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다섯 살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남의 집에 셋방살이를 들어갔다. 모두 합쳐봐야 30호 정도 되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주인댁 아주머니는 ‘성내’에서 시집을 왔다고 해서 남들은 ‘성내댁’이라고 불렀다. 아주머니는 키가 크고 아저씨는 그보다 작았다. 흑백 결혼사진을 찍을 때 아저씨가 베개 위에 서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어머니와 아주머니께서 깔깔 웃으시던 기억이 난다. 아저씨는 벼슬아치가 입던 사모관대를, 아주머니는 공주나 옹주 등 상류층이 입던 활옷을 입으셨는데, 혼례 때만큼은 백성에게도 허락되던 옷이라고 했다.
어느 날, 성내댁이 허리에 커다란 자루를 동여매고 키 큰 감나무 위에 올라가셨다. 우리에게는 감이 떨어지면 옆 바구니에 주워 담으라고 소리치셨다. 나는 주인집 아이들과 감을 줍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쾅’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내 등을 강하게 내리쳤고,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놀란 아주머니가 감나무에서 내려와 내게 달려왔다. 성내댁이 끈으로 묶은 감 자루를 놓치면서 그것이 내 등을 강타했고, 나는 그 충격에 쓰러지면서 하얀 사금파리에 오른쪽 손목이 날카롭게 찢긴 것이었다. 손목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찢어진 살 밑으로 하얀 뼈가 징그럽게 드러났다. 성내댁의 외마디 소리에 우리 어머니가 달려오셨고, 내 손목을 보신 후 곧바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평소에 아끼시던 비단 치마를 찢어 내 손목을 동여맸다. 그리고 나를 들쳐업고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등은 매우 넓고 따뜻했다.
하루에 버스가 네 번 들어오는 시골 마을에 병원이 있을 리 없다. 어머니는 동네 ‘약방’을 향해 달리셨다. 약방 아저씨는 의약품 조제 자격은 없었지만, 군대에서 의무병으로 근무했던 터라 그 분야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과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아저씨는 낚싯바늘 모양의 바늘에 실을 꿰어 세 군데를 꿰매기 시작했다. 마취를 하지 않고 하는 일이라 정말 죽을 것처럼 아팠다. 어머니는 지금도 당시에 내가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울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흉터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다른 어느 날, 나는 부잣집인 월곡댁 네가 논에 물을 대는 광경을 구경하러 갔다. 물레방아 바퀴와 비슷하게 생겼고, 사람이 밟아 돌리면서 물을 퍼 올리는 물자새(무자위) 위에서 오른발과 왼발을 번갈아 가며 물자새를 밟고 있는 형들이 보였다. 능숙하게 발을 놀리는 형들의 모습이 마냥 신기해서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강제로 들어 물자새 위로 올렸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바퀴를 돌리는 일이 쉽지 않았고 자꾸 헛돌았다. 내려오려는데 그 형이 막아서는 바람에 실랑이 끝에 발판에서 미끄러지면서 도랑에 처박혔다. 팔이 꺾였는지 심하게 아프면서 금세 부어올랐고, 모양마저 뒤틀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팔은 더 심하게 부었다. 어린 마음에 팔을 끈에 묶어 천장에 매달아 놓고 굽은 팔이 펴지기를 기다리는데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보시고 깜짝 놀라셨다. 얼마 후, 동네 ‘단골에미’인 ‘무실댁’이 찾아와 ‘잔밥 먹이기’를 했다. 됫박에 쌀을 담고 보자기로 싸서 내 팔에 대고 문지르며 주문을 외웠다. 무실댁은 쌀이 주먹 하나만큼 들어간 것을 보여주며 귀신이 잔밥을 먹고 갔으니, 저녁쯤에는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밤이 되었는데도 내 팔은 두 배나 더 부어올랐다. 약방 아저씨가 오시더니 팔이 부러진 것이라며, 산 너머 ‘반암마을’에 뼈를 이어 맞춰주는 용한 사람이 있으니 어서 가보라고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업고 관솔불을 든 동네 청년의 도움을 받아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캄캄한 산을 넘으셨다. 그때도 우리 어머니의 등은 한없이 넓고 따뜻했다. 어머니의 거친 숨소리와 땀에 젖은 등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이제 우리 어머니의 등은 이놈을 업을 수 없을 만큼 굽었고 너무나 좁아 보인다. 무슨 힘으로 나를 업고 뛰셨는지 모르겠으나 전깃불이 없어도 좋고, 무명 치마를 찢어 손목을 동여매도 좋고, 마취 없이 꿰매거나 팔목을 맞춰도 좋으니, 진정 그때의 당신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인가?
주1) "단골에미'는 '단골무당'의 전라도 방언으로 '단골'은 원래 남부지방의 세습무를 지칭한다. 무당을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손님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지금은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가게나 손님을 뜻한다.
주2) '잔밥 먹이기'는 한국 무속신앙에서 특정 질병이나 불운의 원인을 찾아내고 치료하기 위해 행하는 의례의 일종이다. 갑작스러운 두통, 복통, 오한 등, 알 수 없는 질병의 원인을 '잔밥각시'라 불리는 존재의 탓으로 여기고, 잔반을 먹여 병을 고치고자 하는 치유 의례이다.
* 위 글은 월간 수필문학 2025년 11월호(통권399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