍하고 무서운 바다를 함께 이겨낸 사이니까.
하지만 맹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저 배고픔에 반응할 뿐이다. 맹수인 리처드 파커는 마지막 인사일랑 접어두고 밀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 파이의 삶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다.
다시 토론토. 우리의 주인공 파이를 만나 그의 신비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캐나다 작가는 침춤호의 침몰 원인을 조사했던 일본선박회사의 조사관 오카모토 씨로부터 몇 가지 자료를 건네받는다. 바로 침춤호 침몰에 대한 파이의 이야기가 담긴 녹취테이프와 보고서. 녹취록에는 침춤호의 원인을 찾기 위해 오카모토 씨와 그의 부하직원 치바 씨가 파이를 만나 나눈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녹취에 따르면 일본인 조사관들은 파이의 이야기를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배의 침몰 원인은 고사하고 파이의 생존기가 현실적이지 않아 윗선에 보고하기 어려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태평양 한가운데서 살아남았데?"라고 묻는 상사에게 "아 호랑이랑 살면서 거북이를 잡아먹고살았다는데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절박한 말투로 '현실을 반영하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일본인들을 보며 고민하던 파이는 좀 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물들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 침춤호에서 살아남은 네 명의 사람이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이야기. 그 와중에 어머니마저 잃은 파이가 악귀가 되어 홀로 살아남은 이야기를 말이다.
충격에 휩싸인 일본인들에게 파이가 아리송한 질문을 던진다.
"두 이야기 다 침춤호의 침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어요... 두 분은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고,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지 증명할 수 없어요.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요... 두 이야기 다 배가 가라앉고, 내 가족 전부가 죽고, 나는 고생하지요... 그럼 말해보세요. 어느 이야기가 사실이든 여러분으로선 상관없고, 또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 증명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묻는데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요?"(394p)
일본인 조사관들은 파이의 질문에 '무슨 말하는 거냐'며 의아해하면서도 결국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를 택한다. 조사를 마친 오카모토 씨는 파이와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사에 보낸다. 그리고 그 보고서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유일한 생존자는 침춤호의 침몰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주지 못했다... 유일한
생존자인 인도인 피신 몰리토 파텔의 사연은 이를 데 없이 힘들고 비극적인
상황에서 용기와 인내를 보여준 놀라운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는 난파선 역사상어느사건과도 견줄 수 없다. 파텔만큼 오래 생존한 조난자는 없었다.
더구나 벵골 호랑이와 함께 생존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좋은 작품과 좋은 감독이 만나서일까.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프 파이'는 여러 영화 애호가들에게 소위 인생영화로 꼽히곤 한다. 종교와 삶에 대한 원작의 시선을 스크린 안으로 잘 끌어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특수효과 회사가 망할 정도의) 아름다운 특수효과를 입힘으로서 흥행과 평론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작품으로 원작을 재해석하는 등의 사족을 붙이지 않고 최소한의 변형만 가해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종교적 철학이 담긴 400페이지짜리 장편소설을 영상화하느라 몇 가지 바뀐 부분도 있는데 간단히 살펴보자
1. 호랑이 : 영화에서는 호랑이라곤 리처드 파커밖에 나오지 않지만 소설에서는 '마히샤'라는 이름의 호랑이가 한 마리 더 등장한다. 파이의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맹수의 위험함을 보여주려 호랑이로 하여금 염소를 사냥케 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데 영화에서는 순진한 파이가 철창 안의 리처드 파커에게 먹이를 주려다 아버지에게 비슷한 훈육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담으로 이 장면에서 리처드 파커는 분명 철창밖에 묶인 염소를 공격하지만 무슨 용빼는 재주를 가졌는지는 몰라도 다음 장면에서는 염소가 철창 안으로 들어가 있다.)
또한 원작에서는 바다에서 표류하는 파이의 독백이 많이 서술되는 반면 영화에서는 매체의 특성상 호랑이와 파이가 서로 투닥대는 장면이 많다.
2. 맹인 표류자 : 프랑스 말씨를 쓰는 맹인의 이야기가 영화에서는 삭제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바다 위에서 조우한 맹인을 리처드 파커가 살해하고 그의 식량을 취한 파이가 기사회생했다는 이야기인데, 파이가 프랑스인 요리사를 살해하였다는 강력한 은유로 해석되기도 하는 에피소드이다. 소설의 상당히 난해한 묘사에 러닝타임 관계도 있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3. 여자친구 : 영화에서는 파이가 인도를 떠나기 전 '아난디'라는 여자친구를 만나 짧은 연애를 하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소설에서는 그런 거 없다.
4. 톤 다운 : 전반적으로 소설의 잔혹한 묘사가 영화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고기나 거북을 사냥하여 먹는 내용이나 보트 안에 널브러진 하이에나, 오랑우탄 사체의 묘사, 프랑스인 요리사를 살해하고 그의 장기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맛이 좋던데요'라고 덤덤하게 술회하는 파이의 이야기들을 많이 순화해서 표현해 놓았다. 소설을 그대로 옮겨놓았다간 고어 영화로 분류될 수 있으니 적당히 톤 다운한 것으로 보인다.
'인셉션'이라는 영화가 있다. 2010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작품으로 꿈속을 배경으로 하는 특이한 설정과 치밀한 플롯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수작이다. 인셉션을 통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많았지만 관객들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갑론을박하는 것은 바로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드디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 주인공이 테이블 위에 튕겨놓은 팽이가 멈추었느냐 안 멈추었느냐 일 것이다.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주인공의 여정에서 그가 서있는 이 장소가 말 그대로 '꿈인지 생시인지'를 판별하는 방법은 바로 팽이를 돌리는 것이다. 팽이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면 꿈속, 물리법칙을 따라 결국 쓰러지면 현실 속에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팽이가 쓰러질락 말락 할 때 내려오는 엔딩크레딧에 많은 관객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그가 과연 현실로 돌아온 것이 맞는지에 대한 오랜 논쟁이 있었다.
얀 마텔의 책을 덮은 사람도,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극장을 나오는 사람도 아마 비슷한 소감을 말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이야기가 진짜야?'라고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호랑이와 200일 넘게 태평양을 표류하는 게 말이 되냐며 파이가 일본인들에게 들려준 '현실적인 이야기'를 진짜라고 택할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또 아닐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짜일까?
사람은 바깥세상을 바라볼 때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닌 본인만의 프레임을 통해 형성된(혹은 왜곡된) 세상을 본다고 한다. 매일 아침 동쪽에서 뜨는 해를 바라보며 물리학자는 지구의 자전에 의한 태양의 위상 변화 떠올리고 신학자는 오늘도 변함없이 발휘되는 신의 권능을 떠올리는 식으로 말이다.
미국의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은 자신의 멋진 책 '엔드 오브 타임'에서 힌두교에 감화된 형과의 일화를 소개한다.
베다(힌두교 경전)에는 자연에서 패턴을 찾고, 설명을 원하고, 생존을 위해 싸워온 인간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어서, 삶의 지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나는 가끔씩 형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베다의 목적이 '수시로 변하는 현실 속에서 안정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찾는 것'임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물리학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똑같은 답을 제시했을 것이다. (엔드 오브 타임 [와이즈베리] 291p)
공통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없을 것 같은 물리학과 힌두교의 목적이 같다니?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철학과 종교와 과학은 세상 만물의 이치를 설명하려는 옛사람들의 노력에서 탄생했다. 기원이 같으니 목적이 같은 것이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종교와 과학, 혹은 종교와 이성의 차이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바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설명과정이 그것일 것이다.
영화에서 파이는 일본인 직원들에게 그리고 캐나다 작가에게 두 가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리처트 파커와 함께 몇 개월을 바다 위에서 표류한 신비한 이야기와 요리사에게 어머니가 살해당한 끔찍한 이야기. 그리고는 캐나다 작가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두 가지 스토리 모두에서 배가 침몰하고 가족이 죽고 나는 고통받지요. 어떤 이야기가 맘에 들어요? "
그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작가는 말한다. "호랑이 이야기요. 더 흥미롭거든요."
그러자 파이가 말한다. "신의 존재도 믿음의 문제죠."
결국 파이의 구명보트에 벵골호랑이가 있었냐 없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호랑이는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슈뢰딩거의 호랑이?) 혹자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파이의 표정을 보며 호랑이는 없었을 것이라 말하겠지만 리처드 파커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하며 파이가 흘리는 아쉬움의 눈물 또한 진심이다.
또한 일본인 조사관들에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주기에 앞서 가진 파이의 긴 침묵은 어떻게 보면 피곤한 자신을 들볶는 조사관들을 만족시킬 '현실적인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꾸며내기 위한 시간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호랑이가 있었느냐'는 질문은 이렇게 보면 호랑이가 있고 저렇게 보면 호랑이가 없는, 결론이 나지 않는 질문인 것이다. 마치 쓰러졌는지 안 쓰러졌는지 모를 팽이처럼 말이다.
결국 '어느 이야기가 진짜냐?'라는 질문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연을 서술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는가?'가 얀 마텔이 독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 아닐까?
몇 년 전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는 한국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온몸에 아로새겨진 분이었다. 어릴 적 일본 순사에게 배웠다는 가요를 팔순잔치에서 부르기도 하고 전쟁통에 생이별한 이북의 가족들을 그리워하시기도 하던분이었는데 곡절이 많은 삶을 사셔서 그런지 신앙심이 무척 두터웠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때에도 자신은 하나님 곁에 가기에 두렵지가 않다고 말씀하실정도로.
그런 할머니의 유골함을 안고 장지로 가던 날 이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이제 우리 할머니에게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라는 생각. 철저한 무의 세계가 있을 수도 있고 할머니가 평생을 따른 신이 있는 세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평소 일체의 종교를 부정하는 나이지만 그날만큼은 신이 존재하여 우리 할머니를 품에 안기를 바랐다. 이제 할머니는 떠나셨고 사후의 세계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쪽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라이킷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