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벨, 목포 및 광주 지역의 복음 개척자

4대째 선교하는 명문 가문

by 신재천

유진 벨 선교사(배유지, 1868~1925)는 목포와 광주 복음화 선구자로서 교회를 개척하고, 목포 영흥 학교와 정명 여학교를 세웠으며, 광주에는 숭일 학교와 수피아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딸 샤롯이 린턴 가문과 혼인하여, 외가 쪽으로 4대가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그는 미국 켄터키 주 스토트 스테이션에서 태어나, 켄터키 신학교와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893년 신학교 총장의 딸인 로티 위더스푼과 결혼하고 1894년 4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1895년 4월 남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한국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고 1896년 9월 나주 선교부 설립 책임자로 임명되어 해리슨과 함께 나주에 왔다. 그러나 나주 지방은 향교를 중심으로 선교사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가 강렬하여, 시작도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이때 인접한 목포가 곧 개항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는 목포를 선교지로 타진했고, 1897년 10월 목포가 개항이 되자 1898년 목포로 거주지를 이동하였다.


그는 목포에 거주하면서 최초 교회인 양림동 교회(현재 양동제일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송정리 교회(1901), 해남 우수영 교회(1902), 광주 제일 교회, 옥과리 교회, 담양읍 교회 등 50여 교회 설립에 기여하였다. 1898년 11월 오웬이 목포에 부임하면서 진료소를 열고 의료 선교와 병행하여 복음을 전했다.


또한 길거리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학생이 늘어남에 따라 1903년 영흥 학교를 설립하고, 여자아이는 스트레퍼 양에 의해 정명 여학교가 설립되도록 도왔다.

*스트래퍼 여선교사는 1899년 2월 목포에 와서 정명 여학교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으로 6개월 활동하였다.


1904년 12월 광주 선교부 개설이 결정되어, 그는 오웬과 함께 광주로 이동하였다. 광주 자택에서 학생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광주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숭일 학교의 건물이 1910년 완공되었는데, 이것이 광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또한 1905년 오웬의 광주 제중원(광주 기독병원) 설립 활동에 적극 협력하였다.


* 숭일학교는 프레스톤 초대 교장(1908), 2대 녹스(노라복), 3대 탈 메이지가 교장으로 부임하여 학교를 발전시켰다.

* 수피아 여학교는 엘라 그레이엄(엄앤라,1908) 선교사가 초대 교장, 로버트 윌슨(우월순) 부인이 임시 교장, 안나 맥퀸(구애라, 1910) 선교사가 2대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안나가 교장 재직 중 미국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사양식 건물을 건축하였다. 후원자 스턴스 여사는 자신의 동생인 제니 수피아를 기념하여 5천 불을 기증하였기에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학교 이름을 수피아 여고로 명명하였다.


유진 벨 선교사는 두 번이나 부인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첫 번째 부인 샤롯은 목포에서 1901년 풍토병으로 소천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은 언더우드 집례로 치러졌고, 시신은 서울 양화진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03년 마가렛 불(군산에서 선교한 윌리암 불의 여동생)과 재혼하였다. 그녀는 16년간 유진 벨의 사역을 돕다가 1919년 3월 교통사고로 소천했다. 3.1 운동으로 구속된 성도들을 돕기 위한 서울 선교사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다 수원 인근 병점에서 유진 벨이 운전하던 차가 기차와 부딪히는 사고가 난 것이다. 뒷좌석에 앉았던 부인 마가렛과 크레인(구보라) 선교사가 현장에서 소천하고 말았다. 그녀는 광주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선교 사역을 감당해야 했기에 1921년 9월 광주 이일학교 교장으로 섬긴 줄리아(배주리아) 선교사와

세 번째 결혼했다.


그는 광주에서 사역 중이던 1925년 9월 5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시신은 광주 양림동 묘지(호남신학 대학 구내)에 안장되어 두 번째 부인 마가렛 옆에 안장되었다.


그는 30년간 목포 및 광주 지역 선교를 위해 헌신하였기에 전남지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광주 양림동에는 2016년 개관한 유진벨 선교기념관이 있다. 초기 교회 건물 형태인 한식 건물로 세워져 그 시절을 재현하고 있는데 그곳에 가면 유진 벨 일가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유언장에는 빌립보서 4장 1절이 기록되어 있다. <부족한 저로 하여금 조선으로 나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을 감사하오며, 믿고 바라는 것은 천국에서 저희를 만나볼 때 더러는 내 즐거움이 되고 나의 면류관도 된다는 말씀을 기억할 때 여러 형제들도 즐거움으로 서로 만나기를 원하나이다.>


그의 선교는 당대에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 이어져 4대째 지속되고 있다. 유진벨과 로티(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샤롯 벨은 1922년 윌리엄 린턴과 결혼하여 대를 이어 복음을 전했다. 사위 윌리엄 린턴(인돈, 1912년 내한)은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고, 대전 신학교(현 한남대)를 설립하였다.


3대 휴 린톤(인휴)은 부인 로이스와 함께 결핵 퇴치 활동 및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순천에 결핵 진료소 및 요양원을 세워서 결핵 퇴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농촌을 다니면서 검정 고무신을 신고 전도하여 <검정 고무신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4대 스티브 린톤(인세반)은 1995년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여 북한 지원 활동 및 북한 결핵 퇴치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 유진벨 재단은 1995년 미국에서 처음 설립되었고, 2000년 한국 법인이 설립되었다.


그의 동생 존 린턴(인요한)은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며, 긴급한 환자 수송을 위한 엠블란스를 만들었다. 린턴 가문은 순천에서 거주하며 한국 학교에 다니며 한국인처럼 생활한 선교사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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