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10년 전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윌 스미스 주연의 동명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간단히 소감을 요약하자면 ‘전형적인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랄까. 미국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감염된 좀비들이 넘쳐나는 대략 망한 세상에서 주인공과 그의 유일한 친구인 셰퍼드 한 마리가 역경을 헤쳐나가다 우연히 조우한 모자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며 장렬히 산화하는, 미국이 사랑하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던 영화로 기억하지만 원작인 이 소설의 마지막에 딸린 번역자의 말에 이런 문구가 있다. ‘감독이 로렌스든 스필버그이든, 그리고 네빌의 역을 슈월츠제네거가 맡든 윌 스미스가 맡든, 만일 이번에도 또 한 편의 엉성한 슈퍼히어로 영화로 끝난다면, 그건 곧바로 할리우드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옮긴이와 원작 소설의 팬들이 영화를 보고 어떤 평을 내렸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으리라.
1954년에 리처드 매드슨이 내놓은 이 소설은 이제는 흔해빠진 종류가 돼버린 좀비물의 효시격인 작품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에 감염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채 맹목적인 공격성만을 지니게 된 흡혈귀들 사이에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가 아닌가? 미국을 대표하는 공포소설의 대부인 스티븐 킹이 이 작품을 읽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꿈도 희망도 없어진 멸망해버린 세상에서 낮에는 흡혈귀들의 은신처를 찾아 헤매고, 저녁에는 반대로 깨어난 흡혈귀들을 피해 마늘 방어선(?)을 친 집에 틀어박혀 저 멀리 사라져 버린 인간들의 시대와 아내를 그리며 괴로워하는 이를 데 없이 고독한 남자 네빌, 1950년대 미국 중년 남성들의 남성성의 위기를 나타낸다고 평가되는 그의 일상을 20세기 중반에 쓰인 소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솜씨로 묘사하는 리처드 매드슨의 글솜씨는 가히 공포소설의 대가라 할 만하다.
이 소설의 백미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네빌의 마지막 독백 ‘이제 나는 전설이야(I am legend)’ 일 것이다.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은 이 ‘I am legend'라는 문장을 할리우드의 기본정신에 맞게 주인공의 전설적인 활약에 정점을 찍는 카타르시스적인 표현으로 사용했지만 원작 소설 속에서 네빌이 내뱉는 “I am legend”는 그와는 무척이나 다른 뜻이다. 자신을 두려워하며 증오해 마지않는 신인류들에게 둘러싸인 채 죽음을 목전에 둔 네빌이 스스로가 후대로부터 영원히 칭송받을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독백을 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자신의 죽음이 그를 비롯한 구인류의 멸종과 신인류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임을 절감하며 네빌이라는 사내는 먼 훗날 신인류 할머니가 그녀의 자손에게 들려줄 무서운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등장인물이 될 것임을 예감하며 내뱉는 말이라 보는 것이 적절하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네빌의 마지막 독백 외에도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네빌의 생각 또한 짚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루스의 따스한 눈물을 느끼며 부상으로 말을 듣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킨 네빌의 눈앞에는 그에게 사랑하는 이들을 빼앗긴, 네빌이 결코 속할 수 없는 신인류 무리가 가득했다. 그들의 창백한 얼굴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네빌은 생각한다.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지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정상이란 무엇일까. 또한 비정상이란 무엇일까. 유일한 정상인 줄 알았던 자신이 알고 보니 유일한 비정상이었다는 네빌의 깨달음을 단순한 머릿수에 따른 편가름으로 단정하는 것은 자칫 라이언 매드슨이 이 작품을 통해 (그 성격이 무엇이건 간에) 수적 우위를 점한 집단 혹은 이데올로기에 ‘정상’이라는 권위를 얹어주려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또한 신인류를 마주하기 전, 매일 밤마다 네빌의 집에 몰려들어 그의 살점을 탐하는 수많은 살아있는 시체들을 보며 네빌은 단 한 번도 그들을 정상이라 생각한 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단순히 다수 집단을 정상이라 정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아마 이는 I am legend의 legend를 '전설'로 풀어낸 원작과 '전설적인'으로 해석한 영화의 차이와 같이 정상이라는 단어를 풀어내는 방식에 귀결되는 문제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네빌에게 흡혈귀들은 ‘비정상’ 그 자체이며 반대로 그 자신은 마지막 남은 ‘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외모에 대규모 조직을 이루어 살며 현대적인 화기까지 사용할 수 있는 흡혈귀 집단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충격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충격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생각, 자신이 알고 있던 일상적인 세상은 이제 끝났으며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람들의 삶이 ‘일반’적인 삶이 되는, 흘러간 시대의 일반인이었던 자신은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일반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며 저 일반적인 정상조직에 결코 속할 수 없는 비일반적인 비정상이 되었다고 생각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원인모를 전염병으로 멸망한 세상이라는 배경과 비장감 넘치는 네빌의 마지막 대사를 차용해 나름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리처드 매드슨이 숨이 끊어져 가는 네빌의 독백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 ‘정상’이란 개념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에 담지 못해 이 영화를 온전한 리메이크작이라 하기는 어렵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이를 온전히 담은 영화가 제작되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정상이란 개념에 대해 곱씹어 보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