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독자’ J팀장

떠나는 뒷모습이 가르쳐 준 진짜 공직 수업

by 박계장

11월의 끝자락, 부산시청 앞 광장에는 벌써부터 매서운 겨울바람이 맴돈다.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청사를 빠져나가지만, 14층 사무실의 불빛은 여전히 환하다. 그 불빛 아래, J팀장님이 앉아 있다.


그녀의 퇴직 예정일은 12월 31일. 남은 연가와 휴가를 털어 넣어 계산해 보면, 실제로 그녀가 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올 날은 이제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퇴직을 한 달여 앞둔 시점, 마음이 먼저 짐을 싸느라 업무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울 법도 하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사적인 정리에 시간을 쏟는 일이 잦아질 수도 있는 시기다. 하지만 그녀의 책상은 여전히 치열한 '현역'이다. 요즘은 대부분 전자결재로 처리되어 책상 위가 단촐할 법도 하건만, 그녀의 자리 한편에는 시의회와 상사의 질의에 대응하기 위한 두꺼운 자료집들이 성벽처럼 쌓여 있다. 예상 질문이 적힌 페이지마다 수없이 붙어 있는 색색의 띠지들은 어떤 질의가 쏟아져도 기어이 답을 해내겠다는 그녀의 깐깐한 의지처럼 보인다.


"이제 다 돼 가네요. 어디 가실 데는 정해 두셨습니까?" 퇴임 이후의 거취를 묻는 인사를 겸한 질문에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며 덤덤하게 웃는다. "글쎄, 이제 슬슬 찾아봐야지."


그녀는 1년의 공로연수 대신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사실 공로연수를 가든 명예퇴직을 하든, 인사상 결원으로 처리되어 후배들에게 승진의 길을 터주는 결과는 같다. 차이가 있다면 '적을 두고 잠시 쉬느냐'와 '완전히 조직을 떠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조직에 부담 주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며 12월 31일 자로 33년 공직 생활에 완전한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단호하게 내린 그 결정은 참 그녀다웠다.


시청 일이란 게 원래 그렇다. 각자 맡은 바가 뚜렷하고 그 양도 만만치 않기에, 누군가 먼저 일어선다고 해서 눈치를 주거나 받을 이유가 없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모니터와 씨름할 뿐이다. J팀장님 역시 거창한 희생정신으로 야근을 자처하는 건 아니다. 시청으로 전입 온 지 10여 년, 그녀에게 야근은 직원들이 올린 사업계획서와 보고서를 꼼꼼히 챙기고, 업무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시의회 대응 자료를 정리하기 위한 치열한 일상일 뿐이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그 일들을 마주하고 묵묵히 앉아 있는 것,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다.


간혹 업무에 관심이 덜해 실무는 직원들에게 일임하고, 그저 자리만 지키며 올라오는 결재 문서에 클릭만 하는 관리자들도 더러 있다. 그런 이들은 금세 표가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시민의 세금으로 받는 월급이 아깝지 않은 공직자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지난 공직 생활을 관통하는 철학인데, 옆자리의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직원들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돌아와 다시 서류 더미 속으로 파고드는 그 등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시의회 예산 심의 날의 풍경이 떠오른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임위원회 회의장,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의가 쏟아지던 그곳에서 뜻밖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산모신생아 돌봄 서비스는 담당 팀장님이 답변해 주시죠."


질의를 던지던 시의원이 담당 국장님이 아닌, 뒤에 배석해 있던 실무 팀장인 그녀를 지목했다. 국장님이 답변을 못 해서가 아니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그 의원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예산 심의가 평생을 보건 의료 현장에서 헌신한 그녀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라는 것을.


업무에 대한 질의응답은 짧게 끝났다. 그것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의원이 그녀를 발언대로 부른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33년 공직 생활을 마감하는 실무 팀장에게 공식 회의록에 남을 마지막 발언 기회를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퇴직이 얼마 안 남으신 걸로 압니다. 실무 팀장으로서 마지막 소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33년 헌신에 대한 정중한 예우였다. 마이크 앞에 선 그녀는 떨지 않았다. 화려한 미사여구 대신, 코로나 팬데믹 시절 방호복을 입고 땀과 눈물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겠다며 뛰어다녔던 치열했던 현장의 이야기, 동료들과 시의회 상임위 위원들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남은 후배들이 시민을 위해 더 잘해주기를 바라는 당부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의원들의 시선에는 날 선 검증 대신 따뜻한 온기가 서렸다. 가벼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었고, 한 여성 의원은 끝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국장님과 과장님들 뒤로 배석해 있던 수십 명의 직원들 또한 숨을 죽였다. 그녀의 담담한 한마디 한마디에 지난 33년 시정에 바친 헌신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들이 마주하게 될 미래임을 알기에 회의장은 깊은 공감과 함께 숙연해졌다. 많은 이의 눈가가 촉촉해 졌고 직원 중 한명은 펑펑 눈물을 쏟아 짠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내가 틈틈이 브런치스토리에 올리는 이 서툰 글들을 가장 먼저 읽어주는 '첫 번째 독자' 역시 그녀다. "팀장님, 필력이 있으시네. 읽다 보니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 그녀는 내 글을 읽을 때마다 그렇게 운을 떼곤 했다. 나의 투박한 글이 마중물이 되어, 그녀는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길어 올렸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고향 풍경, 사무치게 그리운 부모님 이야기, 그리고 33년 공직 생활 중 겪었던 숱한 경험들... 내 글을 핑계 삼아 쏟아낸 그 진솔한 고백들이야말로 나에게는 교과서에도 없는 생생한 '공직 수업'이자 따뜻한 위로였다.


아직 나는 그녀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다가올 퇴임식 날, 웃으며 보내드려야 할 텐데 벌써부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직 출근하고 있으니 앞으로 천천히 짐을 싸겠다고 했지만, 그 속도가 아주 많이 더뎠으면 좋겠다. 그녀가 떠난 빈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클 것 같기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