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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샘 Jul 05. 2022

없는 사람

긴 시간 동안 나는 어머니께 언제나 “없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이 “없는 사람”이라는 존재 의미가 어떤 것인지 긴 시간 마음에 담았다. 이 느낌을 처음 느낀 순간에는 내가 새 식구가 되어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거야라고 느꼈고, 어머니도 내가 어색하셔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잦은 “없는 사람”의 존재감이 나에게 다가왔다. 누가 있을 때도, 없을 때도. 누가 있었도 아무도 그런 상황을 나처럼 느끼지 않았는지 아니면 어찌할 수 없어서 침묵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 입장이 아니라 뭐라 쓰는 것이 답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누가 어떠했는지 보다 내가 어찌 느꼈고 사유했는지가 중요하다.


내가 사는 곳과 시댁은 동일 지역이고 가깝다. 그래서 결혼 초기에는 자주 뵈었다. 마음만 먹으면 서로 오가기 어렵지 않은 거리다. 주말을 이용해 자주 만나고 식사도 하고. 시댁에 가면 주로 어머니께서 댁에 계시고 아버지는 교회에서 설교 준비를 하시고 저녁 늦게 오시곤 했다. 늘 아버지를 뵙고 오려고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시댁에 가면 어머니께서 무언가 먹어 보라 권하시는 경우가 있다. 남편에게만!! 나에게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 옆에 있으면 조금 무안하다. 나는 어머니에게 없는 사람이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해도 느껴지지 않는 흐릿한 무엇 같은. 달라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늘 남편만 주고, 건강식품을 주어도 남편만 먹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안 먹었다. 충분히 사 먹을 수 있는 능력과 형편이 되고 내 몫이 아니니까. 아니 너무 무시하는 듯한 그 상황이 싫었다. 남편은 어머니의 반복되는 행동에 나도 좀 주라고 말했다. 그래서 한 번 주셨지만 그 이후 다시 안 주셨다. 사소한 것으로 “너는 우리 가족이 아니야. 너는 내 바운더리의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행동은 12년을 넘겼다.


집안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도 나는 외부인이다. 내가 들을까 봐 남편과 작게 말하거나 내가 가까이 가면 말을 안 하시거나. 난 별로 알고 싶지 않고 관여하고 싶지 않다. 사실 결혼도 부모 양가 부모 도움 없이 준비해 지금까지 내 집 마련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내가 시댁의 재정 상태나 재산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시는 듯했다. 이렇게 나는 새로운 가족을 얻었지만 해야 할 의무만 있고 구성원은 못 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둘째 임신 전에 시에서 운영하는 장애아재활치료센터를 퇴직하고 겁 없이 아동발달센터를 오픈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용감했다 싶다. 가진 자본도 없고, 운영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단지 심리상담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인지치료를 할 수 있는 자격 그리고 이 분야의 경력만 소유한 상태였다. 마음이 맞는 동업자 한 명과 사업을 시작했다. 없는 자본금에 정말 최소한의 비용으로 시작한 아동발달센터였다.


오픈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용자도 적고 힘든 시기에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아니 그런 일을 네가 왜 의논도 없이 마음대로 하냐? 미리 얘기를 했으면 건물 지을 계획 고려해서 하면 좋았을 텐데. 어른들한테 말을 해야지. 중요한 일을 혼자 결정하니? 이런 거 의논하는 것도 못 배웠니?”


숨이 턱 막히고 깊은 어디선가 무언가 올라왔다. 사실 너무 화가 나서 흥분할 것 같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머니~ 이건 제 일이고 제가 왜 이 일을 어머니와 의논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건물 지을 계획은 있지만 언제일지 기약이 없고, 그 일을 저와 의논하신 적도 없으시잖아요. 저는 한 번도 제가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어머니도 저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잖아요. “

차분히 말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없는 사람인 내게 의무만 요구하는 것 같고, 나의 모든 걸 공유하고 뜻대로 해주길 바라는 듯한 이 상황이 숨이 막혀서였다. 어머니는 언짢아하시며 전화를 끊었다. 언제 어른으로 나를 대해주셨는지 잘 모르겠다. 이 날 나는 통화를 마치고 멍하니 앉아 울었다. 화를 참는 것인지 내 마음을 쏟아내서 시원한 건지 잘 모를 느낌이었다. 그날 퇴근해서 남편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며 이렇게 말했어라고 전했더니 “잘했어. 네 말이 다 맞지. 그걸 왜 엄마하고 의논해.”라고 말해주었다. 긴 대화는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입장을 누구보다 이해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그렇게 사업을 시작하고 둘째를 임신해 출산했다. 아이 둘을 키우며 사업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동업자가 있어서 가능했다. 센터를 유지하고 직원들 급여를 주며 유지는 가능했다. 내가 무언가 손에 쥐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휴일 없이 열심히 달렸다. 그런데 동업자가 다른 좋은 기회가 있어 떠나야 할 상황이 되었다. 혼자 사업을 운영하면서 센터는 오히려 더 안정이 되었고 이용자들을 위한 더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확장 이전을 했다. 나에겐  또 다른 도전이었다. 사실 빚을 많이 내면서 걱정도 많았고, 이전 과정도 쉽지 많은 않았다. 그래도 모든 과정이 계획한 대로 잘 진행되고 남편이 많은 도움을 주어 센터는 잘 자리를 잡았고 7년째 같은 자리에서 아이들을 맞고 있다. 그 이후에도 어머니는 건물을 지을 계획을 여러 차례 세우셨지만 짓지 못하셨다. 그 과정에서 센터를 지을 건물로 이전하는 것을 이야기하며 내가 아닌 남편과 이야기하는 이상한 모습을 보이셨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았다. 남편도 자신이 나에게 의견을 물어봤지만 나는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센터 운영을 위한 객관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이전을 거절했다. 내 능력이 되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할 거다. 어머니께서 무언가 해주시는 듯 이전 권유를 하시지만 무엇을 해 주는 걸까 잘 모르겠다. 지역이 달라 센터의 기본이 되는 이용자들도 잃게 되고 인력 확보도 문제가 될 가능성이 많은데 말이다.


늘 없는 사람이었다가 가끔 필요나 의무가 있을 때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가족(뭐라 표현할지 모르겠지만)이 되는 이런 관계는 어찌해야 하는가? 없는 사람에서 존재감이 있는 사람, 가족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노력하고 애쓰면 달라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처음으로 어머니께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문자로. 내심 어머니와 거리가 좁혀질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어머니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추도예배가 있던 날이다. 목사이신 어머니께서 예배 인도를 하셨다. 시편 1:1-6절 말씀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남편과 시누이는 슬픔을 애써 참고 있었다. 설교를 마무리하며 어머니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사람이 되길 축복한다.”라고 말해주셨다. 남편, 시누이, 서연, 재원이까지. 나는 제외! 같은 공간에서 예배드리는 한 영혼을 시어머니기 이전에 사역자인  그분이. 그 누구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6살 재원이가 “할머니~ 엄마도 엄마도.”라고 말해도 어머니는 재원이를 보며 웃기만 하고 나를 위한 축복은 하지 않으셨다. 아이의 입을 통해 들은 그 말에도 너무 슬퍼 그 말을 듣지 못 한 건지 남편과 시누이는 아무 말이 없었고, 딸 서연이는 당황스러워했다. 앞으로 내가 그날을 내 마음속에서 꺼내 본다면 사랑스럽게 떼 부리는 말투로  “엄마도, 엄마도.”를 외치고 엄마를 기억해 주는 재원이 모습만 기억하련다.


이 날 예배를 이렇게 끝났고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내 마음에는 말 못 할 감정이 요동쳤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기대를 내려놓게 된 날이다. 허탈감이 밀려왔다. 무얼 기대한 건가? 내게 묻고 답을 기다렸다.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이 날을 잊은 적은 없다. 원망의 도구가 아닌 내려놓음의 도구로 말이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서 어쩌면 어머니와의 여러 상황이 더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분이 많았다.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신앙에 대한 기대.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도 하고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깊은 갈등을 했다. 나 역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가 믿고 배운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참고 인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일지는 모르겠다. 내가 행복하지 않았고 그 행복하지 않음 때문에 가끔은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감정적인 대처가 있었던 것을 안다. 따로 떼어 보지 못하고 감정에 묻혀 그 감정의 흐름을 따라 행하며 후회했던 적도 있었다. 그 시간이 가면서 나는 깨달았다. 분리해 보지 못한 관계와 그 관계에서 생성된 감정 때문에 소중한 무언가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머니에게 나는 “없는 사람” 같은 존재지만 사랑하는 내 아이들과 남편에게는 그런 대상이 아니니까. 왜 내가 어머니에게 존재 인정을 받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인정을 기대하지 않고, 어머니를 향한 나의 기다림의 기대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보기 싫어서 보지 않아도 되고 피하고 싶으면 피해도 되는 관계가 아니라 고통스러웠다. 내 마음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힘들게 하고 내 마음의 결심에 균열을 일으키는 자극이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 안에서 조금씩 거리를 두며 나를 찾아보려 했다. 그 여정은 생각보다 순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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