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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열줄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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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네 Dec 26. 2022

열 줄 단편(가위)

 ‘놈’이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 그날은 시경에게 생애 최고의 날이라 할 수 있었다.

 

 최종 합격이라는 면접 결과를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그리고 그의 곁에 서서 몇 년간을 기다려주었던 서영에게 자랑스레 전하고 이제 우리 결혼할 수 있는 거냐며 흐느끼던 그녀와 돌아오는 주말에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자 약속한 날이었으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좁디좁은 침대 위에 내던져져 놀란 눈알만 이리저리 굴려대는 그를, 조소를 가득 머금은 채 내려다보는 '놈'이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까마득한 시절부터 시경의 삶이 피폐해질 때마다 나타나 그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무릎을 감싸 쥔 채 침대 위에 앉아 인생의 패배자로서의 굴욕감을 새벽이 올 때까지 곱씹게 하던 '놈'이었기에 생애 최고의 날을 맞이한 피식자인 시경은 용기를 내 되려 포식자인 '놈'을 붙잡고 싶어졌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있는 '놈'의 멱살을 쥐어뜯음으로써 암울했던 과거와 간절히 이별하고 싶었기에 덜덜 떨리는 시경의 눈에는 어느새 한줄기 맑은 눈물이 흐르고 기괴하게 뒤틀린 입에서는 푸드덕거리며 거품이 일었다.


 하지만 꿈틀대기만 할 뿐 말을 듣지 않는 손을 뻗으려 소리 없이, 그러나 젖 먹던 힘까지 다하던 시경에게 불현듯 '놈'이 얼굴을 들이밀자 애처로운 피식자 시경은 결국 애써 감추어 두었던 '놈'에 대한 공포심을 터트리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꼼짝하지 않던 그의 육중한 몸이 스스로 내지르는 비명에 놀라 잠에서 깨더니 '놈'의 잔인한 미소를 향해 돌진했다.          


 다음날 아침,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가 짤막한 단신을 전했다.    


“오늘 새벽 두 시 삼십 분경 서울 ㅇㅇ구의 한 빌라에서 그곳에 거주하던 20대 남성이 추락해 숨진 것을 이웃주민이 발견했습니다."


"이 남성은 평소 주변과 왕래가 없는 은둔형 외톨이었으며 장기간에 걸친 취업 스트레스로 경미한 조현병을 겪었다는 지인들의 증언이 있어 경찰은 이번 사건을 신변을 비관한 극단적 선택으로 판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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