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인생
社會에 눈을 뜨며
졸업을 하고선 잠시 외삼촌 공장에 잠시 아르바이트성격의 출근을 하게 되었다.
무슨 대가를 얻기 위해 알바를 했다기보다는 인생 경험을 쌓고 사회를 맛본다는 취지였다.
그때 공장장이란 사람은 외삼촌 회사에서 제공해 준 검정색 포니차를 운행하고 있었다.
하루는 세차를 해 놓으란 말에 처음 해보는 세차라 세제를 한껏 묻혀놓고선 호스로 물을 대충 뿌려서 주니 검정색차에 얼룩은 그대로 남아있어 혼이 났던 기억이 난다.
두세 달 정도 짧은 기간의 알바였지만 내가 얻어 온 것은 노동 집약 산업인 섬유 업종의 특성상
거기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배움의 끈은 짧지만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가더라는 것이다.
그 후 난 공기업에 입사를 하여 34년이란 세월을 근무했지만
어릴 적 경제 적으로 어렵게 살았던 경험과 주위의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엿보며 살아온 것이 삶의 밑거름이 되어 별 탈 없이 정년퇴임을 맞이했다.
입사 시 면접을 했던 사람 중 한 분의 말에 대낮에 밝았던 강남의 영동대로가 깜깜하게 느껴지던 기억이 난다.
면접이 끝날 무렵 무사히 치렀다고 생각을 했고
나름 군 생활에 영어를 쓴 것이 도움도 되었고
면접관 한 분은 입사 후 영어와 연관이 있는 부서에 근무하게 될 것이란 말까지 했는데
갑자기 한 분이
“혹시 낙방의 고배를 마시더라도 면접을 잘못 봐서가 아니라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세요”란 말에
인근 지하철역 입구 계단에 한참을 우두커니 앉았다가 겨우 기운을 차려서 고속버스터미널로 갔었다.
그 말 한마디에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은 물론 앞이 깜깜 해지더란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힘이 되는 말이나 격려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합격의 통지를 받고 신입 사원 연수원으로 입소해 보니 이곳은 한동안 잊고 살았던 군대 훈련소 같은 곳이었다.
같은 유니폼에다 새벽 기상과 구보, 저녁까지의 수업과 취침 전 점호와 엄격한 생활관 생활, 벌점제도와 누적된 벌점으로 인한 강제 퇴소 제도, 시험 등 결코 만만치 않은 생활이었다.
몇 주간의 연수를 마치고 손에 든 발령지는 울산행이었다.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옷가지가 든 가방과 담요 한 장을 싼 보퉁이 하나가 내 짐의 전부,
울산행 고속버스를 타고 와보니 면접관이 말했던 영어와는 전혀 무관한 발령지였으나
그곳은 바닷가에 인접한 위치 해 있어 조금의 위안은 되었다.
바다를 항상 볼 수 있는 좋은 점은 있지만 도심에서 멀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하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소속된 부서는 총무부였으며 신입 사원으로서 인생 제1막을 시작했다.
그때 처음 만난 나의 선임 직원은 회사 특성상 잦은 인사이동에도 불구하고
서너 번을 같이 근무했고 나보다 3년 정도 일찍 퇴직했다.
연수원에서 신입 사원 교육받을 때 교수가
"여러분이 발령을 받아가면 거기 가 여러분의 처가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고
그 당시 난 그 말을 의미 없이 흘려버렸다.
첫 근무를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니 당시 계약 담당 직원이 나랑 부속실 여직원을 짝 지어줘야겠다는 농담을 하곤 했었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부속실에 가서도 같은 농담을 했던 것이었다.
내게는 농담이었지만 그 여직원에게는 진담으로 와 닿았을런지 모른다.
앞전에 몇 번에 걸쳐 사내 커플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직원은 나와는 7살이 차이가 났고 내가 입사하던 해에 고등학교 갓 졸업하고 온지라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애였으니 웃고 지나가는 농담에 지날 수밖에 없었다.
총무부는 부서 특성상 여직원이 많고 따져보면 나랑 나이도 맞는 여직원들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고등학교 갓 졸업한 애를 나에게 엮어준다고 농담을 한 이유를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 농담을 하던 계약 담당 직원도 나이가 들어 이따금씩 하는 통화에서는 할아버지 음성이 전해온다.
하기야 내 나이 얼마인데.
아마 그분은 칠순이 지났으리다.
나의 인생 제1막 첫걸음은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제일 먼저 저녁회식 자리에선 먹지 못하는 회라는 복병을 만났다.
출근한 지 며칠이 지나 선임자가 날더러 회 먹을 줄 아느냐고 묻는다.
난 학창 시절 친구들과 이른바 무침회란 것을 안주해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으니 자신 있게 대답했다.
먹을 줄 안다고...
그래서 출입 업체와의 상견례를 겸해서 횟집을 갔는데 내가 생각했던 그 회(무침회)는 나오질 않는다.
무침회란 것은 오징어 숙회에다 야채를 넣어 초장에다 무쳐놓은 것인데 싱싱함을 자랑하는 활어 횟집에서 기다려도 나올 리 만무하다.
당시 소주의 알콜도수는 높았고 내가 먹을 줄 아는 안주는 없고 힘든 술자리였다.
그 후 여러 번의 횟집에서의 술자리는 있었지만 회는 여전히 먹지 못하다 어느 날 갑자기 회를 먹기 시작했다.
회를 먹기 시작한 사연은 이렇다.
선임 직원과 출입 업체 사람들과의 저녁 식사 지리인데 내가 회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나에게 회를 먹이는 사람에게 이 돈을 준다고 마치 현상금 걸듯이 공표를 하니
서빙하던 식당 종업원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당시 내 봉급이 40만원이었으니 오천원은 제법 큰돈이었다.
내가 회를 먹지 못한 이유는 내륙 지방에서 자란 탓에 신선한 해산물을 접하는 기회가 없었고
생선은 비린내가 나는 존재며 익히지 않은 날 것은 더 심하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취했더라도 그 걸 먹어본다는 것은 도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종업원들은 모두 중년의 아줌마들이었는데
젊은 총각에게 회 한 점 먹이고 현상금을 차지해 보겠다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먹여 보려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봤으나
내가 빈틈을 주지 않았고 사양하는 바람에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모두가 포기했고 나도 긴장의 끈이 좀 풀린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찰나
갑자기 내 입속으로 야채에다 회를 넣은 쌈하나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것이 아니라 쑤셔 박았다는 것이 옳은 표현 일 것이다.
입안에 한가득 머금은 채 잠시의 갈등을 했지만 현상금과 관련지어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는 눈들이 있었고
입속의 음식을 뱉으면 식사 자리에 결례란 생각에 일단 씹어 보기로 결정했다.
내 짧은 생각엔 비린 냄새가 코에 전해오기 전에 숨을 멈추고서 얼른 씹어 삼키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익힌 생선은 잘 씹히지만 회는 마치 고무덩어리처럼 입안에서 탱글탱글 돌아다니기만 한다.
숨 참는데 한계가 오기 전 대충 마무리해서 삼킨 후 코로 입으로만 연거푸 호흡을 해본다.
왜냐하면 코로 숨을 쉬면 비린 냄새가 전해 올 것 같아서.
호흡이 코로 돌아왔을 땐 예상했던 비린내는 없었고
익숙한 참기름의 고소 함과 초장의 단맛만이 남아있었다.
이것이 내가 회와 인연을 맺은 역사의 시작이다.
몇 번의 복습이 있은 후에
나는 이제 회를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신했다.
하루는 업체 사장 한분이 친구가 운영하는 싱싱하고 자연산만 취급하는 횟집이 있는데
회를 먹을 줄 알면 저녁을 먹자는 것이다.
나는 회를 먹을 줄 안다는 대답은 물론, 한발 더 나아가 회를 좋아한다고까지 하며 자리를 같이 했다.
그 가게는 좀 허름하긴 했지만 손님은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주문해 둔 회를 가져오라고 하니 입과 눈알이 커다란 우럭이 통째로 나온다.
자세히 보니 산 우럭을 회를 떠서 살점을 뼈 위에 다시 본래의 모습처럼 정렬을 해 놓은 것이다.
아직 살아서 입을 벙긋벙긋하면서 움직이고 있으니
회 초보인 나로선 회를 집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닐 수가 없다.
같이 자리한 사람은 한 술 더 나아가 장난기가 발동해 움직이는 우럭 입에 다 피던 담배까지 물려준다.
회를 좋아한단 말까지 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좀 있으면 움직이지 않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머리 쪽은 피하고 꼬리 쪽만 집었고
머리엔 상치를 덮어 가리니 먹기에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이 녀석의 명은 얼마나 긴지 한잠의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꼬리를 한번 들었다 놓은 바람에 난 기겁을 하고 주인을 불러
바로 머리와 뼈를 빼달라고 부탁을 했고 회를 좋아한다고 폼 잡던 것이 무색하게 되어버린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회를 잘 먹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