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로운학교네트워크 May 09. 2024

교사여, 정치하라

시론 / 양재욱_작은학교 연대 대표

  학습은 정치를 위한 것이다. 정치는 임금이 누리는 것을 백성이 누리는 여민동락을 위한 것이다. 여민동락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인간다운 삶의 길이다. 그러하니 학습은 즐거운 것이고, 그런 세상을 위해 함께 하는 동지는 소중하다.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사람다운 길을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가르치고 배우는 자의 길이며, 제대로 정치하려는 자의 길이라고 ‘논어’는 그 첫 장 ‘학이’ 편에서 말하고 있다.(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맹자’에서는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 백성을 죽이며 전쟁을 하는 것이 좋은 정치가 아니라 백성의 삶이 풍요로워지도록 하는 것이 정치라는 이야기로 그 문을 연다.(孟子對曰,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공자도 가르치는 자이며 맹자도 가르치는 자이다. 그 위대한 스승은 가르침을 통하여 좋은 직장을 구하려 한 것이 아니라 좋은 정치를 이루려 했다. 사서의 하나인 대학의 첫머리도 정치하는 자의 배움의 도에 대하여 말한다. 배움이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삶이 나날이 좋아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극히 행복한 세상에 백성들이 머물러 살게 하는 것이 그 배움의 길이라 말하고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중용에서도 ‘敎(교)’는 사람다운 삶의 길을 닦는 것이며 그 삶의 길은 사랑하고 정의로운 우리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라 하고 있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동양의 사유에서 배움은 정치와 떨어질 수 없고, 배움은 사람다운 삶과 떨어질 수 없고, 정치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하는 것이다. 교사는 단지 일꾼을 양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하여 사람답게 사는 길, 사람답게 정치하는 길을 밝히는 존재라고 동양의 사유는 말한다. 2500년 전에도 정치와 우리의 삶이 떨어질 수 없었고, 교육이 정치와 우리의 삶과 분리될 수 없었다. 교육이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정치를 할 때 아이들이 살아갈 지극히 행복한 세상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행복할 수 없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저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옆 친구들이 바닥을 깔아줘야 내가 1등급이 될 수 있고, 옆 친구가 망해야 내가 흥할 수 있다. 옆 친구를 이기면 또 이겨야 할 대상이 나타나고 그 경쟁은 끝이 없다. 곧 저주의 마음도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살고 마지막 승자가 되더라도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삶의 과정 없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한국개발연구원은 2017년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고등학교란 당신에게 무엇인가?’라는 항목에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의 답은 사활을 건 전장(80.8%), 함께하는 광장(12.8%), 거래하는 시장(6.4%)이었다. 똑같은 질문에 사활을 건 전장이라고 답한 다른 나라 대학생들의 비율은 중국 41.8%, 일본 13.8%, 미국 40.4%였다. 이 경쟁이 대학과 그 졸업 후의 삶까지 이어진다면 우리는 삶마저도 전장이다. 불행할 수밖에 없다.


  행복하려면 경쟁이 아니라, 저주가 아니라, 협력이어야 하고, 축복이어야 한다. 네가 성공해야 내가 성공하고 내가 행복하면 너도 행복한 세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에 어울리는 것이다. 본성에 맞게 살아야 행복해지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정보는 서로 협력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협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인간 카인드’에서 ‘모든 비극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되었다.’라며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이라 학문적으로 말하고 있다. 맹자는 4단을 말하며 인간은 ‘측은지심’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타고난다고 했다. 서양의 학문에서 동양의 철학에서 인간의 본성은 협력하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아이들이 경쟁의 전쟁터에서 벗어나 협력하고 사랑하게 하는 일, 그것이 본성을 따르는 가르침이다. 그러니 교사는 학문하고 철학 하며 삶을 이끌어야 한다.


  치열한 경쟁을 이끄는 사회의 구조가 있다. 바로 불평등이다. 우리나라의 소득 양극화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대기업 평균임금은 563만 원인데 중소기업의 평균임금은 266만 원이었다. 대기업의 임금이 중소기업의 임금의 2배보다도 더 많다. 이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 중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2018년 OECD가 발간한 ‘사람과 일자리의 연계: 한국의 더 나은 사회 및 고용보장을 향하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미국(25.02%), 아일랜드(24.00%)에 이어 23.7%로 OECD에서 3번째로 높았다. 저임금 노동자란 중위 임금의 3분의 2 미만을 버는 노동자를 말한다. 소득 최상의 10%의 소득을 최하위 10%의 소득으로 나눈 소득 불평등도 또한 OECD에서 3번째로 높았다. 불평등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며 자살률은 최상위에 속한다.


  토마 피게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의 수익률과 노동의 수익률의 연구 결과를 내놓으며 양극화가 일어나는 그 원인을 밝히고 있다. 그대로 놓아두면 자본을 가진 부자의 이익은 점점 커지며 빈부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극화를 좁히기 위해서는 분배를 정의롭게 하는 정치가 필요하고 그 정책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의 정치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이클 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하나의 원칙이나 절차가 있어서, 그에 따라 소득·권력·기회를 정당하게 분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말하며 ‘공정한 삶을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자고 한다. 그리고 공립학교의 시민교육을 강조한다. 시민의 정치참여가 정치를 도덕적으로 만들 희망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정치를 바로잡는 방법이다.


  학교에서의 경쟁, 사회에서의 경제적 수준에 따른 차별은 삶을 두렵게 한다. 마치 전장처럼 말이다. 나도 삶기 힘든 세상에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심리적 부담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제 등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부담이기도 하다. 그런 현실은 우리나라의 인구를 급격하게 감소시키는 핵심적인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통계청 인구 동향 조사를 보면 2013년 출생아 수는 436,455이며 2022년 249,186명으로 줄어든다. 10년 만에 거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합계 출산율은 2023년 0.720 (잠정치)로 세계 최하위다.

  사는 장소마저 사람을 차별하는 원인이 되고 서울을 향한 욕망은 거세졌다. 서울 안의 대학에 가야하고, 서울에 살아야 하는 것을 넘어 서울 중에서도 강남에 살아야 하고 강남 중에서도 더 비싼 집에 살아야 더 존중받는 세상이 되었다.


  사는 곳에 따른 차별은 지방의 소멸을 가져오고 있다.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방소멸에 대응하고자 2021년 89개의 시·군·구 인구감소지역을 지정·고시했다. 전남 16개, 경북 27개, 강원 25개, 전남 20개, 경남 14개 등에서 그 수가 많았다.


  지방의 인구가 줄면서 학교들도 폐교되었다. 1982년부터 2021년 3월까지 40년간 폐교된 학교는 3,855개교이다. 그중 전남 833개교, 경북 732개교, 경남 582개교, 강원 464개교, 전북 326개교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폐교 수는 총 2,473개로 전국 폐교 수 대비 64.1%를 차지한다. 반면 서울 소재 폐교 수는 40년간 3개교였다.


  지방의 학교 소멸은 지금도 심각한 수준이다. 2024학년도 초등학생 입학생 0명인 학교는 모두 157개 교로 전북 34개교, 경북 27개교, 강원 25개교, 충남 12개교, 경남 12개교 등 지방에서 그 수가 많다. 학교가 없어지면 젊은 사람이 돌아오기 힘들다. 지방의 소멸과 폐교는 서로를 강화한다.


  2000년대 초반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를 살리려는 교사들의 자발적인 운동은 학교를 다시 살려내는 성과를 내었고 그 학교들을 중심으로 ‘작은학교교육연대’가 만들어졌다. 이후 그 운동은 교육 혁신 정책으로 또 각 교육청의 작은 학교 살리기 정책으로 이어지며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학교혁신이나 교육과정 혁신으로 인구감소와 지역의 소멸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인구의 감소와 지방의 소멸이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부와 권력에 따른 세세한 층위와 그에 따른 차별이 현실이 된 우리 사회 전반의 구조와 사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이다. 인간이 가고 싶어 하는 그 지선의 세상은 모두가 공경받는 평등한 중용의 세상이다. 동양의 교육은 직업을 얻고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닦는 수단이었다.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위해 여민동락하는 덕을 기르는 것이 목적이었다. 자본주의와 함께 넘어온 서양의 사상, 서양의 교육을 다시 동양의 인본주의 철학과 학문과 정치와 교육으로 그 폐해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로서의 교사가 아니라 철학하고, 학문하고, 정치하고 그리하여 세상을 바꾸는 스승으로서 교육에 임하는 것이다. 2,500여 년 전 공자는 교육으로 자신과 세상을 날로 새롭게 바꾸어가고자 했다. 세상을 바꾸는 일 그것은 동양 정치의 목적이었다. 교육은 세상을 바꾸어가는 정치이며 나와 우리의 인간다움을 성장시키는 철학이며 학습이다. 그러니 교사여, 철학을 가지고 정치 한 번 해보자.



2024 봄호 목차

1. 시론
2. 특집
3. 티처뷰
4. 이 책 한 권!


매거진의 이전글 미래교육과 생활교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