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의 절필을 통계로 마주한 날의 고백
밤 11시, 스탠드 불빛만이 유일한 위로인 시간이었다. 브런치 앱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0000'님이 새로운 글을 게재했다는 알림이었다. 반가움이 앞섰다. 한 달 전, 그가 <이제는 펜을 내려놓습니다>라는 글을 남겼을 때, 나는 그저 창작의 고통을 겪는 이의 투정 어린 휴식 선언이라 생각했다. 그 안일한 “푹 쉬세요”라는 댓글이, 지금 내게는 잔인한 비수처럼 돌아왔다.
화면에는 “0000의 가족입니다…”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영면(永眠). 그 단어를 읽는 순간, 활자들이 뭉개지며 시야가 아득해졌다. 그는 쉼표를 찍은 것이 아니라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다. 아주 깊고 어두운 마침표였다. 그는 쉼을 알리며 이렇게 썼었다. “오늘도 작은 위로 한 모금으로 버틴다.” 나는 그 ‘작은 위로’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을 품고 밤을 지새웠다. 내가 글을 쓴답시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척했지만, 정작 내 글의 독자이자 동무였던 그가 보내던 구조 신호를 ‘문학적 은유’로 오해하고 말았다.
충격과 후회로 밤을 설친 다음 날 아침, 나는 시청 1층 안과 밖을 가르는 출입대에 서 있었다. ID카드를 대자 ‘쓱’ 하는 소리와 함께 가림막이 열렸다. 그 소리는 마치 나를 둘로 쪼개는 신호처럼 들렸다. 밤새 한 인간의 슬픔에 잠겨 있던 나는,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 정신건강팀장이라는 직책의 차가운 유니폼을 입었다.
책상 위에는 전날 보던 서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퇴근할 때 모든 서류를 캐비닛에 ‘봉인’해 두었지만, 지금은 보안 서류가 아니면 책상 위에 두고 퇴근하는 일이 많아졌다. 요즘 사무실에는 예전처럼 이름표가 붙은 서류 캐비닛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서류가 서버에 저장되기 때문이다. 어제 늦게까지 씨름했던 서류는 최근 공개된 전년도 자살 통계였다. 그 서류에는 한 사람의 목숨이 숫자 하나로 기록되는 차갑고도 이상한 순간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밤에 보았던 “0000의 가족입니다…”라는 부고 문장이 잔상으로 남아, 종이 위의 활자들 위에서 핏빛으로 겹쳐 보이는 듯했다. 통계 속의 ‘1’은 이제 더 이상 추상적인 숫자가 아니라, 내가 어젯밤 애도했던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 직업적 냉철함이 인간적 눈물을 강제로 밀봉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정신건강팀장으로서 시민들의 마음 건강을 살피는 일을 하고 있다. 자살예방 업무가 늘어 나면서, 요즘 내 책상 위에는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 대신 오직 숫자만이 남았다. 전국 자살률, 부산 구·군 자살률, 연령대별 자살 원인 같은 숫자들뿐이다. 그 수치들은 이제 군번이나 초병의 근무 수칙처럼 툭 치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내 직업적 습관이 되었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벽면에는 숫자로 변한 죽은 이들의 이름 같은 자살 통계들이 키를 맞춰 붙어 있다. 나는 매일 그 ‘숫자의 관(棺)’ 앞에서 생명을 논하고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겠다는 사람이 숫자로 사람의 목숨을 살리겠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를 일이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5% 감소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회의에서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곤 한다. 그 5%라는 건조한 목표 안에 얼마나 많은 비명과 절망이 소거되어 있는지, 나는 능숙하게 외면해 왔다.
브런치스토리에 들어가 어젯밤 그 부고를 다시 보았다. 가슴이 턱 막혔다. 그는 내년 이맘때 내 책상 위로 돌아올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그가 썼던 아름다운 문장들도 모두 지워진 채, 그저 어느 도시의 자살자 중 한 명으로, 미세하고 눈에 띄지도 않을 만한 ‘숫자’가 되어서 올 것이다. 내가 받아볼 다음 해 보고서의 막대그래프 끝자락, 그 미세한 점 속에 그가 섞여 있을 것이다. 이 무상함은 바로 내가 지켜야 할 행정의 냉정한 얼굴이었다. 내가 그의 온기를 기억하는 동안에도 행정은 그를 단지 ‘1’이라는 숫자로 치환하여 처리할 것이다. 그것이 국가가 슬픔을 관리하는 방식이고, 내가 월급을 받는 대가로 수행해야 할 차가운 의무였다.
사무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서 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는가, 아니면 그저 죽음을 숫자로 정산하는 일을 하는가. 직업인으로서의 나는 효율과 성과를 따져야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그 통계 처리 과정에서 탈락한 개인의 고유함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쓴다. 비록 내 업무는 그를 익명의 통계로 만들겠지만, 나의 글은 그를 온전한 이야기로 남겨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숫자가 되지 못한 마음들, 성과 지표에는 잡히지 않는 내밀한 우울과 슬픔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안부 인사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 나는 퇴근 후에도 습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행정 용어가 아닌 사람의 언어로 글을 쓸 것이다. 엑셀 시트 속에 갇힐 뻔한 누군가의 하루를 복원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릴 것이다. 나는 숫자가 삼켜버린 이름을, 나의 언어로 다시 호명하여 세상에 돌려보낼 것이다. 이 글쓰기는 시스템의 사각지대에서 흔들리는 모든 이에게 전하는 작은 구조(救助) 활동이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가는 밤, 부디 이 글이 어딘가에서 흔들리고 있을 또 다른 당신에게 닿기를 바란다. 숫자가 아닌 온기로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