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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심이 Sep 16. 2024

아빠의 이야기 10

아빠의 인생 






지금의 마누라와 만나기 위해 

맞선을 보기 전에 맞선을 봤던 상대의 집으로부터 맘의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공직에 몸을 담고 있다던 상대의 아버지가 나에게 

우리 집안에 땅을 소유하고 있냐고 물어봤고 가진 땅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서는

 

"자네 봉급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 딸이 자네 봉급보단 몇 배의 수입을 올리고 있을 걸세" 


라는 말로 청년의 자존심을 무참히 밟아버리는 것이다. 


당시 내 고향엔 개발로 인해 땅부자가 많이 나오던 시기이다. 


이 일로 인하여 마누라와의 맞선 자리에선 


"우리 집엔 땅 가진 것이 없다." 


라는 말을 하니 후일 마누라 말을 빌리자면 처음 보는 자리에선 자신의 장점을 열거하기 바쁜데 

어쩌면 자신에게 단점이 될 수 있는 말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느꼈다고 한다. 


약혼을 하고선 약혼반지를 끼고 회사를 나가니 모두들 무슨 반지냐고 묻는다. 


총각이 반지를 끼고 왔으니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특히 부속실의 어린 여직원은 관심사가 더 크다. 


“아저씨, 그 반지 뭐예요?”


“약혼반지야. 난 약혼했으니 이제부턴 진짜 아저씨야” 


그렇다. 


그 여직원은 나와 나이 차이가 많았으니 전부터 날 아저씨라 불렀다. 


난 서울로 근무처를 옮겼고 서울에서의 본사와 독신자 숙소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본사 바로 뒤편에 위치한 병원에 전공의 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가 있었고

대우 건설 본사에 근무하는 친구가 있어 이따금씩 만나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가장 가까이 근무하고 있는 전공의 과정의 친구는 가깝지만 제일 만나기 어려운 친구였다. 


외과 전공이라 매일 수술실에 들어가 온종일 피만 보면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론 촌각을 다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 

나의 욕심만 차려보려고 자주 보자고도 못할 입장이다. 


결혼을 하고 신혼살림은 가락동에 있는 조그마한 전세 아파트로 시작을 했다. 


마누라는 첫째 애를 가진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하혈을 하는 등 문제가 생겨 평소 다니던 동네 산부인과보단 서울에선 비싸다는 강남 차병원에 입원을 택했다. 


차병원은 산부인과 전문 병원이고 당시엔 간병인 제도가 없어 남자가 간병을 한다는 것이 난감한 일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병원에서 20여 일간을 먹고 자면서 출퇴근을 했다. 


산부인과 전문 병원의 단점은 남자가 간병인으로 병실에 있기 힘든 것 외에도 마누라같이 산모가 아닌 환자에게도 끼니마다 미역국을 준다는 것이다. 


20일 이상 매끼마다 미역국이 나오니 질릴 수밖에.


다인실에 입원했음에도 20여 일간의 강남 차병원의 입원비는 내 한 달 봉급에 달했기에 결코 적은 비용은 아니었다. 


큰 녀석은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지나 엄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 탄생을 몇 개월 앞두고서 처가로 가고 난 전라도 강진 현장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는 처가행도 열차나 고속버스는 조산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는 항공편을 택했다. 


항공사 직원에게 산모를 뉘어서 가고자 

두 사람이지만 세 사람의 좌석을 확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설명을 하니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상의를 한 후 국제선이면 불가능한데 국내선이라 해 준다고 해서 대구로 이동을 했다.  


강진은 서울에서는 무척이나 먼 곳이었고 

호남 사투리가 심한 지방이라 때론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숙소는 읍사무소에 근무하시는 분의 집의 작은방을 얻었다. 


방 2개에 거실 겸 부엌이 있어 애가 태어나서 이사를 와도 살기엔 충분한 공간이었다. 


주인내외는 살갑게 대해주었고 아래채엔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으며 

큰 녀석이 태어나고 얼마 후 아래채에서도 딸아이가 태어났다. 


큰 애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강진에서 접하고 

그동안 입원과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심한 입덧, 항공편까지 동원한 대구까지의 이송 길 등 많은 어려운 과정을 거쳤기에, 그리고 첫째 애라 더 반가운 소식이었고 한걸음에 달려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장의 사정은 비울 수가 없었다. 


토목 담당 직원에게 출산 소식을 전하면서 빨리 내려와서 교대를 부탁했음에도 

업무가 많이 밀려서 당장 불가능하단 말을 한다. 


사실 그때 진행 중인 공정이 토목 공정임에도 그런 답을 하니 

건축담당인 나로선 난감했고 

서운함까지 들었지만 직장 생활이란 것이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난 사흘이 지난 후에야 병원에 도착했고 마누라는 서운함을 나타냈다. 


그로부터 5년 후, 둘째가 태어나는 날엔 그 서운함을 보상해 주기 위해 미리 휴가를 내고선 꽃다발을 사서 전해준 기억이 난다.  


큰 애가 태어나고 몇 달이 지나서 마누라는 애를 데리고 장모님과 함께 강진으로 오니 저녁식사를 대접한다고 식당으로 모셨다. 


강진은 한정식이 알려진 터라 이름난 한정식 집에 가서 상다리 휘어질 정도의 많은 음식을 접했는데 

우린 나온 음식 중 산 낙지를 먹지 못해 모두가 산 낙지가 죽기를 기다리다 결국엔 주인에게 데쳐서 숙회를 만들어달라고 한 기억이 난다. 


읍내란 것이 그리 크질 않았으니 현장과 집은 자전거를 하나 구입해서 출퇴근을 했다. 


당시 난 운전도 할 줄 몰랐고 차를 구입할 형편도 못되었으니 자전거로 만족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그 자전거는 마누라와 나, 그리고 애까지 셋이 읍내 시장이나 외식을 하러 다닐 땐 아주 편리한 이동수단이었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의 자전거 핸들엔 시장 봐온 비닐봉지가 주렁주렁 걸렸고, 읍내를 휘젓고 다니며 페달을 밟는 발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던 것 같다. 


즐거움이 있었던 이유는 

시골인 탓에 당시 군내에서는 우리 현장이 규모가 제일 컸다는 자부심과 회사에서 지급해 주는 출장비, 대도시와는 달리 시골은 가계 지출도 적고 애 또한 어렸으니 

경제적으로도 한결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특히 시장 안의 양념 소갈비를 먹으러 다닌 기억은 오래 남는다. 


값도 저렴했고 맛도 좋았지만 갈비를 구워 먹은 돌판에다 김치를 썰어 넣어 볶아주는 밥 또한 일품이었다. 


서울에서는 소갈비로 배를 불려본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훗날 마누라와 그 소갈비집 식당이 있는지 가봤더니 세월 속에 묻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당시 우리는 신혼이었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방문을 했으니 그 주인아주머니는 할머니가 되었으리라...  








큰 녀석은 첫 돌이 다가올 무렵 열이 지속되어 강진 의료원에 입원을 했다. 


애들은 링거 수액을 주사하는 것이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혈관을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성공했더라도 애써 꽂아 놓은 바늘도 자꾸 움직여 오래 못 가니 나중엔 머리카락을 밀어버리고 이마에다 링거주사를 한 적도 있다. 


이마에다 링거 수액 주사 바늘을 꽂고 있는 첫돌박이 녀석을 보는 것은 

부모로선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입원을 했음에도 병원에서는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였고 침대에 붙여 놓은 병명을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원인불명 열'이란 뜻이었다. 


살다 보니 별 희한한 병명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다. 


마누라는 애들이 돌 정도 되면 걸을 수 있으니 

걸을 때 쓸려고 미리 꽃 고무신을 한 켤레 사다 놓았지만 

신지도 못하고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꽃 고무신이 눈에 띌 때마다 안타까움은 더해만 갔다. 


마누라는 이따금씩 현장 직원들의 점심으로 김밥을 싸가지고 오곤 했는데

현장 직원들이 맛있다고, 

특히 임대리라는 총각 기사는 마누라의 김밥을 언제 또 먹을 수 있냐고 농담 섞인 질문을 자주 하곤 했다. 


술을 즐긴 터이라 음주 자전거로 시골 농로길에 넘어져 손톱도 빠지고 얼굴도 갈아붙여 온 기억도 생생하다. 



그날은 현장에서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 날이었다. 


설비 쪽 소장이 삼십 중반의 나이에 득남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재혼을 해서. 


경사의 주인공이 저녁을 산다고 해서 간 횟집을 나설 땐 술독에 빠진 귀신이 되어 버렸다. 


난 득남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주인공을 잠시 기다리게 하고 정육점에 가서 산모 회복에 도움이 되란 의미로 소고기를 사서 와보니 기다리라고 했던 사람이 없어졌다. 


그 사람도 술을 워낙 좋아하는지라 많이 취했으니 집으로 갔다고 생각을 하고 집을 수소문해서 찾아냈다. 


시골이었고 현장 뒤에 산다는 정보는 알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었다. 


기동성에 나의 애마인 자전거도 큰 보탬이 되었다. 


집을 방문해 보니 먼저 가버린 소장은 아직 귀가를 하지 않았다는 말을 산모에게서 듣고서 고기만 전해주고 나도 귀가 길에 올랐다.  


하늘엔 보름달이 있는지 시골 콘크리트 포장길은 무척 밝았고 얼굴에 와닿는 바람은 술기운을 가셔 줄 만큼 상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기분도 잠시 뿐이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아야 가니 페달을 열심히 밟는다. 


그럼 상큼한 바람도 더 느낄 수가 있다. 


대신 달빛의 도움을 받아 환하게 밝아진 콘크리트 포장길은 기우뚱거리기 시작한다. 


페달링을 멈추고 가만히 있노라면 

기우뚱하던 길은 제자리로 안정을 찾는다. 


다시금 힘껏 페달링을 하니 

흔들거리던 콘크리트 포장길은 결국엔 벌떡 일어나더니 내 옆을 스쳐 지나고 가버린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일순간 정지 모드로 변해버린다. 


취중이긴 하지만 사고가 난 상황에도 난 잠시 동안 예전에 들었던 말 


'취객 이 길을 걷고 있으니 길이 벌떡 일어나서 이마를 때리더라는 말'과


'진주에서 선생님 한분이 취해서 남강다리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다리가 똑바로 서버렸기에 그 높은 다리를 가까스로 타 넘어서 귀가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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