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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샘 Jul 05. 2022

다시 나를 미워하다

갈망과 망설임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나! 그 갈등 속에서 내가 내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려웠다. 과거의 기억과 관계 속에서의 갈등을 현재 내 정서적 어려움의 이유 삼아 버텨온 세월이 있어 그 세월을 벗어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서 넘어짐도 반복되었지만 그 넘어짐의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넘어짐이 반복된 이유는 내 자신의 어떠함과 직면하고 그 어떠함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고 내가 미워하는 것이 내 과거의 상처라는 핑계가 아니라 내가 수용하지 못한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어려워서였다. 나를 수용하지 못하고 내 자신을 들여다볼 때면 늘 단점만 발견하고 그 단점으로 나를 평가했다. 누군가 나 자신에 대해 물으면 단점을 수없이 열거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단점을 인식하고 있다기보다는 장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던 시기가 있었다.


타인을 통해 들은 장점도 인정하지 못하고 부인했던 시기.

그 장점을 보기엔 나 자신이 너무 작아져있었던 때.

인정하기 어렵고 안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내 마음의 진실.


내가 내 자신의 장점을 보지 못 하고 나를 너무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 미움은 과거를 떠나 현재에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인간관계라는 틀 속에서 다시 반복될 때가 있었다. 내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내담자로 상담을 받으면서도 여러 차례의 상담을 통해 가능했다. 인정했다 다음 회기에 부정했다를 반복하기도 했다. 지금은 상담자로 만나는 내담자들의 모습 속에서도 내가 보낸 지난 순간을 기억하며 그들 옆에 잠잠히 기다리며 서 있으려 노력하고 있다. 나 자신이나 내가 만나고 있는 내담자들, 관계라는 틀 안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 과정이 늘 진행형 일지도 모른다. 순간순간 찾아오지만 잠시 자리를 내어 주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힘을 길러가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이런 내게 정말 나를 다시 한번 미워하고 존중하지 못하며 나 자신의 장점을 찾기보다는 단점에 집중하게 했던 인관관계가 생겼다. 그 인간관계의 갈등 속에서 나는 정말 바보 같이 침묵하고 나 자신을 미워했다. 침묵이 나와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조금은 답답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해해 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다가갔다 상처받고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내가 경험한 그 사람에 대한 내 고백이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줄까, 내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닐까 말하지 않았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부터 시어머니에 대해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흔히 하는 생각으로 며느리감이 흡족하지 않아 그러신가 보다. 내가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흡족하지 못할 이유를 내가 찾을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우리 부부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신혼집도 대출을 받아 준비하고 혼수도 최소한으로, 예물과 예단도 최소한으로. 정말 주어진 형편이 맞게 간소한 출발을 준비했다. 한복도 대여를 하려 했는데 어머니께서 명동에 가서 맞추자고 하셔서 의견 조율하면 섭섭해하실까 맞추기로 했다. 친정어머니는 언니 결혼 때 입은 한복이 있어서 맞추지 않겠다고 하셨다. 넉넉한 결혼 준비가 아니라 부담을 줄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우리 부부의 한복을 맞췄다. 한 번 가서 원하는 한복 옷감과 색을 선택하고 신체 사이즈를 쟀다. 그리고 한복이 나오던 날 다시 가서 입어 보았다. 시어머니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다. 돌아오는 길에 전철역을 걷는데 남편은 어머니에게 무언가 마음이 불편했는지 앞서 가고 나는 어머니 옆에 걸었다. 어머니께서 껌을 씹으시며 “사돈이 노인이라 옷고름이 갈색이라 마음에 들지 않네.”라고 툭 말하셨다. 하지만 친정엄마는 한복을 맞추러 오시지도 않았고 이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순간 너무 당혹스러웠다. 말 보다 표정은 더 많은 걸 내게 보내는 듯했다. 남편이 없는 순간에 이런 말을 하시고 조금은 함부로 대하시는 듯 한 태도와 말들이.


지금도 이 순간을 기억하면 ‘왜 아무 말을 못 했을까 바보같이’라는 마음이 든다. 이게 시작이었다. 결혼 준비과정부터 시작해서 늘 며느리는 가족이 아닌 듯했다. 새로운 관계 형성이 나를 다시 들여다보게 했고 관계의 문제로 인해 나는 또다시 나 자신을 미워할 기로에 서게 되었다. 결혼을 통해 새롭게 얻은 관계 중 가장 큰 행복은 “아버지”였다. 고등학교 때 친정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결혼을 하면서 다시 아버지라는 대상을 대하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계시지만 늘 따뜻하고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목회자로 존경받는 분이셨다. 아버님이 떠나신 지 벌써 6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 곁에서 보내주셨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 순간들이 계속되고 있다. 아버님이 하셨던 행동, 웃음, 말씀, 함께 했던 순간들 모두 말이다. 손자, 손녀를 너무 사랑하시고 아이들을 인해 기쁨을 못 이기시던 그 모습을 어찌 잊으랴. 아프실 때도 주말에 아이들과 찾아뵈면 병원 멀고 아이들 데리고 힘들다고 오지 말라셨던 아버지. 수화에 능통하지 못한 며느리와 필담을 나누며 마음을 나눠주셨던 아버지! 문자를 보내면 정말 진심을 담아 장문으로 답을 해주셨던 아버지셨다. 어머니와는 너무 다른 분이셨다.


아버님과 나눴던 따뜻한 관계는 어머니와 나누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잠시 그 관계가 좋아지나 싶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으셨다. 식당을 가도 음식이 흡족하지 않고 선물을 해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고, 용돈을 드려도 부족하고. 어머니께서는 “고맙다”는 말을 하신 적이 없다. 친정엄마와 너무 비교가 되었다. 손자 손녀를 대할 때도 그랬다. 아이들 백일에도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았다. 무엇을 받아서가 아니라 마음을 원하는 건데 조금은 섭섭했다. 외할머니와는 달랐다. 남편도 섭섭했는지 표현을 하기도 했다.


이건 시작이다. 이런 관계의 조각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섭섭했다, 화가 났다를 반복했다. 아이를 출산했을 때도 미역국 한 번 끓여주신 적이 없다. 첫 째 출산 전 첫 유산을 경험했다. 친정 엄마가 오셔서 미역국을 끓여주고 출산한 것처럼 몸조리 잘해야 한다고 걱정해주셨다. 하혈이 계속되어 집에서 쉬고 있었다. 어머니와 시누이가 죽을 사들고 찾아왔다. 전복죽 하나였다.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첫 째를 돌봐주시고 잠이 들어있던 나는 일어나 어머니를 맞았다. 식사를 하지 않았다며 죽을 먹겠다고 하셨다.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당황하셨다. 유산한 사람 몸도 안 좋은데 누가 죽을 차린단 말인가? 베이비시터는 아이 돌보는 일 외에는 하지 않는 것이 계약 사항이다. 그래서 내가 차려드린다고 나섰고 이모님이 몸도 성하지 않은데 어찌하냐며 자신이 차려주셨다. 고모는 어머니가 권하는데도 곤란했는지 먹지 않는다고 했다. 어머니가 가시고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너무 하시네. 얼른 누워요.”라고 말하며 내 마음을 읽으신 듯 아무 말 없이 식사한 설거지를 해주셨다. 죄송했다.


첫 아이 출산 후 3년이 되던 해 겨울, 다시 두 번째 유산을 경험했다. 진료를 보고 계속되는 하혈 때문에 집에서 쉬고 있었다. 유산 3일째 주말이었다. 남편이 우울한 내 기분을 챙겨주었다. 어머니께서 남편한테 전화를 하셨다. “교회에서 절인 배추 가져와라.” 아무 말도 없이 그 말을 먼저 하신 어머니. 당황한 남편은 무슨 소리냐며 물었다. 교인이 절인 배추를 교회에 가져다 두었다고 가져와서 김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리 연락도 없었던 일. 남편은 화를 냈지만 절인 배추를 가져다 드린다고 했다. 그 전화를 받고 나는 집에 있는 것이 가시방석이라 따라나섰다. 남편은 말렸지만 “나 오라시는 거잖아.”라며 함께 갔다. 서로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절인 배추 물을 빼고 양념을 만들었다. 시누이는 외출하고 없었다. 시누이에게도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용실에 간 듯했다. 양념을 다 바르고 김장 김치를 김치통에 넣었다. 모든 일이 거의 끝났다. 남편이 힘들어 잠시 거실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 사이 어머니께서 김치통을 옮기라고 시키셨다. 이건 몸에 너무 무리가 갈 듯했지만 이미 무리가 간 상태니 아무 말 없이 옮겼다. 이 일을 시키실 때는 며느리 몸 같은 건 생각하지 않으신 것일 거니 뭐라 물으랴. 통을 옮기고 여러 용기를 닦았다.


그 즉시  “알타리 절여놨는데 씻어서 양념해야 하니까 씻어라. 절인 건 찬물에 씻어야 한다.”라고 말하신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 무언가 뜨거운 게 올라왔다. 누르고 누르며 싱크대 앞에 서서 알타리를 씻었다. 추운 겨울 찬물에 유산해 좋지 않은 몸으로. 알타리를 거의 씻어 갈 때 시누이가 들어왔고 그 소리에 남편이 깼다. 시누이는 “오늘 김장하기로 했어. 미리 말해주지. 몰랐네. 어머! 왜 이걸 하고 있어?”라며 얼른 장갑 벗으라 난리다. 그 소리에 남편이 깼고 남편은 고무장갑을 벗으라고 소리치며 나를 데리고 나왔다.


그 후 11년간 매년 김장을 친정 엄마와 언니네랑 같이 했다. 늘 시어머니 김치도 담아다 드렸지만, 한 번도 고맙다고는 말하지 않으셨고 친정엄마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표현한 적도 없으셨다. 내가 엄마한테 죄송하고 미안했지만 엄만 아무 말도 없으셨다. 결혼하고 시아버지 첫 생신도 친정엄마가 챙기셨지만 어머니는 아무 연락도 없으셨다. 결혼 12년~ 친정 엄마가 연세도 많으시고 이제 힘들어서 김장 모여하지 말고 각자 하자고 하셨다. 장 보고, 양념 준비에 깍두기, 갓김치 재료 준비. 예전엔 몰랐다. 김장 전날 너무 할 일이 많다는 걸. 이걸 친정 엄마는 맞벌이하는 딸들 고생한다며 혼자 시간 내어 준비해 주셨는데. 올해는 언니랑 우리 집에서 김장을 해 시어머니께 드렸다. 처음으로 고맙다고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기셨다. 나한테 고맙다는 메시지일지는 잘 모르겠다.


둘째 출산 때는 첫째를 잠시 돌봐주시고 일이 있다며 조리원으로 데려다주시며 “괜찮지?”라고 물으셨고 쿠킹 포일에 찐 단호박 작은 두 조각을 싸서 건네주시며 “먹고 남아서 가져왔다.”라고 말하셨던 기억이 난다. 너무 섭섭했다. 아니 조금 슬펐다. 왜 가져왔을까? 그냥 오지. 이렇게 출산을 거쳐 아이 둘을 키우는 결혼 13년 동안 나는 두 아이 출산 후 3개월씩 6개월의 산휴 휴가를 갖고 늘 워킹맘이었지만 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봐주신 적은 없었다. 아버님 사역을 돕고 계셔서 바쁘셨기 때문이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보다는 마음이 없어서가 맞다. 매일 일이 있으신 건 아녔으니까 말이다. 사실 봐주신다고 해도 너무 불편하고 어려웠을 것 같다. 오히려 베이비시터가 편했을 거다. 베이비시터를 써 가면서 일을 했고 어쩌다 시터가 못 올 경우 정말 가끔 몇 시간씩 봐주셨지만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12년간  베이비시터 서비스를 이용했다. 그 시기가 너무 힘들어서 울며 출근을 하고 버스 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던 기억이 있다. 무언가 당연히 잘해야 하는 것 같은 분위기랄까. 친정엄마는 조카를 봐주고 계셔서 내가 뭔가 부탁할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 기댈 곳이 없어서 힘들었다. 그 시기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못 할 것 같다. 시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참고, 인내하고 잘하려 노력했던 내가 미웠다. 그리고 이중적인 어머니 모습을 남편에게 공유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기도 했다. 오히려 많은 다른 시어머니들처럼 다른 사람 앞에서든 아니든 동일하게 화를 내거나 무언가 요구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그랬으면 오히려 상처는 훨씬 적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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