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인생
군생활 중 생각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내 근무지는 동두천이고 휴가나 외박을 나가는 나의 집은 대구다.
그러니 서울을 거쳐야 대구를 갈 수가 있다.
동두천을 출발해서 서울에 내려 서울역으로 가는 방법과 고속터미널로 가는 방법 중
난 고속버스가 표를 쉽게 구하니 주로 고속터미널을 택했다.
한 번은 고참병과 같이 외박을 나와서 서울역으로 가게 되었다.
서울 사는 고참병은 서울역이 집에서 가깝다 해서 서울역을 택한 것이다.
대구행 기차표를 구입하니 출발 시간이 두어 시간이나 남았다.
고참병은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다방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바로 집을 가지 않고 시간을 같이 보내주겠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문제는 우리가 커피 마실만한 여유 돈이 없었다는 것이다.
원래 군 생활이란 집을 나설 때는 주머니가 두둑하고 부대를 나설 때는 주머니가 비어있는 법이다.
두둑하게 챙겨주던 주머니도 자주 가면 차츰 얇아진다.
돈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참병은 미화(달러)를 가지고 있으니
당시 1달러 면 800원 정도 되니
커피정도는 마실 수가 있다고 자신하며 다방에 들어섰다.
고참병은 일단 시켜 먹고
지불 방법은 나중에 미화로 지불하자고 했지만
역이나 터미널 주변의 인심은 야박하다는 걸 들은 적이 있어
다방에 들어서자마자 카운터에 주인처럼 보이는 여자에게 돈이 없는데 커피 값을 달러화로 지불하면 안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더니 단번에 거절을 한다.
우리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참에 우리에겐 누나뻘 되어 보이는 종업원이 우리를 돌아오라고 손짓한다.
주인에게 하는 말을 들었는데 자기가 커피를 사준다고 하면서 부담감 없이 마시고 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호의로 인해 커피를 마실 수 있었고 이 자리에서 표할 수 있는 감사의 표시를 어떻게 하나 둘이서 궁리를 해낸 것이 우린 행정 부대에 근무하고 있으니 미국 제품의 볼펜 같은 필기구를 많이 가지고 있어 그것을 기념품처럼 주고 나왔다.
외박기간 마지막 날, 군 복귀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평소 고속버스를 이용하던 나는 철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감동을 안겨준 커피 값을 갚지 않으면 왠지 평생 맘의 빚이 될 것 같아서 그 다방을 다시 들렀다.
그 종업원은 근무를 하고 있었고 주인을 제외한 종업원은 혼자라 무척이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신세 진 빚을 청산하고 나니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 기분도 잠시였다.
그 종업원의 말에 의하면 이 다방에 근무한 지가 오래되었고 우리처럼 딱한 사정의 사람들을 쉽게 접했고 모두 동생과 이웃 같아서 이렇게 대해줬는데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갚은 사람이 내가 처음이란 말에 이 시대의 어두운 면을 볼 수 있었다.
아마 그 맘씨 좋은 종업원은 이 세상의 밝은 어느 곳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제대 후 나의 4학년 복학생의 시간은 1, 2차에 걸쳐 치러지는 기사 자격시험에다 졸업작품 설계, 졸업논문 준비 등 정신없이 빨리만 지나갔다.
기사시험을 준비할 때는 마침 아버지가 입원을 해서 환자의 보호자를 하느라
병원에서 자면서 등교를 했고
아버지의 침대는 나의 공부하는 책상이 되었다.
당시에는 잠도 많았으니 하루는 피로를 느낀 나머지 염체불구하고 잠든 아버지를 밀치고 병상에 올라가 같이 누워서 자다 의료진에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기사 자격시험은 군 생활 중에 틈틈이 보아둔 책으로 인해 쉽게 합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졸업 작품 설계를 위해 조직된 우리 조는 4명으로서
나를 제외하고선 군 미필인 재학생으로 구성되었고 작품설계를 위해 숙소를 여관에다 한 달간 장기로 잡았다.
수업을 마치면 모두 그 여관으로 모여들긴 했는데, 서로 눈치만 보고 투숙한 한 달 동안 진척이 없었다.
나는 작업 효율이 떨어지는 여관 생활을 접고 내 방에 제도판 책상이 있으니 우리 집에서 하자고 제의를 했고 집으로 옮겨 설계를 끝냈지만, 그동안 실없이 보낸 시간으로 인해 급박해진 제출 기한을 맞추느라 졸작으로 출품하게 된 것 같다.
그러니 그 과목의 성적은 좋을 리 없었다.