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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심이 Sep 16. 2024

아빠의 이야기 11

아빠의 인생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강진에서의 생활을 접고 서울로 왔다가 얼마 되지 않아 

강원도 홍천 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장 여직원에게 머물 수 있는 집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빈 시골집 독채였다. 


그 집은 우리만 사니 편하긴 했다만 밤이면 주위가 너무 어두웠고 내가 귀가하는 시간까지는 어린애와 마누라 둘이서 지내기는 무섭게 느껴질 정도여서 

마침 그 집의 주인이 살고 있는 집에 작은 방이 하나 비어 있다 길래 그 집으로 들어가 살았다. 


물론 세간은 서울에다 두고 필요한 세간 몇 가지만 가지고 갔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 집은 홍천 강변에 위치했고 주인 부부 중 흥이 많아 보이는 아저씨는 예전에 양복점을 했다는데 

재봉틀 소리와 노랫소리가 자주 들렸으며 

작은방엔 여고생이 가장인 남매가 살고 있었다. 


난 이따금씩 퇴근 후 홍천강에 나가 낚시를 했었고 

마누라는 주인댁 아주머니를 따라다니면서 가을에 농촌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추수하는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온 일, 경찰서 구내에 있는 은행나무를 흔들어 은행을 따다 혼났던 일 등을 추억한다. 


퇴근해서는 따 온 은행을 구워주던 맛이 일품이었던 기억이 난다. 


홍천의 겨울은 엄청 추웠고 

그 집은 세수도 밖에서 해야만 했고 

화장실은 바깥에 별채로 있는 재래식이라 춥고 엉덩이는 어는 것 같았다. 


아침에 머리를 감은 후 

말린다고 타월로 물기를 털어내고 있노라면 

잠시도 지나지 않아 얼음조각이 되었으니 홍천 추위를 짐작할 만하다. 







홍천에서의 생활도 무탈하게 마치고 다시 서울로 왔다. 


그때 입사 후 첨으로 속초에 있는 회사의 가족 생활관을 입소하게 되었다. 


당시엔 차를 가진 직원들이 많아 대다수의 직원들은 자기 차량으로 입소를 하는데 

난 운전도 하질 못하고 차도 없어 

어린 녀석을 데리고 옷가지 가방에다 분유통까지 챙겨 많은 짐을 들고 시외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속초까지 가는 길에 중간 귀착지로 몇 군데 정차하고서 태백산맥을 넘어가는데 

마침 안개가 자욱이 앞을 가려 한계령을 넘는 구간에선 한 치 앞을 볼 수도 없는 상황이 펼쳐졌는데도 

버스 기사는 길이 익숙한 지 빠른 속도로 좌우 코너링을 하니 우린 안개 낀 한계령을 다 넘을 때까지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당시에 연수원에는 증축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 공사는 우리 부서에서 주관하는 공사라 담당 직원이 저녁을 먹자고 해서 횟집을 갔다. 


나는 울산에서 회를 배웠지만 

마누라가 내가 울산에서 회를 처음 접한 것처럼 에피소드를 남겼던 기억이 난다. 


“회 드실 중 아세요?”


“네에" 


회를 주문해서 회가 나온다. 


"회 나왔으니 좀 드세요"


"...” 


“회 안 드세요? 드실 줄 안다면서요” 


“이런 회 말고 오징어회요"


“주인장, 여기 오징어회 한 접시” 


가늘게 채 썰어진 싱싱한 오징어 회가 한 접시 나온다. 


“드세요. 오징어 회 나왔습니다.” 


“...” 


“그럼 오징어 회도 안 드시면 드실 수 있는 회가 무엇입니까?”


“소라 회요" 


“어이 주인장, 여기 소라회요”


동해안에서 나오는 싱싱한 소라회가 한 접시 나온다. 

"드세요. 소라 회 나왔습니다." 


또 “...” 


“오징어 회와 소라 회는 드신다면서요?" 


“아니, 오징어와 소라를 익힌 회를 먹을 줄 알아예(경상도 사투리의 끝 말)”


“주인장, 여기 있는 오징어와 소라 익혀서 주세요.” 


지금도 그 주인장의 표정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푸른 동해 바다와 함께 금방 건져 올려낸 듯 싱싱한 오징어와 소라를 익혀달라고 했으니 기가 막힌다는 표정. 


물론 나도 회를 처음 배울 때와 산 낙지를 먹지 못해 죽을 때까지 기다리다 익혀달라고 했던 일과 

대구 근무할 때 생고기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안주라곤 생고기밖에 없어 

내가 생고기를 먹지 못하기에 종업원을 불러 생고기 일부를 구워서 달라고 했더니 

생고기를 못 먹는 사람이 어째 생고기집을 왔으며 

생고기는 순살 부위라서 구우면 질겨서 못 먹는다고 했지만 

안주할 것이 없어 질겨도 좋으니 구워달라고 부탁해서

구워져 나온 고기는 마치 가죽처럼 질겼고 

술을 몇 잔을 마셔도 안주는 입에 남아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마누라와 속초 횟집에서 생긴 일은 나로선 웃지는 못 할 입장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구판장에서 구입한 물품과 직원들에게 줄 선물 등으로 짐이 더 늘어났고 

올 때 가슴을 졸여야만 했던 한계령 고갯길이 싫어 우린 영동 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속버스를 탔다. 


고속버스에서는 중간에 쉰 휴게소에서 구입한 호두과자를 아들에게 조금씩 주다 잘 받아먹기에 욕심이 생겨 

좀 크다고 생각이 드는 조각을 줬더니 

이번엔 목에 걸렸는지 여태 먹은 것까지 보태서 올려버린다. 


욕심을 부리면 되레 손해를 본다는 말이 생각나는 일이다.


버스 내에서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받아 낼 봉지도 준비되지 않았고 

얼떨결에 손바닥으로 받아냈다. 


마누라가 외출을 하거나 해서 자리를 비운 경우 대소변을 보고 울어대면

소변 기저귀만 갈아주고 대변을 본 기저귀는 

마누라 올 때까지 아기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대로 두곤 했었는데 

급하니 나도 모르게 손으로 구토를 받아내게 되었다. 


당시 살던 집은 개포동의 아주 작은 평형의 전셋집이었는데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지고 

고덕역 인근에 건축하는 조합주택을 신청했다. 


하지만 여유 자금이 없는지라 대출을 위해 은행 문을 두드려봤지만 문전박대를 당했고 

부족한 얼마의 돈은 누님에게 빌려서 납부를 했고

나중엔 마누라의 결혼 패물과 큰 녀석의 돌반지를 비롯해 돈 되는 것은 다 팔아도 모자라니 

하는 수 없이 전세금을 빼내기 위해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사택 입주가 가능한 지리산 자락으로 떠났다.









서울을 떠나기 전 교통이 불편한 곳으로 간다는 것을 감안하여 운전면허를 따 두었고 

산청을 가서는 직장 선배가 차를 바꾼다면서 차를 가지고 가라기에 초보 운전자가 서울에서 산청까지 겁 없이 차를 운전해 왔던 기억이 난다. 



그 차는 운행엔 지장이 없었으나 

여름철에 정차 중 공회전을 하면 엔진 과열로 에어콘 가동을 못해 불편함이 따랐고 

배기가스는 환경기준치를 초과해서 벌금(현재는 과태료)을 문 적도 있는 차였다. 


그래도 시골 생활에서 그 차는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하게 쓰이는 편리한 존재였다. 


당시 큰 녀석은 자동차 장난감을 무척 좋아해서 

자동차 모형의 장난감을 차종별로 사다 주었고 

차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차 이름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길에서 만난 차 이름을 척척 맞추던 녀석이  


“아빠 차 이름은 뭐지?" 하고 물으면 


내 차에 대해서는  


"아빠 차는 똥차"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마 연식이 좀 지난 중고차였으니 그렇게 표현했으리라 생각된다. 


그 차로 인해 출퇴근은 물론이고 생필품도 진주 시내까지 가서 구입이 가능했다.  


산청에 있을 때 

두 번째 속초 생활 연수원을 어머니를 모시고 갔는데 

설악산  진입하는 고갯길에 

일명 똥차가 힘이 모자라 떨리고 있으니 

어머니가 차를 바꿔야겠다면서 대구에 돌아와서는 찻값의 반에 해당하는 돈을 주시는 바람에 

새 차로 바꾸고 

타던 차는 초보 운전 직원에게 운전 연습을 하라고 줬다. 


산청에서 둘째 녀석이 태어났고 우리 가족은 네 명이 되었다. 


산청에 살던 사택엔 감나무가 두 그루가 있었고 우리가 살던 시천면은 지리산 곶감으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늦가을이 되면 온 동네가 감빛으로 물이 든다. 


수확한 감과 곶감을 만들기 위해 벗겨놓은 감 껍질, 껍질을 벗고선 귀한 곶감으로 변신하기 위해 주렁주렁 건조막에 매달려있던 감들로 온통 주황색으로 물이 든다. 


동네 아낙들 모두 곶감 만드는 철이면 

감 깎는 부업을 하고 있었으니 

칼질이 서툰 마누라도 감을 깎는다고 집에다 감을 들여다 놓는 바람에 

자연 퇴근 후 내 일거리가 된다. 


퇴근 후 일거리가 생긴 것도 모자라 곶감 만드는 떫은 맛이 나는 감은 

양말이나 옷에 묻으면 

검은 감 물이 배어 들어 망쳐버린다는 것이다. 


당시엔 흰색의 면소재 양말을 신던 시절이라 

발바닥이 까맣게 염색된 양말을 여러 켤레 만들어내기도 했다. 


큰 녀석은 교회 부설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고 

어울리던 동네 또래 여자애가 둘 있었는데 '이슬'이란 이름과 '사왕'이란 이름을 가진 애였다. 


같이 놀다 애들이 사라지고 안 보이면 

이 녀석은 입을 삐죽거리며 '이슬', '사왕'없다면서 울먹거리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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