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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네 Apr 12. 2022

사람의 아이들(칠드런 오브 맨)

아이들이 사라진 세상

출처 : 네이버 책

    - 소설과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어난 지 6개월이 된 나의 아들을 안고 산책을 나갈 때면 감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동네 어르신들의 관심. 자주 산책을 다니는 공원이 어르신들도 많이 찾는 곳이라 내 품에 안긴 아기를 본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속사포 같은 질문세례를 쏟아내곤 한다.

'몇 개월이에요?', '남자아이예요?', '아이고 너무 예쁘다.'등등. 그리곤 이런 이야기를 꼭 뒤에 붙이신다.


'요새는 애들 보기가 너무 힘들어'


 나날이 낮아져만 가는 출산율 덕에 거리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찾기가 힘들게 된 지 오래다. 대신 어르신들의 희끄무레한 뒷모습만이 점점 늘어가는 게 현실인데 이러다 정말 아기라는 존재가 멸종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들게 한다. 그래서일까 아이라는 존재가 멸종된, 작금의 한국과 꼭 닮은 가상의 영국을 그린 이 작품이 내게는 신기함보다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오늘의 이야기는 SF소설이지만 우리에게는 반 현실로 다가온 이야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동명 영화의 원작, P.D.제임스의 사람의 아이들(The children of men)이다.




 2021년 1월 1일 금요일. 자정을 몇 분 넘긴 시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술집에서 소동이 일어나 지구 상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태어난 청년 '호세 리카르도'가 숨을 거두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린 그의 죽음을 라디오 뉴스 진행자가 짤막하게 전하고 그 소식을 들은 한 남자는 오늘도 펜을 들어 일기를 쓴다.


 남자의 이름은 '테오 페이런'. 옥스퍼드에서 역사를 강의하는 교수이자 현 잉글랜드 총통인 '잰 라이피어트'의 사촌이다. 그는 매사에 냉소적이며 남들과 거리를 두려 하는 백면서생 같은 남자이자, 한때 결혼해 딸이 있었으나 운전 부주의로 딸을 치어 사망케 하고 그로 말미암은 아내와의 관계 파탄에도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가 살아가는 세상은 인류가 신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세상. 그 사형선고라 함은 1995년부터 지속된 인류의 불임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호적상 인류의 막내인 호세 리카르도 이후 단 한 명의 아이도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인류의 멸종이 기정사실이 된 것.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죽을 것을 알지만 그 사실을 잊으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죽음을 계속하여 상기하다간 평생 비명만 지르다 죽어야 할 테니.


 그러나 책에서만 보던 '멸종'이라는 대사건이 100년 내 도래할 것이 확실해지자 인류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태와 우울감에 빠져들고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 그리고 이때 국민들의 삶에 대한 무관심을 틈타 잉글랜드의 총통이 된 잰 라이피어트가 강력한 철권통치를 펼쳐 무질서한 공포 대신 강압적이지만 질서 있는 안락사를 국민에게 선물한다.


 그러던 중 테오에게 '줄리언'이라는 여성이 접근해 그의 도움을 청한다. 영국을 잰의 손아귀에서 구하기 위한 자신들의 계획에 동참해 달라는 것. 남과 엮이기 싫어하는 테오지만 그녀에 대한 은밀한 호감과 정부가 저지르는 영국판 고려장을 목격하곤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한다.


 스스로를 '다섯 마리 물고기'라 칭하는 줄리언의 조직은 그러나 허접스러운 데가 있었다.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인 데다 각각 꿈꾸는 이상 또한 달랐던 것.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정부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도주에 함께 하게 된 테오는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바로 줄리언이 임신을 하고 있었던 것. 세상을 뒤집을 이 사건을 곧장 총통에게 알리고 병원에 가자는 테오의 말에 줄리언은 죽어도 잰에게 아이를 줄 수는 없다며 버티고 도주극은 계속된다.


 대원이 한두 명씩 리타이어 하며 이제 테오와 줄리언 그리고 조산사인 미리엄만이 남았다. 결국 교외의 작은 헛간에서 남자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새 생명의 탄생에 전율하는 세 사람.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어느샌가 그들을 뒤쫓아온 총통 일행에게 미리엄마저 목숨을 잃고 테오는 헛간 밖에 홀로 서있던 총통과 마주한다.


  아기가 자신의 손에 엄청난 권력을 가져다줄 것이라며 흥분해 마지않는 잰. 그러나 아기와 줄리언을 넘기라는 총통의 요구를 테오가 단호히 거절한다. 결국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서로의 총구가 불을 뿜고 살아남은 것은 테오였다. 그는 재빨리 잰의 손가락에서 총통의 상징인 반지를 빼내어 자신의 손에 끼운다. 이제 잰은 죽었고 총통의 상징인 반지는 테오의 것이며 세상을 구원할 아기 또한 그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었다.


 잰과 동행했던 평의회 위원들과 병사들이 숲에서 걸어 나오자 테오는 그들을 헛간 안으로 인도한다. 아기 예수를 영접하는 동방박사처럼 줄리언의 아이를 바라보던 평의회 의원이 말한다.


"이렇게 또 시작되는군요."(412P)


그리고 테오 또한 생각했다.


'이렇게 또 시작된다. 질투와 배신과 폭력과 살인과 내 손에 낀 이 반지와 함께'(412P)


전과는 또 다른, 오히려 더 강력한 권력의 독재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소설과 영화가 10여 년의 간극이 있어서인지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영국이라는 배경, 불임 사태라는 시대설정 외에는 같은 점이 거의 없다. 한번 살펴보자.


1. 테오 페이런 : 원작과 소설의 주인공이 이름은 같지만 성향은 아예 다른 사람으로 그려진다. 소설에서의 테오는 옥스퍼드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잉글랜드 총통의 사촌인 권력집단의 일원. 매사에 비관적이고 남들과 거리를 두려 하며 자신의 실수로 인한 딸아이의 죽음과 그로 인한 아내와의 이별도 '내 책임이 아닌 척할 수 없겠다'식으로 받아들이는 무매력의 사나이다. 반면 영화에서는 저항운동가 출신의 공무원이라는 설정이며 재스퍼라는 막역한 친구도 있는 데다 이혼한 아내와도 나름 사이가 좋다.

 또한 소설에서는 잰을 살해한 테오가 총통의 반지를 취하며 자기 자신과 줄리언이 그렇게 싫어하던 잉글랜드의 독재자로 변화하는 모습이 나타나지만 영화에서는 새 생명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 다섯 마리 물고기 : 원작에서 5명의 남녀가 모여 만든 반체제 단체 '5마리 물고기'가 영화에서는 제법 큰 규모를 가진 '피시당(fishes)'이라는 무장단체로 묘사된다. 소설에서도 묘사된 이민자에 대한 정부의 핍박에 대항해 조직된 단체이며 루크와 미리엄 등 익숙한 이름들도 포함돼있다.


3. 빌런 : 극 중 최종 빌런이자 잉글랜드의 총통, 잰 라이피어트가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강압적인 통치를 펼치는 영국 정부와 반군인 피시당이 주인공과의 주요 갈등 대상으로 묘사된다.


4. 오메가 : 원작에서 1995년, 그러니까 불임 사태 직전에 태어나 인류의 마지막 세대가 될 사고뭉치 세대 '오메가'가 영화에서는 묘사되지 않는다. 대신 인류 중 가장 어린 사람 '디에고'가 18세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서두에 나오며 온세계인이 그의 죽음에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소설에서는 인류 최연소자인 25세의 호세 리카르도가 죽었다는 뉴스가 무미건조한 두문장으로 짤막하게 보도되는 것으로 나온다.


5. 엄마와 아기 : 원작에서는 '5마리 물고기'의 일원인 줄리언이 아들을 낳지만 영화에서는 '키'라는 흑인 여성이 딸을 낳는다. 영국 정부와 불법 이민자들의 갈등이 주요 소재인 영화에서 약자 중 약자라 할 수 있는 '흑인'이면서 '여성'인 아기가 역설적으로 온 세상의 우러름과 축복을 받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주는데 작품의 주제의식에 맞는 적절한 변경으로 보인다.


6. 배경 : 소설에서는 작중 배경이 2021년의 영국으로 묘사된다. 영화에서는 좀 더 시간을 미뤄서 2027년의 영국이 배경이며 영국 이외의 국가는 모두 정부 시스템이 붕괴된 탓에 이민자 문제가 소설의 그것보다 더 부각되어 나타난다.


 여담으로 2013년 발매된 플레이스테이션의 명작,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가 이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 하나의 눈에 띄는 점이다. 여러 가지 설정을 차용했는데 모종의 재난으로 반쯤 망한 세상, 강압적인 정부와 반군의 등장, 망해버린 세상을 바꿀 키를 쥔 소녀와 그녀를 부탁받은 남자의 여정이라는 이야기까지 꽤 닮은 부분이 많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팬'이라면 이 '칠드런 오브 맨'이라는 소설과 영화를 찾아서 보는 것도 퍽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물리법칙의 제약을 벗어던지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마구 비틀고 휘저어 현실의 속살을 내비치게 만드는 것이 SF의 매력이다. 극한의 상황을 맞은 인간군상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인간 내면의 사랑, 증오, 공포, 삶에 대한 의지 등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SF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팔자가 기구하기 짝이 없다. 난데없이 지구를 향해 혜성이 날아온다던지(아마겟돈) 광막한 우주 밖으로 내던져진다던지(그래비티) 외딴 행성에 홀로 남겨진다던지(마션).


 그런 점에서 보면 인류 전체가 불임이 되어 서서히 종말을 맞는다는 이 소설의 설정은 대단히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은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패배감, 상실감, 무력감은 또 다른 의미의 의기의식으로 독자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 이야기는 안락사를 선고받은 인류를 빌어 권력이란 주제를 말하고픈 작품으로 보인다. 보면 권력이란 참 희한한 것이다. 부패한 권력자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권력을 잡아야 하지만 권력을 잡는 순간 타락하게 되는 양날의 검과 같은 것.


 작중에서 테오는 잰의 권력을 탐하는 다섯 마리 물고기의 리더 롤프와 이런 대화를 한다.


"그럼 맨섬의 평화 유지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겠군요?"
"당장 우선순위에 넣지는 않을 겁니다... 그 문제는 알아서 해결될 거예요."
"놀랍게도 잰의 생각과 똑같군요."
...
"콰이터스는 어쩔 생각입니까?"
"사람들이 알아서 가장 편한 방법으로 자살하겠다는데, 내가 굳이 그 자유를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잉글랜드 총통이 들었다면 고개를 주억거릴 생각입니다."(288P)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잰을 쓰러트리고 그의 반지를 손에 넣은 테오는 절대반지를 손가락에 끼운 마냥 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잰의 권력을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틀어쥐었다. 아니 잰의 권력 이상이었다... 반드시 없애야 할 악습이 많았다. 그러나 전부 순서가 있었다... 혹시 이게 잰이 깨달았던 이치였을까? 또 잰이 날마다 중독되었던 권력의 맛이 이런 걸까?... 테오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려다 잠시 멈추고 다시 꼈다. 이 반지가 필요할지, 얼마 동안 필요할지는 나중에 결정해도 된다.(413P)


 총통의 반지로 대표되는 권력의 유혹과 그것을 손에 넣었을 때의 타락을 롤프와 테오 모두 이겨내지 못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작가인 P.D. 제임스는 권력의 단맛 앞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점이 인류가 수천 년간 피를 피로 씻는 권력투쟁을 벌이면서도 여전히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지 잘 설명해 주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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