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상, 『이중작가초롱』(2022) 서평
4. 크툴루, 불안, 내면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 혹은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철학과 사상 그 자체만으로는 세계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의 변화는 이에 대응/참여하는 개인들의 행동과 실천을 통해 비로소 현실에 육박한다. 여기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혁신적인 매체와 철학 그 자체와 즉자적으로 동기화되지 않는다. 당대의 정보유통과 전달의 물적 토대 즉 매체를 통해 그것과 연결된다. 동시대적 매체는 사상과 철학을 그 속성에 의거하여 ‘오염’ 혹은 ‘왜곡’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매체는 모종의 정보나 사고체계를 받아들이는 개인이 자신의 존엄과 인격을 유지하기 위해 허구의 (대)타자-관찰자와 일정한 거리와 시차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말하는 문학적 내면의 관습으로 지칭한 ‘혁명의 개인화’ 또한 마찬가지다. 특정 시대의 혁명은 동시대의 수많은 개인들이 매체를 통해 혁명의 의미와 내용을 각자의 위치에서 임의대로 초과하는 수많은 내면의 양상이다. 앞서 살펴본 「이중작가초롱」과 「여자가 지하철 할 때」는 소셜 미디어 시대에도 ‘혁명의 개인화’에 수반하는 내면의 문제가 문학적으로 전혀 낡은 주제가 아님을 시사한다. 소셜 미디어를 매개로 한 ‘문화혁명’에 연루되거나 참여하는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난맥상을 ‘혁명의 개인화’와 관련된 문학적 형식으로서 심문하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를 매개로 벌어진 문화운동이 개인의 감응(affect) 없이 가능했을 리 만무하다. 그 운동이 대부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전개를 보이는 이유는 각자 나름대로 그 혁명의 의미를 임의적으로 조정한 수많은 내면들이 시차 없이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소셜 미디어라는 매체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 대한 되먹임(feedback)으로 증식하는 탓이다.
내가 생각할 때 이에 가장 가까운 결정적인 문학적 이미지는 러브크래프트에 의해 창조된 크툴루이다. 우엘벡은 크툴루를 이십 세기말 서구사회의 물질적인 네트워크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 있다.
오늘날 지구의 표면은 전부 인간이 돈으로 만든 고리들이 불규칙한 밀도를 이루는 네트워크로 덮여있다.
이 네트워크 안에는 사회라는 생명선이 흐른다. 사람과 상품, 식료품을 실어 나르는 교통수단과 끊이지 않는 거래, 판매주문과 구매 주문, 서로 교차하는 정보들, 이전보다 훨씬 더 엄격해진 지적 또는 감정적 교류……. 이렇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흐름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마치 움찔거리는 시체와 같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이러한 네트워크 속에서 고리들이 조금 더 느슨하게 연결된 곳에서는 “지식에 굶주려” 갈망하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낯선 개체들의 존재가 간파당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멈춰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즉 지도에 여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가 됐든지 그곳에는 고대 신들이 원래 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를 되찾을 준비를 하며 몸을 숨기고 있다.
크툴루는 러브크래프트에 의해 이십 세기 초에 발견된, 문명사회의 정 반대편에 도사리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의 문학적 원형으로 평가된다. 이십 세기 초반의 어느 순간부터 세계 곳곳에서 정체불명의 공포스러운 존재가 목격된다. 이에 호기심을 가진 문명의 지성들이 이 신비한 존재의 실체를 탐색하지만, 그 실체의 일부와 대면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리는 압도적인 공포에 탐구를 단념하고 만다. 그리하여 크툴루에 대한 지식은 “신화작가와 인지론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광활한 꿈이었으며, 혼혈아와 부랑자 집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경이로운 우주적 상상”이라는, 탐사자 각자가 각종 형식으로 남긴 개인적인 기록으로 편재한다.
이십 세기말부터 본격화된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네트워크 사회로의 전환은 크툴루적인 측면이 있다. 다중/쌍방 연결과 상호작용의 초거대 네트워크의 물질적 토대가 확고히 마련된 소셜 미디어가 보편화된 현재는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대단한 지성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능력으로 네트워크의 전체상을 온전히 재현하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트워크는 이에 연결된 개인들 각자의 인식에 의해, 전체의 일부만이 재현될 따름인 크툴루적 물질체다. “거대한 크툴루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자(電子)의 배열이다. 러브크래프트식 공포는 엄밀하게 말해서 물질적이다. 그러나 우주의 에너지가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거대한 크툴루는 우리보다 엄청나게 더 강력한 영향력과 행동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눈에 봐도 그다지 안심되는 상황은 아니다.” 인간과 크툴루가 전기가 통하는 유기체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 다는 우엘벡의 통찰은, 자기장 원리를 응용하여 스마트폰 스크린 터치로 연결되는 소셜 미디어 시대의 네트워크를 예견하는 듯하기까지 하다.
네트워크 사회로 결정되어 가는 사구문명의 불안을 크툴루적인 차원에서 선도적으로 예표한 1990년대 이후의 우엘벡은 1960·70년대 세계의 해방을 꿈꿨던 프랑스 백인 남성의 ‘혁명의 개인화’의 양상을 문학적으로 포착한다. 『투쟁영역의 확장』의 서술자인 서른 살의 백인 남성 정보기술자 화이트칼라 ‘나’는 프랑스 나아가 세계를 잠식하는 자본주의 정보 네트워크 체제에 예속된 무기력한 부품이다. 그는 자신이 복무하는 정보사회 네트워크화가 말하는 자유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언젠간 우리는 문명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다. 그는 회사 내에서 정보의 유통 증가가 자신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자유가 개인 간, 계획 간, 조직 간, 서비스 간의 다양한 상호 연결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최대한의 자유는 최대한의 선택 가능성과 일치한다고 했다. 고체 역학에서 빌려온 것으로서, 그는 이런 선택을 ‘자유의 단계’라고 불렀다.
‘나’가 파악하는 정보사회는 개인에게 최대한의 물질적인 자유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일견 쾌적하고 유익한 체제다. 자신의 위치에서 선험적으로 세계와 연결된 채 자신의 욕구를 즉각적으로 자유롭게 활성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나’는 갈수록 평평하게 연결되는 세계의 중심인 서구 문명의 따뜻한 양지(파리)에서 동물적인 쾌락을 향유하며 쇠퇴한다. 이는 『투쟁영역의 확장』의 ‘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로토닌』의 서술자 프랑스 농업 관료 엘리트인 클로랑클루드 라브로스트는 화학적인 요법을 동원해 가면서 쇠퇴해 가는 동물적 욕구에 충실한 삶을 유지한다. “이제 우울증 환자들은 이전 세대의 환자들과 달리 [세로토닌 수치를 조절하여] 자살이나 자해 경향에 함몰되지 않은 채, 발전된 사회 속에서 정상적인 삶에 필수적인 의례들(몸단장, 원만한 이웃관계로 축소된 사회생활, 간단해진 행정절차)을 전에 없이 원만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나는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우엘벡의 관심 그리고 이후 그가 천착한 문학적 문제가 『이중작가초롱』에 수록된 후반기 소설들(「살인자들의 무덤」, 「무릎을 붙이고 걸어라」,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앞서 읽어본 초반부 소설이 동시대 한국사회의 ‘혁명의 개인화’의 다양한 양상을 다뤘다면, 후반기 소설은 그들이 지각하는 심연과 참혹함과 관련된 원초적인 감각의 글쓰기로 읽힌다. 여성 살해에 대한 여성의 공포와 관련된 컬트적 독백(「살인자들의 무덤」), 십자가 아래 가려진 십대들의 카니발(「무릎을 붙이고 걸어라」), 수렵이 허용된 울창한 숲 속에서 무법과 폭력 안에서 여성들의 불안한 정동(「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은 동시대 개인의 내면에 도사리는, 실체를 알 수 없지만 모두가 동시에 지각한다는 의미에서 크툴루적인 것을 지각하는 현존재들의 불안이 반영된 목격담이다.
내가 읽은 『이중작가 초롱』은 이렇듯 동시대 ‘혁명의 개인화’와 관련된 참혹한 내면과 심연에서의 욕동의 양상들로 가득하다. 나는 아직 한 편의 소설을 짚고 넘어가지 않았는데 바로 「티나지 않는 밤」이다. 이 소설은 고졸 간호조무사 수진이 글쓰기를 통해 사적인 자기만의 내면을 가꿔가는 일화를 포착한다.
수진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주관이 확실하지 않은 수동적인 인물로 오해받는 인물이다. 개인병원이라는 작은 세계의 ‘주인’으로서 자기 직원들을 화초처럼 통제하고 꿰뚫는다는 원장이나 실패한 예술가 애인 같은 자의식과잉인 남성들은 이러한 성향에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부하직원의 돌발행동에 평정심을 잃고 얼굴에 분무기를 뿌려대는 원장이나 허장성세가 전부인 흔해 빠진 예술가 지망생 남자 친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건한 자의식을 지닌 인물이다. 시시한 나르시시즘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하루 새로운 단어를 익히면서 “새 말을 기입하는 건 새로운 세계를 들여오는 일”이라는 자기 원칙을 매일매일 지키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수진만의 영역이다. 수진은 우연히 자신의 습작 노트를 발견하고 내려다보듯 이를 비평하는 애인과 단호히 이별한다. 자신을 규정하는 단편적인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내적인 자기 영역을 가꿔나가는 그녀의 태도는 초롱이나 「여자가 지하철 할 때」의 수진과 같은 동시대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겉으로는 ‘티 나지 않는’ 수진의 내적 글쓰기 원칙이 투고자의 글에 대해 악담에 가까운 신랄한 비평으로 인터넷에서 ‘까이고 있는’ 작고한 편집자 K의 코멘트를 원천으로 한다. 생전 투고자를 향한 K의 맹렬한 비판이 온라인상에서 그의 죽음을 희화화하는 말의 향연으로 증식하는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생전 K는 투고자들의 원고를 코멘트 한 마지막에 의문의 숫자를 기재했는데 수진은 K와 만남에서 그것이 “초과근무 수당을 받지 못한 노동시간을 표시한” ‘아무도 모르는 저항’의 표식임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진과 K의 관계는 그렇게 끊기고 말았지만, 어느 한순간 열린 K의 ‘티나지 않는 저항’이 수진의 내면에 “구부러지고 조각나 이리저리 엉뚱한 데 붙다가 결국 그녀에게 흡수되”는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티나지 않는 밤」은 ‘혁명의 개인화’와 관련된 매체적 조건과 관련된 동시대 개인의 내면의 향방이 자신에게 우발적으로 도착한 타인/타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미상의 첫 번째 소설에서 위대한 사건이나 인물형을 관찰자로 상정한 인물들 그리고 무분별하게 연결된 익명의 관찰자들의 침범에 자리를 내준 내면은 침범하는 타자에 의해 침혹함과 불안을 껴안는다. 그에 반해 수진은 자신에게 도래한 타인과의 우연한 연결이라는 ‘티 나지 않는’ 사건 이후로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의 원칙과 영역으로 충만한 문학적 내면을 얻는다.
주변부적 개인이 글쓰기로 지극히 사적인 내적 충만함의 장소로서 내면을 갖게 된다는 독해는 문학적 내면에 대한 다소 보수적인 관점이다. 「티나지 않는 밤」에서 느껴지는 다소 보수적인 교훈과 내적 충만함으로 이미상의 첫 번째 소설집 전체를 갈음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갈수록 ‘온전한’ 자신의 내면을 사수하기 난망한 매체적 조건에서 타인/타자와의 만남과 거리를 통한 개인의 내면 형성의 문제가 여전히 유효한 문학적 과제임을 시사한다. 이 소설은 총 여덟 편의 소설 중 다섯 번째 소설이다. 이는 「티나지 않는 밤」이 이 글에서 내가 분류한 전반부와 후반부 어느 쪽으로도 읽힐 수 있거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고 정중앙의 포지션을 차지할 수도 없다. ‘여덟 개중 다섯 번째’라는 위치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나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소설인 「티나지 않는 밤」을 소설집 후반부에 가까운 애매한 중간에 배치한 선택이 썩 근사하게 느껴진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