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 영화와 소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연리지(連理枝)라는 현상이 있다.
뿌리가 다른 나무가 엉켜 마치 하나의 나무인양 자라는 현상인데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된다는 특이함 때문에 중국 당나라의 시인인 백거이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이에 빗대었을 만큼 남녀 간의 깊은 사랑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한다.
들판 위의 이름 없는 두 나무가 서로 엉켜 연리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듯이 두 권의 책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어 색다른 울림을 안겨주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 있다.
내 서른 생일날, 피렌체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만나. 어때?
좋아. 십 년 후, 5월이란 말이지. 그때는 21세기네.
부지런한 시간은 끊임없이 그들을 현실 속으로 잡아당겨 쥰세이와 아오이는 어느새 각자의 새로운 삶을 이루어 나간다.
과거에 사로잡힌 도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고미술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복원사의 길을 걷고 있는 쥰세이. 라파엘로를 닮은 외모 덕인지 절정의 미모를 지닌 '메미'라는 이름의 연인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과거로 점철된 삶을 사는 그는 피렌체의 거리를 걸으면서도, 스승인 조반나의 데생 모델 노릇을 할 때에도, 모종의 사고로 도쿄로 돌아가 추억이 깃든 교정을 걸으면서도, 심지어 도쿄까지 따라온 메미를 안으면서도(!) 아오이를 잊지 못한다. 나쁜 놈
아오이는 과거와 현대가 혼재되어있는 도시 밀라노에서 살고 있다. 완벽하고 공정한 미국 남자 마빈과 함께. 와인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마빈과 함께하는 아오이의 일상은 풍요롭고 또한 단조롭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녀는 때때로 마빈에게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 마빈의 곁이 자신이 있을 곳이라고, 아가타 쥰세이는 과거이고 마빈이 자신의 현재라고 되뇌지만 결국 그녀도 쥰세이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나쁜 녀..ㄴ
과거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그들의 위태로운 일상은 도쿄에서 머물던 시절 함께한 친구인 다카시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 아오이와는 밀라노 외국인 학교에서부터 함께 했으며 쥰세이와도 대학시절 둘도 없는 친구이자 아오이를 소개해준 은인인 다카시로 말미암아 서로의 일상과 사는 곳을 알게 된 것. 그리고 다카시를 통해 아오이와 자신의 이별을 낳은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쥰세이는 아오이에게 한 장의 사죄의 편지를 부치고 이를 통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흘러간다.
서로를 잊지 못하는 아오이와 쥰세이는 결국 그들의 새로운 연인 마빈과 메미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어느새 찾아온 그날, 아오이의 30번째 생일. 반쯤은 포기하는 마음으로 아침부터 두오모에 올라 자리를 지킨 쥰세이의 앞에 오후의 석양과 함께 그토록 그리던 아오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진짜로 나타날 줄은 몰랐기에 느낀 당혹감과 어색함도 잠시. 8년의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두 사람은 서로를 열정적으로 갈구한다. 하지만 8년의 시간은 그리 쉽게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은 오래지 않아 현실을 직시한다. 쥰세이와 아오이는 서로 8년 전의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년간의 기다림, 정말 현실로 다가온 재회, 꿈만 같던 사흘, 하지만 지금 안고 있는 상대가 8년 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냉정한 현실. 현실에 충실한 아오이는 다시 자신이 있을 곳인 밀라노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끊는다. 그런 아오이를 쥰세이는 속절없이 떠나보내고 절망에 빠져든다.
그러던 중 쥰세이의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생각.
왜 아오이는 이 곳으로 왔을까.
10년 전 스치듯이 맺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약속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쥰세이는 새삼 희망을 느낀다. 그리고 드디어, 더 이상은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각오로 쥰세이는 기차역으로 뛰기 시작한다. 그녀를 그녀의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나 새로운 백 년을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아오이가 탄 기차보다 몇 분 더 일찍 밀라노에 도착하는 국제특급열차에 몸을 실으며 쥰세이는 나직이 되뇐다.
새로운 백 년.
하지만 이런 아쉬움들을 단박에 만회하는 영화만의 매력이 있다. 바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피렌체의 풍광을 담은 영상미와 누구나 들으면 '아 이 음악!'이라며 무릎을 칠 정도로 유명한 OST가 그것이다.
온 도시에 빨간 물감을 뿌려놓은 듯 붉은 지붕들로 뒤덮인 피렌체의 풍경과 그 안에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고즈넉한 골목길, 재회한 쥰세이와 아오이가 마주 보고선 광장, 유유히 흐르는 아르노 강과 도시 한가운데 높다랗게 솟아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두오모까지, 당장이라도 비행기표를 끊고 날아가 여행을 하고 싶을 정도로 이 영화는 피렌체의 매력을 잘 담아내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소설에서는 묘사되지 않는 내용인 마지막 기차역 씬은 개인적으로 뽑는 이 영화의 백미이다. 썰물처럼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군중들 사이에 서서 오직 아오이만을 바라보며 그녀를 맞이하는 쥰세이. 그런 쥰세이를 놀란 듯이 바라보다 이내 웃음 짓는 아오이의 모습은 조금 허전하게 마무리되는 소설과는 다르게 이야기의 갈무리를 완벽하게 해내고 있으며 그들 사이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첼로 선율은 한층 더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
(마무리를 장식한 end title 외에도 타이틀곡인 Between Calm and Passion과 History 등 일반에게 익히 알려진 음악이 많다. 유튜브에서 한번 들어보시길)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세상의 모든 곳, 모든 일은 '여기와 저기 사이 어딘가'라고 생각한다. 서울은 베이징과 도쿄 사이, 여름은 봄과 가을의 사이, 오늘은 어제와 내일의 사이, 그리고 우리의 일상과 사랑은 냉정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열정 사이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