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이병철대로

누구의 이름을 기억할 것인가

by 박계장

어머니는 김해에서 여동생을 도와 칼국수집 일을 하신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데, 그날이 바로 수요일이다. 여동생이 어머니를 혹사시킬 일도 없고, 어머니도 일이 고단하다 말씀하신 적은 없다. 오히려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아 힘 닿는 날까지 식당 일을 하고 싶다고 하신다. 그렇더라도 연세가 많음에도 여전히 일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늘 짠하다. 그 하루만큼은 어머니가 즐겁고 편하게 지내셨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휴일인 수요일에 맞춰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부모님을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당일 여행을 다녀오곤 한다. 이번에는 의령으로 향했다.


아침 8시, 내비게이션은 1시간 30분을 예고했지만 실제로는 9시 10분쯤 의령 충익사에 도착했다. 충익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의병장 곽재우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이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978년 박정희 정권 시절 새로 지어진 것이다. 마당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으로 심은 주목이 서 있다.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령 세간리의 오래된 느티나무에 북을 걸고 의병을 모았다. 지금도 600년 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는, 장군이 붉은 옷에 흰 말을 타고 선봉에 섰던 결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앞장선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다시 닥친다면, 나는 과연 그처럼 앞장설 수 있을까.


박정희의 기념식수 앞에 서니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 그 시대에 아산의 현충사, 부산의 충렬사, 경주의 화랑대처럼 ‘충(忠)’을 내세운 시설물이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표면적으로는 충절을 기리는 일이었지만, 그 속에는 국민을 하나의 질서 안에 묶어내려는 군부의 치밀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충익사 역시 그 맥락 속에서 세워진 것이리라.


곽재우 장군이 보여준 충성은 스스로의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내놓으며 백성과 함께 싸운 충성이었다. 반면 군부가 내세우는 충성은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국가라는 이름 아래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는 충성이었다. 하나는 자유로운 선택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이 요구한 의무였다. 두 충성의 무게가 같을 수는 없다.


이어 찾은 곳은 이병철 생가였다. 의령의 중심 도로와 관광 안내판은 그와 그의 아들 이름으로 가득했지만, 내 마음은 또 다른 의령 사람, 백산 안희제 선생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같은 고장에서 태어났지만 걸어간 길은 전혀 달랐다.


안희제는 1885년 의령에서 태어나 일찍이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고, 그 수익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 또 땅을 팔아 학교를 세우며 민중을 깨우쳤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 속에서 수차례 투옥과 고문을 당하다 1943년 옥중에서 생을 마쳤다. 번 돈을 모두 나라에 바치고,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다.


이병철은 그보다 25년 뒤인 1910년 같은 의령에서 태어났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열어 미곡 장사로 시작했고, 해방 이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삼성전자로 사업을 키우며 재벌로 성장했다. 1987년 세상을 떠날 때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총수가 되어 있었다.


한 사람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고, 다른 한 사람은 사업으로 세계적 기업을 일구었다. 그러나 오늘 의령에서 더 크게 기려지는 이름은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더 오래 기억해야 하는가.


또 다른 대비도 있다. 한 중소 건설사의 회장은 고향에 학교와 마을회관을 세우고,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꾸준히 지원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많게는 한 집에 1억 원에 가까운 현금을 직접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 덕분에 고향 사람들의 빠듯한 살림에 숨통이 트이고, 어르신들의 병원비와 노후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떠올리면 의령의 선택이 더욱 아쉽게 다가온다. 군청은 삼성을 내세우며 거리를 ‘호암이병철대로’ ‘삼성이건희대로’라 이름 붙이며 관광 마케팅의 중심에 세운다. 그러나 삼성의 기여라곤 관광지 개발을 위한 생가 소유권과 몇 차례 장학금 기부가 전부였고, 그것은 지역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정작 의령이 기려야 할 이름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백산 안희제 선생이 아닐까. 그러나 그의 숭고한 정신은 외면한 채 ‘큰 기업인을 낳은 고장’이라는 간판만 내세운다면, 후대는 공동체를 위한 헌신보다 돈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일붕사로 향했다. 절벽 속 동굴에 자리한 이 절은 또 다른 세계였다. 통일신라 혜초 스님이 창건한 성덕사가 전신이었으나, 화재와 소실을 거듭하다가 1986년, 일붕 서경보 종정 스님의 발원으로 절벽을 파 동굴 법당을 조성했고, 지금은 동양 최대 규모의 석굴법당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동굴 속 대웅전에 들어서니 바깥의 땡볕이 무색할 만큼 서늘했다.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이 한순간 맑아지는 듯했다.


점심은 의령시장에서 쇠고기국밥을 먹었다. 국물은 담백했지만, 익숙한 부산 돼지국밥이 더 맛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진영휴게소는 기억 속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십수 년 전, 소박했던 휴게소가 이제는 지금껏 다닌 어느 휴게소보다 커져 있었다. 남해고속도로 부산 방향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이곳은 외관부터 아울렛을 닮아 있었고, 안에는 음식점과 카페, 옷과 신발을 파는 매장까지 들어서 있었다. 잠시 들르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목적지 같았다. 세월이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김해에 도착해서는 부모님과 함께 영화관에 들렀다. 부모님 세대에는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낯설어 조금 긴장하신 듯했지만, 그 모습이 우리에겐 웃음을 자아냈다. 저녁은 돌아오는 길에 눈에 띈 밀면집에서 해결했다. 내가 요즘 자주 들르는 시청 근처 단골 밀면집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지만, 그날의 끝을 채우기에 부족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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