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인생
人生에 눈을 뜨며
이제 나의 가족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나의 할아버지는 덕子 조 를 子 쓰신 분이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촌형이 장난 삼아 삼촌 마차를 보관해 두는 헛간 쪽
담을 넘어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왔을 때
할아버지가 혼을 내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할아버지는 더운 여름날 돌아가셨고
온 동네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장례를 치렀고
그 후 오랫동안 마당에 빈소를 마련해서
끼니마다 부모님이 식사를 올리던 기억만 있을 뿐이다.
할머니는 김 씨 성에 용子 분 를 子 쓰신 분이고
당시의 사람에 비해 키가 좀 크셨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가 없어
합죽보살이란 별명으로 사신 분이다.
허리도 굽지 않았고 치아가 없는 것 외엔
아주 건강하셨고
98살까지 장수하셨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손수 식사를 해결하실 정도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례에 먼저 가신 공동묘지에 묻혔던 할아버지도
이장을 하여 함께 선산에 모셔두었고
지금껏 한가위가 임박하면 사촌들과 모여 벌초를 하고 있다.
아버지는 유子호子 를 쓰셨고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배움도 짧고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근면하고 성실한 것은 알아줘야 할 정도이다.
자식들이나 이웃에도 화내는 일이 잘 없고 자상한 분이다.
가난과 가족 간의 갈등, 본인에게 찾아온 병마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언제나 우리 가족에겐 존재로서 가치만으로도
훌륭한 아버지였지만
영남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폐렴으로 기관지를 절개까지 하여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고 계시다 65세의 짧은 일기로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는 1988년도에 돌아가셨지만
그전부터 아버지는
"내가 죽거덜랑 화장을 해서 국립묘지에 묻어다오"
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은 죽고 나면 아무런 자각 증상이 없는 마치 나무토막과 같으니 너희들은 날 화장 해주면 된다.”
란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하지만 우린 아버지를 두 번 죽이는 불가마에 넣은 행위는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대구 인근 공원묘지를 택했고
아버지 누우신 자리 옆에
어머니 자리까지 준비를 해두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18년이 지나
우린 아버지와의 재회의 시간을 가졌다.
그것은 바로 국립묘지로 이장을 위해 분묘를 개장했기 때문이다.
우린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을 한 후
국립 현충원의 봉안식 절차를 거쳐
살아생전 아버지가 원했던 것을 이루어 드렸다.
대전이라 좀 멀긴 해도
설과 추석, 한식일과 현충일, 아버지 제사가 다가오면
가능한 한 아버지를 찾아보고 있다.
아직도 우리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가 우리들 가슴에 좋은 아버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머니는 홍 씨 집안에서 태어나서 선子 이子 를 쓰시고
나름 끼니 걱정은 안 하고 살 정도의 집안에서 자라신 것 같다.
아버지와의 인연이 된 것은 가진 것은 없어도 아버지의 인성을 보고
외할머니가 중매를 해준다는 것이 여의치 않자
딸을 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지독히 없는 집에 시집와서 배도 많이 곯아 봤다고 한다.
지금 구순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살아 계신 것은
우리 자식들이 일찍 보낸 아버지를 대신해 그만큼 어머니를 정성껏 보살펴 잡아두고 있는 것이다.
때론 어머니의 병간을 하면서 분변을 치워드려야 할 일도 있었다.
자식 중에 남자인 내가 치워드리면 왠지 불편해하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지만
내가
"어릴 적 엄마가 내 똥을 치워줬으니 엄마가 노쇠하여 거동이 불편하면 이젠 내가 치워드려야 하잖아"
라고 말씀드린다.
그 말은 맞는 것 같다.
어머니를 모시고 식당에 갈 일이 있으면 넘어질까 봐 손을 꼭 잡고 들어가면
어떤 경우엔 식당의 손님 중에서 나를 보고 엄치 척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
넘어지게 되면 어머니 생의 남은 시간이 너무 힘들게 될 것이며
우리 또한 병간에 어려움을 겪게 될까 봐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주위 사람들에겐 효심 많은 자식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걸음마를 시작하여 뒤뚱뒤뚱 걸으면
행여 넘어질 새라 부모님이 아이의 손을 꼭 잡아주는 이치와 같은 맥락일 듯.
이젠 이따금씩 치매 증세도 있는 것 같고
외부 활동도 자유롭지 못하니
삶이 재미가 없는 모양인지
이젠 아버지 곁으로 갔으면 하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마누라는 김 씨 집안에서 자란 귀주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처가는 장인어른(김 귀子 선 子)의 공직 생활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아온 우리보단 나름 넉넉하게 살다
장인어른이 공직을 그만두고
운수사업과 산림 벌목 사업에 손을 대어
연이은 실패에 장모님(이 채子 만子) 도 그릇가게를 하면서까지 생계를 위한 장사에 뛰어들었지만
육 남매의 학비조달과 당뇨병으로 건강을 잃어버린 장인어른으로
힘들게 사신 것 같다.
마누라는 예민한 편이다.
나 또한 참을성이 적고 욱하는 성격인지라 자연히 우리 부부엔 마찰 이 잦을 수밖에 없다.
여태 부부의 연을 맺어 살면서 싸운 날이 한 달에 한번 이상은 된 것 같다.
부부간의 소통도 남편이 도둑질을 하면 아내는 망을 보란 말을 할 정도로 소통이 중요하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소통만 잘 되었더라도 비극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는 문구를 어느 책에서 본 적이 있다.
현재 우리 부부는 소통의 관계가 아니라 불통의 관계인 셈이다.
작은 녀석인 딸애도 엄마를 닮은 탓인지 예민한 편이나
큰 녀석은 오히려 세상물정에 둔감하거나 무심해서 탈이다.
둔감한 정도가 아니라 은둔 생활을 하는 것인지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려고만 한다.
여기엔 고등학교 시절부터 빠져 들어간 게임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중학교 시절엔 공부를 아주 잘하는 편이었고
잘하다 보니 부모 입장에서 관심이 더 가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아이의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마누라는 다니던 학원을 옮기곤 하였는데
거기에서 나중에 애가 방황하게 된 데 일조를 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사람은 낯선 환경이 자주 펼쳐지면 생각이 정착을 하지 못한다는 데서 기인하여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선생님들의 잦은 전근으로
자식 또한 잦은 전학에 낯선 환경과의 적응에서 생기는 서먹함과 갈등으로 인해
우등생이 되질 못한다는 말이 있고
나도 인사이동으로 인해 새로운 근무지로 가면 새로운 환경과 사람에 적응하는 데에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힘들게 했다.
미래의 성공은 과거가 어찌 되었던 것이 아니라
현재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란 말이 있는데
아들도 이젠 방황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미래를 준비했으면 좋겠다.
퇴직 전까지 나는 그냥 앞만 보고 달리면서 살았다.
나에겐 지독히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내가 가정을 꾸리고 가장으로서 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한은
내가 눈을 감는 날까지
내 가족의 끼니걱정은 안 하게 할 것이고,
내가 눈을 감을 때는
자식들에게 부채는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직장 생활도 더 성실하게 했고
나름 대인관계도 더 원만하게 하려고
근무시간이던 일과 후를 따지질 않고 쫓아다닌 것도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어떡하던 살아남는 생존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직장 생활도 손가락질받지 않고 마칠 수가 있었고
퇴직 후에도 생활에 보탬이 될 만한 출근을 하고 있다.
가족들에겐 34년을 몸 담았다 퇴직하고 나온 직장에 대해선 길을 가다가도 회사간판이 보이면 맘속으로 고맙단 인사를 하란 말을 하고 싶다.
그 직장으로 인해
우리 식구들이 풍족하진 못했지만
돈에 대한 걱정은 안 했고
누울 자리 마련과 자동차까지 굴리며 살았으니
그 회사에 대한 고마움은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