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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네 Oct 10. 2020

냉정과 열정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쥰세이의 이야기 Blu (출처 : 네이버 책) 

  - 영화와 소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연리지(連理枝)라는 현상이 있다.


 뿌리가 다른 나무가 엉켜 마치 하나의 나무인양 자라는 현상인데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된다는 특이함 때문에 중국 당나라의 시인인 백거이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이에 빗대었을 만큼 남녀 간의 깊은 사랑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한다.


 들판 위의 이름 없는 두 나무가 서로 엉켜 연리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듯이 두 권의 책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어 색다른 울림을 안겨주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 있다.


 바로 2001년 개봉한(한국에서는 2003년) 다케노우치 유타카와 진혜림 주연의 동명 영화의 원작,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의 공동집필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다.




 여기 두 명의 남녀가 있다. 


 아가타 쥰세이, 과거의 사랑에 얽매여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남자. 아오이, 자신 앞에 주어진 편안한 일상으로 잊을 수 없는 과거를 덮으려는 여자.

 한때는 서로 미치도록 사랑했으나 모종의 오해로 인해 이별한 지 수년이 지난 지금은 서로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아니 살아는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이. 이제 그들 사이에 남은 것이라곤 강렬했지만 짧았던 추억과 두 사람이 20살 때 흘러가듯이 맺은, 아오이의 서른 번째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자는 풋풋한 약속뿐이다. 


내 서른 생일날, 피렌체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만나. 어때?
 좋아. 십 년 후, 5월이란 말이지. 그때는 21세기네.

 부지런한 시간은 끊임없이 그들을 현실 속으로 잡아당겨 쥰세이와 아오이는 어느새 각자의 새로운 삶을 이루어 나간다. 

 

 과거에 사로잡힌 도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고미술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복원사의 길을 걷고 있는 쥰세이. 라파엘로를 닮은 외모 덕인지 절정의 미모를 지닌 '메미'라는 이름의 연인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과거로 점철된 삶을 사는 그는 피렌체의 거리를 걸으면서도, 스승인 조반나의 데생 모델 노릇을 할 때에도, 모종의 사고로 도쿄로 돌아가 추억이 깃든 교정을 걸으면서도, 심지어 도쿄까지 따라온 메미를 안으면서도(!) 아오이를 잊지 못한다. 나쁜 놈

 아오이는 과거와 현대가 혼재되어있는 도시 밀라노에서 살고 있다. 완벽하고 공정한 미국 남자 마빈과 함께. 와인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마빈과 함께하는 아오이의 일상은 풍요롭고 또한 단조롭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녀는 때때로 마빈에게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 마빈의 곁이 자신이 있을 곳이라고, 아가타 쥰세이는 과거이고 마빈이 자신의 현재라고 되뇌지만 결국 그녀도 쥰세이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나쁜 녀..ㄴ 


 과거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그들의 위태로운 일상은 도쿄에서 머물던 시절 함께한 친구인 다카시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 아오이와는 밀라노 외국인 학교에서부터 함께 했으며 쥰세이와도 대학시절 둘도 없는 친구이자 아오이를 소개해준 은인인 다카시로 말미암아 서로의 일상과 사는 곳을 알게 된 것. 그리고 다카시를 통해 아오이와 자신의 이별을 낳은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쥰세이는 아오이에게 한 장의 사죄의 편지를 부치고 이를 통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흘러간다.   


 서로를 잊지 못하는 아오이와 쥰세이는 결국 그들의 새로운 연인 마빈과 메미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어느새 찾아온 그날, 아오이의 30번째 생일. 반쯤은 포기하는 마음으로 아침부터 두오모에 올라 자리를 지킨 쥰세이의 앞에 오후의 석양과 함께 그토록 그리던 아오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진짜로 나타날 줄은 몰랐기에 느낀 당혹감과 어색함도 잠시. 8년의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두 사람은 서로를 열정적으로 갈구한다. 하지만 8년의 시간은 그리 쉽게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은 오래지 않아 현실을 직시한다. 쥰세이와 아오이는 서로 8년 전의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년간의 기다림, 정말 현실로 다가온 재회, 꿈만 같던 사흘, 하지만 지금 안고 있는 상대가 8년 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냉정한 현실. 현실에 충실한 아오이는 다시 자신이 있을 곳인 밀라노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끊는다. 그런 아오이를 쥰세이는 속절없이 떠나보내고 절망에 빠져든다. 


 그러던 중 쥰세이의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생각. 


왜 아오이는 이 곳으로 왔을까.


 10년 전 스치듯이 맺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약속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쥰세이는 새삼 희망을 느낀다. 그리고 드디어, 더 이상은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각오로 쥰세이는 기차역으로 뛰기 시작한다. 그녀를 그녀의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나 새로운 백 년을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아오이가 탄 기차보다 몇 분 더 일찍 밀라노에 도착하는 국제특급열차에 몸을 실으며 쥰세이는 나직이 되뇐다.


새로운 백 년.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지라도 소설과 영화는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며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것이 소설의 매력이요 스크린 너머 세계를 뛰어난 영상미와 감미로운 음악을 통해 관객들 앞에 펼쳐 놓는 것은 영화의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만큼 소설과 영화가 가진 각각의 장점을 극대화한 작품이 또 있을까.


 이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소설이 가진 가장 독특한 점은 하나의 이야기에 책이 두 권이라는 것이다. 쥰세이의 이야기를 담은 Blu, 아오이의 이야기를 담은 Rosso가 바로 그것. 두권 모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사가 이루어지는 탓에 Blu를 읽는 독자들은 쥰세이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아오이가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Rosso를 읽는 독자들은 아오이로 하여금 저 완벽한 마빈을 포기하게 만드는 쥰세이는 어떤 남자인지를 주인공들의 독백에만 의존해서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주인공들과 함께 기억 속 옛 연인을 그리워하다 운명의 그날, 아오이의 서른 번째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에 함께 서서 서로의 아오이와 쥰세이를 현실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Blu를 덮은 사람들은 Rosso를, Rosso를 덮은 사람은 Blu를 펼쳐 들었을 때 맞이하게 되는 연인의 일상을 통해 새로운 시각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금 볼 수 있게 되어 비로소 이 소설만의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된다.

 

 반면 영화는 원작 소설의 이러한 독특함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 쥰세이와 아오이의 이야기를 번갈아 스크린에 비추는 통에 Blu를 읽는 독자들의 아오이에 대한 신비감과 궁금증, 마찬가지로 Rosso를 읽는 독자들의 쥰세이에 대한 그것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영화의 초입부에서부터 다카시를 통해 아오이의 주소를 알게 된 쥰세이가 밀라노에 찾아가 아오이와 마빈의 집을 방문하는 받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소설 전반에 걸쳐 절절히 묘사되는 서로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몹시 빛을 바랬다.


 또한 영화는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잔잔한 물과 같은 문체에다 아오이라는 주인공의 개성이라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안 하는' 일상으로 채워진 Rosso대신 선이 확실한 쥰세이의 이야기를 담은 Blu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이 때문에 아오이의 분량이 소설의 그것보다 축소된 편이다. 덕분에 쥰세이의 아오이에 대한 마음은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지만 반대로 에쿠니 가오리의 섬세한 문체로 묘사된 아오이의 심리와 그녀가 마빈과 빚는 미묘한 갈등은 잘 그려내지 못한 점이 아쉽다. 또한 결과적으로 주인공들과 이별하며 쓸쓸히 퇴장하지만 각자의 순애보를 보여준 메미와 마빈의 비중이 크게 축소되어 이야기의 다채로움이 한풀 꺾인 점 또한 아쉽다.


 한 가지 이야기로 영화를 두 편을 만들 수는 없었을까. 쉽지는 않았겠지만 흥미로운 시도는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들을 단박에 만회하는 영화만의 매력이 있다. 바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피렌체의 풍광을 담은 영상미와 누구나 들으면 '아 이 음악!'이라며 무릎을 칠 정도로 유명한 OST가 그것이다.


 온 도시에 빨간 물감을 뿌려놓은 듯 붉은 지붕들로 뒤덮인 피렌체의 풍경과 그 안에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고즈넉한 골목길, 재회한 쥰세이와 아오이가 마주 보고선 광장, 유유히 흐르는 아르노 강과 도시 한가운데 높다랗게 솟아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두오모까지, 당장이라도 비행기표를 끊고 날아가 여행을 하고 싶을 정도로 이 영화는 피렌체의 매력을 잘 담아내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소설에서는 묘사되지 않는 내용인 마지막 기차역 씬은 개인적으로 뽑는 이 영화의 백미이다. 썰물처럼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군중들 사이에 서서 오직 아오이만을 바라보며 그녀를 맞이하는 쥰세이. 그런 쥰세이를 놀란 듯이 바라보다 이내 웃음 짓는 아오이의 모습은 조금 허전하게 마무리되는 소설과는 다르게 이야기의 갈무리를 완벽하게 해내고 있으며 그들 사이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첼로 선율은 한층 더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

(마무리를 장식한 end title 외에도 타이틀곡인 Between Calm and Passion과 History 등 일반에게 익히 알려진 음악이 많다. 유튜브에서 한번 들어보시길)




 아오이의 이야기 Rosso (출처 : 네이버 책)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세상의 모든 곳, 모든 일은 '여기와 저기 사이 어딘가'라고 생각한다. 서울은 베이징과 도쿄 사이, 여름은 봄과 가을의 사이, 오늘은 어제와 내일의 사이, 그리고 우리의 일상과 사랑은 냉정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열정 사이에 있는 것이다. 

 

 쥰세이와 아오이의 사랑 또한 그렇다. 8년 전 과거와 앞으로 살아갈 100년 사이의 이야기, 이탈리아 밀라노와 피렌체, 일본 도쿄 사이의 이야기


 그리고 두 사람의 냉정과 열정 사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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