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6화 경양식집 리자(Liza)(1)

영석은 정독도서관에 갔다가 자리가 없어 남산도서관으로 갔다. 그러나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터덜터덜 남산을 걸어 내려와 한남동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버티고개를 넘어 약수동에 당도하니 마침 기자촌에서 옥수동까지 운행하는 154번 제일여객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고 있었다. 영석은 옥수동에 살고 있는 사촌 형네 집에 가보기로 했다. 금호시장을 지나 옥수동에 내려서 왼쪽 언덕길을 오르니 영석의 사촌 형네 가족이 살고 있는 초라한 집이 보였다.

사촌 형, 지석은 영석이 큰아버지의 첫째 아들이다. 형은 서울대 출신이다. 그러나 병역기피자라 변변한 직업 없이 형수가 회사나 공장 등에 도시락을 대주는 도시락 장사를 해서 벌어오는 돈으로 살고 있다. 형수는 국민학교만 마친 사람이지만, 얼굴도 예쁘고 음식 솜씨가 아주 출중했다. 집안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큰아버지가 형수의 착한 마음씨와 예쁜 얼굴 때문에 결혼을 시켰다고 한다. 영석이 보기에 형은 형수와 대화를 잘 안 하는 눈치다. 그러나 여하튼 4명의 자식을 두었으니, 사랑을 하는 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형은 6.25 사변이 일어나기 전, 북한의 함흥에 살 때 일본인만 다닐 수 있었던 함흥제일공립소학교(咸興第一公立小學校)에 다녔다고 한다. 큰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사람들은 모두 북한을 ‘북한’이라 하지 않고 항상 ‘이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영석은 형에게 그 이유에 관해서 물은 적이 있다.

“해방 직후 남한에서는 북쪽 정권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한반도의 북쪽 지역이라는 뉘앙스를 담아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쪽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지”

“1945년 해방 직후 미군정과 언론에서는 주로 ‘북조선’, ‘북조선 지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되고서도 우리 남한 정부, 즉 대한민국은 북한 정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 문서와 언론에서 ‘북조선’ 또는 ‘북한’이라는 지리적・비국가적 명칭을 사용했던 거지”

영석은 형의 조리 있는 설명을 듣고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보다 구체적으로는 1953년 정전협정으로 인해 남북을 나누는 군사분계선이 확정됨에 따라 남한 사회에서 ‘북한’이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 그때부터 ‘북조선’이라는 말은 점점 줄고 정치적으로도 국가성을 부정하는 뉘앙스를 지닌 ‘북한’이 공식적・일상적으로 굳어진 것이고, 북한 역시 남한을 ‘남조선’이라고 부르고 있는 거야”

형이 다녔던 함흥제일공립소학교는 조선인 중에서도 친일파나 상류층 자녀에게 특별히 입학을 허락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형은 큰아버지가 함흥질소비료공장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그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그 학교에서 모든 일본인을 따돌리며 항상 1등을 했다고 한다.

형이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에 대해서는 엄마나 집안사람들이 자주 이야기 해주셨고 형의 필체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형이 영어나 일본어로 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너무 부럽고, 우러러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석이가 기억하는 형의 또 다른 모습은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이다. 형수는 영석이가 찾아가면 형에 대해 흉을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불만은 형이 매일 찾아가서 술을 마시는 금호시장의 순댓국집주인아줌마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석이가 판단하기에 형수의 불만은 필시 그 주인아줌마 얼굴이 반반하다는 데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올해 설날을 앞두고 인사차 형네 집을 찾았을 때 “너도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나랑 막걸리 한잔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시며 데려간 곳이 하필 금호시장 순댓국집이었다. 영석이 추측한 바대로 아줌마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아주머니 여기 순댓국 두 그릇과 막걸리 한 주전자만 주시오”

“그리고 술값은 치부책에 달아두시오”

“아유, 오늘도 외상이셔? 그런데 이 총각은 누구신가? 못 보던 분인데”

“내 동생이오, 이놈이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갈 놈인데, 떨어져서 재수하고 있소, 그렇지만 내년에는 반드시 붙을 거요”

형은 형이 자신을 사촌 동생이라 하지 않고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에 감동했다. 그놈의 피가 무엇인지 4촌이라는 두 글자가 붙으면 괜히 멀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형님을 닮았으면 당연히 공부를 잘하겠지, 형님은 우리 동네에서는 모두 선생님이나 박사님이라고 불러요”

“박사는 무슨 내가 언제 아는 체를 많이 합디까?”

“아이고 제가 순댓국 장사나 한다고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요?, 이곳 시장 사람들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는데요, 뭘”

주인아줌마를 비롯한 시장 사람들은 형이 병역기피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박정희 정권이 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병역은 ‘국민의 신성한 의무’로 강조되고 있고, 1968년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64년부터 1973년까지 계속된 베트남 파병, 1975년 이후의 유신체제 등으로 인해 국민의 안보 위기의식이 매우 큰 시기다. 따라서 군 복무 여부는 단순한 개인 문제가 아니라, 애국심·남성성・충성심의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형이 병역기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히 비겁자・배신자・이기주의자・사회 부적응자로 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박사님’이고 ‘선생님’이고 나발이 고는 없게 될 것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형은 순식간에 ‘진짜 사나이’에서 ‘가짜 사나이’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재벌가·유력 정치인 자녀·유명 인사의 병역 특혜 문제가 간헐적으로 불거지고 있지만, 언론 통제가 심하고, 병역 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일반 대중은 일반인 병역 기피자에 대해서는 강한 비난을 가하지만, 권력층 자제들의 병역 면제는 은폐되어서 모르거나 그러한 사실이 알려져도 불만을 속으로만 품는 분위기인데, 형은 재벌이나 유력정치인, 유명인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이 시장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막걸리 마시다 몰매를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형은 동생 앞에서 체면을 세워주는 아줌마의 말에 대꾸를 하면서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영석은 두 분의 대화를 들으면서 형수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영석은 순댓국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둘이 나누는 대화나 태도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형은 양재기에 담긴 막걸리로 입을 축이더니 함흥에 살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형의 말에 따르면, 일본은 소학교와 보통학교를 구분하여 식민지 조선의 교육정책을 차별적으로 운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정책의 주요 목적은 조선인에게는 낮은 수준의 교육만을 제공하고, 일본인에게는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보장하여 민족 간의 차별과 지배를 강화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인은 6년제 소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만, 조선인은 4년제 보통학교를 다녀야 했으며, 커리큘럼도 일본인에게는 일본의 국어, 역사, 지리 등을 중심으로 구성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조선인에게는 기초적인 읽기, 쓰기, 산술 능력만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었는데, 이 때문에 조선인은 사회진출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이 모든 것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공고히 하는 수단이었다고 했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는 분이라 항상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날만은 형은 달변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영석은 시장 사람들이 형을 박사님이나 선생님으로 부르지 않나 싶었다.


영석은 형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일본이 이처럼 이원적인 교육 시스템을 통해 조선인들을 단순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로 양성하려고 한 데는 지식인 계층이 형성되어 민족의식이 고취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 저것 가족들에 관해 다른 궁금한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형은 영석의 모든 질문에 막힘이 없었다. 그 덕분에 영석은 왜 친할아버지도 아닌데, 자신의 집에서 논실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항상 궁금하게 여겨온 문제, 즉, 형이 왜 병역기피자가 되었는지는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형네 집에 들어서자 “아이고 도련님 오셨네”하며 형수가 반갑게 맞이했다. 형수는 언제 찾아가도 영석을 이물 없이 대해줘서 형수가 사는 집은 열린 대문집 같았다.

“어 삼촌 왔네, 어서 들어오셔” 형의 둘째 딸 경숙이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영석이와 형은 나이 차이가 상당했기에 형의 첫째 딸인 조카 정숙은 영석이보다 두 살 위였고, 경숙이는 영석이와 동갑이지만, 조카인지라 영석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도련님 식사 안 했지요? 조금만 기다려요, 얼른 밥 차려드릴 테니”

“그런데 삼촌은 어디서 오는 거야?”

“응 정독도서관에도 남산도서관에도 자리가 없어서 오랜만에 형수님이나 너희 얼굴도 볼 겸 밥 얻어먹으러 왔지?”

“아이고, 나도 아침 일찍 도시락 장사하고 막 들어왔는데 마침 잘 되었네요”

형수는 서둘러 점심을 준비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쌀밥 냄새가 영석의 코를 자극했다. 고소한 잡채 냄새며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도시락 위에 얹어 와서 먹던 크라운 햄 굽는 냄새를 맡으니 너무나 행복했다.

“도시락 싸며 남은 것들이에요. 어서 드세요”

그 순간만큼은 영석에게 형수가 천사처럼 보였다.

“그런데 삼촌 여자 친구 있어?”

같이 밥을 먹고 있던 경숙이가 말을 걸었다.

“에이, 내 처지에 여자 친구는 무슨?”

“우리 삼촌은 샌님 같아서 여자 친구 없을 거야”

“그럼, 모레 정오까지 이태원에 있는 ‘리자(Liza)’라는 경양식집에서 나 돈가스 좀 사줄 수 있어, 오랜만에 칼질 좀 해보게”

영석은 당황스러웠다. 누나에게 용돈을 타 쓰는 형편에다가 경양식집이라는 곳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가끔 양식 먹는 예절을 가르쳐 준 적이 있지만 포크와 나이프 잡는 법조차 헷갈리는데 이걸 어찌하나 싶었지만, 그동안 얻어먹은 밥값을 생각하더라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 경양식집을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주 쉬워, 남산에서 한남동 방향으로 걸어 내려오다가 이태원 188번지야, 금세 찾을 수 있을 거야, 버스는 80번 버스를 타면 돼”

“삼촌이 무슨 돈이 있다고 비싼 경양식을 사달래?”

“엄마, 이제 우리도 성인이고 삼촌에게 경양식 한번 얻어먹는 게 큰 문제가 되나?”

경숙이가 명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형수님, 저 그 정도의 돈은 있어요”

영석은 허세를 부리고 있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경숙이와 만나기로 한 날, 영석은 아끼고 아끼던 천 원을 주머니에 넣고 이태원에 있는 ‘리자(Liza)’라는 경양식집을 찾아갔다. 이태원은 미군 부대와 외국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서울의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이국적인 클럽, 바, 상점들이 즐비했고, 리자는 그 중심에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경양식집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경양식집은 서구 문화를 경험하는 ‘모던한’ 공간이자, 특별한 날이나 데이트를 위한 장소로 여겨지는데, 영석은 처음 와보는 곳이라 너무나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아 안으로 들어서면서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붉은색과 갈색 톤의 인테리어, 은은한 조명, 그리고 잔잔하게 흐르는 팝 음악은 영석의 마음을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주눅이 들게 하였다. 버터에 눌린 양파 냄새와 튀김 냄새 그리고 데미글라스 소스의 달착지근한 향이 어우러진 독특한 향이 느껴지면서 영석의 배는 요동쳤다. 브라운소스를 듬뿍 끼얹은 바삭한 돈가스와 부드러운 함박스테이크를 먹어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삼촌 여기야”

경숙이가 창가에 앉아서 경양식집에 자주 와본 듯한 자세를 하고서 영석을 불렀다.

“그래, 일찍 왔구나”

경숙은 밝은 톤의 원피스로 한껏 멋을 낸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안 오지?”

경숙은 누군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누구 다른 사람이 또 오기로 했니?”

영석은 갑자기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어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천 원이 잘 있는지 확인한 후 꼭 움켜쥐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삶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