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보다 먼저 도착하고, 진실보다 더 오래 남는 것
나는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다. 웃음이 많은 편도 아니라 누군가 먼저 다가오는 일이 흔치 않았다. 체구가 큰 편이어서 그런 인상도 한몫 했던 것 같다. 한때는 인사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다. 이제는 내가 인사를 해야 할 사람도 몇 남지 않았다.
나에 대한 평판은 늘 극단적이었다. 좋게 보는 이들은 참 좋게 보았고,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끝내 거리를 두었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소문이 따라다녔고, 그런 말들은 주로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정작 더 불편했던 건, 그런 소문을 굳이 내게 전하는 이들이었다. 좋은 말도 아닌데 왜 굳이 전하는 걸까. 나를 아낀다면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면 될 것을 말이다.
공직에 첫발을 들였던 시절, 사수였던 선배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그땐 그 말이 단지 평판을 조심하라는 뜻 정도로만 들렸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 역시 그 말의 무게를 실감하게 되었다. 보건직은 소수 직렬이다 보니 함께 근무한 적이 없어도 이름쯤은 익숙해지고, 한 사람에 대한 평판은 금세 퍼진다. 그런 평가들이 누군가의 이미지를 만들고, 때로는 그 사람을 오해하게 만든다. 그렇게 세평은 만들어지고, 유통된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런 말들의 생산자였다. 확인되지 않은 말, 감정이 섞인 판단, 남의 입에서 들은 소문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했다. 그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말이 내게 돌아오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으면서도, 정작 내 말도 누군가의 꼬리표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 점을 뼈아프게 돌아보게 된 것이, 이번 일의 가장 큰 교훈이었다.
그날은 퇴직한 선배와 몇몇 동료들이 함께한 산행 자리였다. 서기관으로 승진한 선배를 축하하며 점심을 겸해 중국집에 들렀고, 연태고량이 몇 순배 돌았다. 나는 상급자와 점심을 함께한 이야기를 하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내고 말았다.
"너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더라. 내가 보기엔 그래."
예전 내가 싫어했던 바로 그 말, 그 상황이었다. 후배는 얼굴빛이 굳더니 대뜸 말했다.
"사람들이 계장님 얘기할 때, 제가 얼마나 그건 아니라고 막아왔는지 아십니까?"
그 순간, 술기운이 가셨다. 후배의 말은 결국, 내가 평판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전제 위에서 자신이 나를 변호해 왔다는 식이었다. 자책보다는 서운함이 앞섰다. 함께 웃으며 나눈 대화들, 친구처럼 지냈던 시간들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무거웠다. 후배의 말을 곱씹으며, 왜 그가 그렇게 반응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그것도 부정적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을 것이다.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버렸다. 그때 내게 그 말을 전하던 선배들처럼.
그러나, 그 후배의 태도는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아무리 불쾌했더라도 열 살이나 많은 선배에게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날 선 반응을 보인 건 아쉬웠다. 내가 그를 편하게 대해줬다고 해서, 그가 나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건 아니었는데 그는 선을 넘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거리감을 허물게 만든 것도 나였다. 내가 먼저 다가갔고, 그와 너무 격의 없이 지낸 탓이다.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 건, 어쩌면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사실 세평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매우 주관적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사람됨'으로 기억하고, 또 누군가는 '업무 를 대하는 태도나 능력'으로 해석한다. 인사철이 되면 "그 사람 어때?" 하고 묻는 이가 있고, "어떻다"라고 답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 정작 입에 오르내리는 그 사람을 제대로 겪어본 이는 드물다. 그러면서 너무 쉽게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세평은 종종 사실보다 먼저 도착하고, 진실보다 더 오래 남는다. 말보다 먼저 도착한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 말의 무게를 안다고 생각했고, 세평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를 안다고 믿었다. 그런데 결국, 내 입에서도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나도 그런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왔다. 좋게 봐주는 기대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고, 괜히 오해받을까 봐 조심하게 될 때도 많았다. 그래서 말을 아꼈고, 거리를 두었고, 때로는 설명조차 포기했다. 그런데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또 다른 오해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배와는 지인들과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다시 마주쳤다. 예전처럼 편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 어색함이 꼭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말을 조심하게 되었고, 남에 대한 평가를 쉽게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요즘은 누군가 다른 사람 이야기를 꺼내면, 가능한 한 듣기만 한다. 굳이 내 입을 거쳐 어디론가 흘러가지 않도록, 말을 멈추는 쪽을 선택한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무심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때로 누군가의 말 속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되고, 또 어떤 순간에는 다른 이에게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말은 그렇게 돌고 돌아, 어느 날은 나를 겨누고, 또 어느 날은 내가 남을 겨누게 만든다.
누구도 세상의 말들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적어도 내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는 흔적이 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