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인생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군 생활을 시작했다.
겨울철에 입대를 했는데 입대 나이가 조금 늦다 보니 친구들은 이미 군 생활을 하고 있어, 입대하는 날은 외사촌과 이종사촌 동생이 논산 훈련소까지 바래다주었다.
당시에는 입대를 위해 집을 나설 때는 몸성히 잘 다녀오겠다는 의미로 부모님께 큰절을 하고 나오는 것이 관례였지만 난 그렇게 하질 않았다.
왜냐하면 하필이면 입대할 무렵 어머니는 다리 골절상을 입어 거동이 불편했고 새벽에 훈련소로 출발하는 자식에게 손수 따뜻한 밥을 지어주지 못하는 아쉬움에 싸여있고, 안방에만 앉아 병고에 시달리며 생활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목이 막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나보다 한 두 살 아래인 외사촌과 이종사촌동생을 대동하고 대문을 나섰다.
훈련소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긴장한 탓에 음식 맛도 느끼지 못했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나에게 동생들은
“히야, 무조건 많이 묵어래이”
란 말만 되풀이했다.
훈련소 정문을 들어서면서 입대가 겨울철이라 빡빡머리가 시려 쓰고 온 모자를 벗어
동생들에게 던져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왔건만 두어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찾아온 시장기로 점심에 식당에서 남겨 둔 음식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훈련소의 생활이란 모든 이를 효자로 만들고 집과 가족생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람은 힘이 들거나 괴로워야 가까운 사람들이 생각나는 모양이다.
훈련 중 나는 흔히 말하는 고문관 기질이 있는지
실제 실탄을 장전하여 총의 영점을 잡는 사격도중
내 표적에 사격을 하지 않고 내 옆 사람의 표적에 쏘는 바람에 조교와 교관에게 번갈아가며 혼난 적이 있다.
총과 나의 악연을 그 후 훈련 과정을 마지막에 치르는 시험 관문인 측정에서도 일어났다.
세 종류의 자세로 250미터 전방에 있는 표적을 맞춰야 하는데
어느 특정 자세에서 다른 훈련병들은 모두가 한 발이라도 맞추고 통과하는 것을
나는 군 대식 표현으로 “빵발" 이란 불명예를 안고 혼자서 불려 나가
얼차려라는 명목의 기합을 받은 게 생각난다.
훈련 이수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유격 훈련장으로 보내진다.
나도 우여곡절을 거치고 그 대열에 합류했다.
대학시절 교련과목에 실제 군대에 입대하여
열흘간의 집체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유격 훈련이란 것을 맛을 봤고
그 훈련이 힘든 것도 알고 있기에 달갑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수료해야 훈련소 문밖을 나올 수 있으니
모두들 트럭에 실려 비포장 길까지 달려 한참 후에 도착한 곳은 유격훈련장 임엔 분명한데
경치가 너무 좋았다.
넓은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바위산들은 마치 달력에서나 보던 한 폭의 동양화 그림 같았다.
그런 감상의 시간도 잠시뿐이고 유격장이란 곳은 생각의 틈새를 주질 않는 곳이라
산악구보니 피티(Phisical Training) 체조 등 사람의 몸을 괴롭혀 볼 수 있는 것은 다하는 곳인 듯하다.
산악구보에 뒤처져 맞아 본 기억과 40~50명 수용이 가능한 막사에 100여 명을 취침시켜
모로 누워 자다가 화장실 다녀오면 내 잠자리가 사라져
침상에 걸터앉아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산악훈련장에서는 계곡 위에 거치된 줄에 의지해서 협곡을 건너는 훈련에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못하겠단 말을 했더니
특별교육 시킨다고 고참병 조교에게 인도되었는데, 마침 나를 특별교육 하려던 고참병 조교는 학교 선배여서 오히려 더 편한 신세가 되었다.
유격장에서 훈련소까지는 행군 코스로 온종일 걸었더니 발바닥엔 물집이, 발에 맞지 않는 군화로 인해 뒤꿈치는 까져서 상처투성이었지만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카투사로 입대한지라 논산훈련소를 떠나 야간에 열차로 평택에 있는 미군 부대로 가서 카투사의 기본 교육을 시작했다.
새벽에 도착해서 잠시 눈을 붙이고선 기상 후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가니 이건 내가 본 별천지였다.
훈련소에서 했던 식사와 미군 캠프의 양식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아도 짐작이 되리라 생각한다.
군침이 도는 음식냄새와 커피 향, 달콤한 과일 향까지.
코끝에 전해지는 각종 향기로운 냄새와 혀 끝에 전해오는 달콤한 맛에다, 보는 즐거움까지 더해지니 이것은 내가 본 천국임이 분명했다.
음식 이름을 몰라 미군 취사병이 어떤 음식을 줄까 하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This" 만을 외치며 받아, 맛나게 먹었지만 이것도 일주일정도 먹어보니 김치가 생각난다.
태생은 속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카투사 교육대에서는 판문점에 근무하는 JSA(Joint Security Area)에 근무할 사람들을 카투사 중에서 시력이 좋고 키가 큰 사람으로 뽑아 간다고 하니, 당시 내 체격조건으로 봐서는 차출 일 순위인지라 가짜 안경까지 부탁해서 착용했던 기억이 난다.
밖에서 보던 카투사는 모두 후방에서 근무하는 줄만 알았는데 내가 배치받아 간 곳은 동두천에 있는 미군의 전투 사단이었다.
그 미군 캠프에는 탱크와 헬기, 장갑차가 있고 캠프 규모도 버스 노선이 세 개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세대의 영어 교육은 문법 위주의 교육이라 대화를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가며 군 생활을 시작했지만 나중에 한미군사훈련에 통역병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군 생활 말기에는 미군들이 아침마다 하는 체조의 PT 교관으로도 활동한 덕에 제대 후 훈장(Army Comendation Medal)까지 받은 적도 있다.
이 훈장은 여러 차례의 이사로 인해 분실되고 훈장을 받았다는 훈장 수여증만 남아 있는 것 같다.
당시 한미연합군의 훈련 중 이 Team Sprit 란 훈련이 있었는데 입대 후 몇 달 이 지나지 않아 참가한 훈련이라 영어가 서툴렀다.
작전이 이루어지는 초봄의 강원도 날씨는 춥기만 했고 밤에는 얼었다가 낮에는 녹는 바람에 항상 흙이 떡처럼 달라붙어 있는 신발은 무겁기만 했다.
선임병 한 사람과 나는 하와이서 건너온 어느 보병 사단 주 보급대대의 통역병으로 배속을 받았지만 영어가 짧아 나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임병과 같이 배속받았으니 한편으로는 의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 믿음직했던 고참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감으로 다가왔다.
미군에서 지급해 주는 전투 식량을 밖으로 가져다 인근 가게에서 가져다주면 소주와 간단한 찌개 안주로 바꿔주니 선임병과 난 저녁에는 그 가게를 자주 들리곤 했다.
하루는 선임병이
"야 신병. 너 머리 아픈 걸 영어로 뭐라고 하나?” 하고 묻기에
난 "해드에이커요" 라고 답했더니
"영어 철자가 어떻게 되냐" 고 묻는다.
난 얼른 "HEADHCHE" 라고 답을 하니
선임병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내 머리를 가볍게 한 대 쿡 쥐어박더니 하는 말
"야 임마, 그것이 무슨 해드에이커 야? 해드아치지" 한다.
그리고선 머리가 아파 의무대(Sick Call)을 가야겠으니 자길 따라가자고 한다.
아마 간밤에 나랑 같이 가게에서 마셨던 소주 탓이라 생각을 하면서 레드 크로스가 그려진 병원 천막에 들어가서 군의관인 미군 여자 장교에게 경례를 하니
"무슨 문제가 있어 왔냐?”고 물어본다.
그 선임병은 유창한 영어로
“I have 해드아치"
그리고 바로 눈꺼풀을 까발려 눈을 보이며
“Red Eye. Because too much drink last night"라는 말을 마치니
군의관이 이해를 했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며 처방전을 적어준다.
그 처방전을 손에 받아 들고 신이 난 선임병은 병원 천막를 나서면서 다시금 내 머리를 쿡 쥐어박으면서 하던 말
“봐라, 해드아치 맞지?”
아직도 입가에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군 생활이 익어갈 즈음에 경기도 이천 지방으로 작전을 나간 적이 있다.
그때도 봄이었으니 땅이 얼고 녹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난 행정 부대 소속이니 작전을 나와도 그다지 할 일이 많았던 게 아니기 때 문에 주로 천막을 나와 밖을 거닐곤 했다.
아침이면 초등생 남매가 시골 농로 길을 걸어 학교 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남매는 하교 시간에도 항상 나란히 그 길을 걸어 집으로 간다.
무심코 보던 남매가 며칠사이에 눈에 익었고 시골 아이들인지라 때 묻지 않은 동심을 엿볼 수 있었다.
군대가 작전을 나갈 만큼 외딴곳이고 그러니 학교까지 거리도 상당했으리라 생각을 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남매가 등하교하는 걸 보는 것이 하루 일과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누나가 앞장서고 동생이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 여간 정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기에 하루는 애들의 하교 길에 내가 애들에게 말문을 열었다.
“얘들아, 너희들 이것 먹을래?"
하면서 미군 전투식량 (흔히 씨레이션이라 함)을 내밀었더니
애들은 놀란 눈으로 쳐다만 본다.
내용물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먹을래?" 라는 물어보는 말에 먹는 것이란 정도로만 알고 얼떨결에 받아 갔다.
사실 미군전투식량팩 안에는 애들이 좋아할 만한 갖가지 맛난 것이 들어 있다.
건조시킨 고기종류, 비스켓, 초콜릿, 심지어 껌까지.
그러니 그걸 받아간 애들은 집에 가서 풀어보고선 마치 성탄절 선물인 양 기뻐했으리라 생각을 해봤다.
그 이후로 그 남매는 하교 길에 우리 군용 막사 지역을 지날 때는 발걸음도 늦어지고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면서 간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그리고 난 그 애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 아이들에게 내 전투 식량을 전해주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 중에서 찾는 보람이었는데...
하루는 집에 갔던 애들 중 누나 되는 애가 돌아와 날 부른다.
“아저씨, 아버지가 우리 집에 와서 식사하고 가시라는데요”
난 그 남매를 생각해서 거절을 하지 못했고 또한 이렇게 해야 낼이라도 내가 전해주는 전투 식량을 이 아이들이 부담감 없이 받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에 따라나섰다.
주둔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골집인데 밥상에 식사를 차려놓고선 기다리고 있다.
인사를 하고 나서 군화에 흙이 많이 묻어 있고 군화는 벗고 신는 것이 불편하니 마루에 상을 내주면 신발 벗지 않고도 편하게 먹을 수 있다고 했으나, 시골 인심은 흙이 묻은 신발을 신은 채 들어오라고 한다.
그 말에 감동되어 신발을 벗고 방 안에서 맛과 시골 인심이 가득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사실 군화 바깥에는 질척이는 땅으로 인해 장화를 이중으로 신고 있었기 때문에 신거나 벗는 것이 더 불편했다.
작전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 남매가 학교를 안 가는 주말이면 어쩌나 내심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등교를 하는 날 철수를 했다.
난 등교하는 남매를 기다렸다가 오늘 철수하니 이젠 못 본다는 말을 전하면서 애들이 바라던 전투 식량을 마지막으로 손에 쥐어주고 나니 애들의 눈을 통해 아쉬움을 읽어 낼 수가 있었다.
아마 그렇게 인심 좋은 부모 밑에서 또한 그렇게 좋은 자연환경과 더불어 생활하고 있으니 지금은 이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단단히 하는 성실한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