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인생
군 생활을 가족과 떨어져 해 본 경험도 있었고 초등시절 전학했을 때 같은 반에 있었던 이종 사촌이 결혼해서 울산에 살고 있었지만
울산생활의 외로움은 깊어만 갔고 그 외로움을 달래 줄 빈자리를 술이란 친구로 대신했다.
나는 낮에만 근무하는 일근 형태였지만 회사 사원 아파트 인근의 술집에 가면
우리 직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기에 혼자서도 찾는 날이 많아졌다.
그 가게에서 만나는 우리 직원들은 거의 교대 근무를 하는 사람들이라
새벽 시간까지 술을 마셔도 근무에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과 어울려 마시다 보면 아침에 출근을 하는 나는 제일 먼저 자리를 나설 수밖에 없다.
먼저 자리를 떠나는 시간이라도 그것은 새벽시간이었다.
출근을 해도 마신 술의 숙취로 인해 의무실의 침대는 나의 독차지가 되었고 내가 의무실에 나타나면 간호사는 코부터 잡는 것을 보면
술 냄새를 얼마나 풍겼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다.
모자라는 잠은 의무실 침대에서 코를 고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러다 보니 회사는 열심히 다녔고 매달 봉급도 잘 받았는데 저축된 돈은 그다지 없다.
어느 날, 퇴근 후 숙소에서 세탁기에 빨래를 하고 있었다.
숙소는 1968년에 지은 건물이라 화장실과 샤워장, 세탁실이 한 층에 하나씩 있는 공동 이용 형태다.
물론 나중에는 각 세대별로 욕실이 있는 구조로 개조를 했지만.
세탁 중 방에 인터폰으로 회사 당직실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고 연결해 준다.
전화를 받아서 연결해 주는 곳은 지하에 있는 식당이다.
독신자 숙소이니 식당에서 외부전화를 받아 각방으로 연결해 준다.
당직자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짤막한 비보를 전해준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병세가 악화되어 입원해 계셨고 당시엔 회사 전화로 시외 전화 사용이 막혀 있어
하루 한번 공중전화로 누님에게 아버지 상태를 묻곤 했는데
운명하시던 날 오전에 통화 내용은 오늘따라 상태가 아주 좋다는 말을 들었던 지라
대구로 향하는 길에 허탈함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저녁엔 잠시 겨울비가 뿌렸다.
아버지가 떠나심을 하늘도 같이 울었던 모양이다.
장지에 도착하니 뿌렸던 겨울비는 산자락에선 눈으로 변해 장례에 어울리는 흰색 수를 놓은 것 같다.
아버지와 이별 후 그동안 술병에다 붓고 남은 몇 푼의 통장 잔액은 아버지가 누워계실 자리에 보태고
난 일상으로 돌아왔다.
외로움이 찾아들 때면 혼자서 조용히 바다를 보며 사색하고 파도 소리에 위 안을 삼아오던 내가 이제부턴 그 바다도 싫어졌고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내 머리를 지배했다.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자리가 없다 하고
대구 근무를 희망하는 직원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으니 어렵다는 것이다.
최선이 안되니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 서울로 가서 본사 근무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 이왕 노는 김에 서울 땅에서 그리고 본사에서 통 크게 놀아보자” 고
다짐하면서 보따리를 쌌다.
울산에 있는 동안 마누라와 맞선으로 만나 약혼을 했고
서울에 근무할 때 결혼을 했다.
난 원래 결혼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술병에 봉급을 저금하지 않고 예금 통장을 선택했을 것이다.
투병 생활을 하고 계셨지만 떠나보낸 아버지는 나의 정신적 지주였는데 당신의 빈자리가 나에게 너무나 크게 다가왔고 그 빈자리를 무언가로 채워야만 했다.
술병으로도 채워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고생하셨지만 너무나 인자하고 자상하고 정도 많은지라 주위에서 아버지에게 한 사람이라도 나쁜 점수를 주는 사람이 없는 그런 분이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 흔적은 나에겐 여전히 크게 남아있다.
흔한 말로 어머니는 여행을 떠나고 하룻밤을 비워도 그 빈자리가 느껴지지만 아버지는 생과 사로 영원한 이별을 하고서야 비로소 그 빈자리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악기의 음에 비유하자면 어머니를 떠나보낸 딸의 애끓는 슬픔이 바이올린 소리요,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잔잔히 올라오는 슬픔이 첼로 소리인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가 떠난 그 빈자리는 내가 눈을 감아야 채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