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콩, 배추, 호박 친구들
할아버지께서 뇌종양 시술을 무사히 마치고 6개월이 지났다. 지금은 지팡이 없이 성큼성큼 잘 걸으신다. 장난으로 뛰는 모습을 보여주며 건강하다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신다.
일반 성인처럼 걸을 정도로 회복하신 할아버지는 곧바로 밭에서 일을 하셨다. 가족들의 걱정 섞인 반대를 뿌리쳤다. 울퉁불퉁한 밭에서 불편한 손과 다리로 밭일하시는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마음이 불편했다. 할머니의 농도 짙은 쓴소리에도 할아버지는 꿋꿋하게 고구마 모종을 심으셨다. 그놈에 고구마가 뭐라고 매년 심고 캐는지. 성치 않은 몸으로 그리 애지중지하고 키우실까. 고구마가 밉다.
최근 들어 주말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뵈러 아산시 탕정면에 있는 작은 마을로 간다. 세월이 흘러 구석구석 녹이 슨 대문을 열고 "나, 왔어"라는 소리를 내면 할아버지는 나를 보러 헐레벌떡 텔레비전을 끄고 방에서 나오신다. 장난꾸러기인 내가 뭐가 좋다고 그리 급히 나오실까. 할아버지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유치원 시절 모습으로 되돌아가 할아버지를 살포시 포옹한다. 그러다 할아버지의 어깨가 내 어깨에 닿으면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
할아버지와 식탁에 앉으면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다. 주로 할머니 뒷담화를 하거나 자라고 있는 농작물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 할머니가 이랬다느니, 저랬다느니, 말이 안 통한다. 한 주 동안 쌓아둔 불평을 늘어놓으시면 나도 그에 맞춰 맞장구를 친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신다.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나 회포를 푸는 것처럼. 이어서 키우고 있는 농작물을 말씀하신다. 이거 심었다. 저거 심었다. 그리고 항상 "이때 캘 테니까 그때 가져가." 말을 붙이신다. 싱싱하고 맛 좋은 놈들을 따로 보관해 놓으시고, 내가 올 때면 조용히 차에 실어 놓으신다. 게다가 여자친구네 집에도 보내라고 신경 써주신다. 정작 자기 자식들은 적게 주면서 말이다.
최근에 할아버지께서 이틀 동안 입원을 하셨다. 혈액, 소변, X-ray, MRI 등 여러 검사를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시술을 마치고 꽤 긴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건강이 잘 회복 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인 것 같다. 병원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실 할아버지를 위해 바둑판, 바둑알을 사 들고 병문안을 갔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곤히 주무시는 할아버지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코가 찡하고 아파왔다. 덜컥 눈물도 쏟아질 듯했지만 꾸역꾸역 참았다. 갑자기 어떤 두려움이 몰려와 "나, 왔어"를 급하게 내뱉었다. 평소처럼 나를 보기 위해 서둘러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감이 불어왔다.
할아버지는 퇴원과 동시에 밭으로 나갈 준비를 하신다.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딜 때마다 보기만 해도 무거운 장화는 가벼운 어린이 운동화가 되고, 날이 무뎌진 호미는 장난감 검이 되었다.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정신 무장을 두른 시골 꼬마는 친구들이 많은 놀이터로 달려갔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넘어지지 않을까. 뱀에게 물리지 않을까. 온갖 걱정이 든다. 할아버지도 내가 개구쟁이 꼬마였을 당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